근본 불교 이야기

4-1 부처님의 세계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6:04

4-1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생각

지금까지 우리는 연기와 무상, 고와 무아, 그리고 열반과 같은 불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문제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당신의 가슴에 그렸던 세계는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또 부처님은 도대체 우리들을 어느 곳으로 데려가려고 사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에 인용하는 경*(남전 상응부경전(35ㆍ23)一切. 한역 잡아함경(13ㆍ17)生聞一切)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렇게 들어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아’하고 제자들을 부르자, 제자들은 ‘스승이시여’하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체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눈(眼)과 색(色)이다. 귀(耳)와 소리(聲)다. 코(鼻)와 향기(香)다. 혀(舌)와 맛(味)이다. 신체(身)와 감촉(觸)이다. 의식(意)과 관념(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것을 일컬어 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이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설하리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말일 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섯을 잘 설명도 못할뿐더러 더욱 곤란에 빠질 것이다. 어째서이겠는가. 그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의 전문(全文)이다. 매우 짧은 경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누구나 감지할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가르침이 반드시 알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부처님이 하나의 훌륭한 사상가로서 그 가르침은 언제나 정연한 체계 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느 정도의 지적 교양을 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직후 설법을 주저하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남전 상응부경전(6·1)勸請. 한역 증일아함경(19·1)勸請)


내가 깨닫게 된 이 법은 대단히 깊고 또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적정미묘(寂靜微妙)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수한 사람(智者)만이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말씀하신 바를 충분히 이해하게 돌 때 그것은 명명백백하여 애매한 것이란 한 조각도 없어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열반에 대해 밧차구타라는 제자와 나눈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능숙한 유도로 바른 생각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게 된다. 정신을 차린 뒤 스승의 설법을 들어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뜻밖에도 단순하고 명쾌하여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었다. 그는 그 감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남전 중부경전 72 婆蹉衢多火喩經. 한역 잡아함경(34·24) 見)


부처님이시여, 이를테면 커다란 사라나무가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떨어지고 나무껍질도 벗겨져 오직 심재(心材)만 남겨 놓고 서 있듯이, 부처님이 설법하신 바는 모·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예부터 해온 방법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은 제법의 실상을 다 깨달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리얼리스트로 행동했던 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스트의 표백

부처님을 리얼리스트라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약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오랜 불교의 역사 안에서 부처님에게 그와 같은 규정을 시도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초기의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교법에 대해 표백(表白)한 귀의의 말은 분명히,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하는 분이었음을 인상 깊게 말하고 있다. 그 표백이란 다름 아닌 진리(法)에 대한 귀의의 표백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유형적 표현으로 말해지고 있다.*(남전 상응부경전(55·1) 王. 한역 잡아함경 (30·7) 王)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진리(법)에 대해서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를 갖는다. ‘진리는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졌다. 그것은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현실에서 증명되는 것:visible, belonging to this life, sanditthika)이며 때를 두지 않고 과보가 있는것*(때를 두지 않고 과보가 있는것:immediate, not belong to time, akālika)이며,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that which invites everyman to come to see for himself, ehipassika)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열반에 잘 인도하는 것:leading to Nibbāna, opanayika)dlu, 또한 지자(智者)들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것*(智者들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것:to be known by learned wise by himself, paccattam veditabbo viññahī)이다.


이러한 이러한 표백은 아함부의 여러 경전에 수없이 나타난다. 더욱이 이러한 삼보귀의의 표백과 사예류과(四預流果) 제 2 항으로써 거의 정형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 표백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 교법의 기본적인 성격을 조목조목 나열시킨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교법의 기본적 성격을 정리해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

2) 때를 어기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4) 능히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5) 지혜있는 사람이 각자 스스로 아는 것


그러나 이러한 조항은 약간 생소한 표현이므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첫째로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이란 중국의 역경가들이 ‘현견(現見)’ 또는 ‘현생적(現生的)’이라고 번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 현재 볼 수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법이란 본래 인생의 현실문제이다. 조용히 눈을 뜨고 가만히 그 진상을 관찰하면 현재 그 허망함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가 있다. 만약 부처님이 설법하는 내용이 미래사에 속하는 것이거나 죽은 다음의 일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에서 많은 종교가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현재 보고, 현재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현견’이고 ‘현생적’이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때를 어기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란 중국의 역경가들에 의해 ‘부대시절(不待時節)’로 번역되고 있다. 또는 ‘즉시적(卽時的)’이라든가 ‘불시(不時)’라는 용어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앞의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이라는 표현의 각도를 바꾸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결과가 나타나는 시기의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설법이 만일 신이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즉시는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는 그것이 내세의 왕생을 가르친 것이었다면 그 결과도 역시 유명을 달리하는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이 가르치는 진리는 천상의 일이 아니라 지상의 일을 말하는 것이며, 내세의 운명을 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부대시절’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중국에서 ‘내견적(來見的)’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이는 좀 특별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이 말이 갖는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누구에게라도 열어 보일 수(開示)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만인에게 개방된 진리’라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성립된 ‘원죄(原罪)’의 사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누구든 와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만인에게 개방된 진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것을 믿지 않으면 모른다든가, 그것은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제약이 없다. 그냥 와서 조용히 눈을 뜨고 보면 누구도 지견(知見)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있는 그대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특별하거나 신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내견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다.

네 번째, ‘능히 열반으로 인도한 것’, 다섯 번째 ‘지혜있는 사람이 각자 스스로 아는 것’이란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참고로 중국 역경가들의 변역어를 보면 ‘통달친근(通達親近), 연자각지(緣自覺知)’ 또는 ‘친근열반 즉차신현 연자각지(親近涅槃 卽此身現 緣自覺知)’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또 ‘이도지자응자지(引導智者應自知)’라는 표현도 있다. 이것을 좀 더 평범한 말로 바꾸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받으면 ‘아아 그렇구나 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까.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남전 상응부경전(12·14) 因緣法)


비구들이여, 이것은 여래가 세상을 출현하든 하지 않든 정해져 있는 것이다. 법으로서 정해져 있고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인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을 교시하고 선포하고 상설(詳說)하고, 개현(開顯)하고, 분별하고, 밝혀서 그리하여 ‘너희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현실에서 증명하고, 때를 어기지 않고 증명되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고, 능히 열반으로 인도하고, 지혜있는 사람이 각자 스스로 알 수 있는 진리(法) 그것이다.


허망 · 환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생적이라든가 즉시적이라든가 또는 내견적이라는 말은 생소한 용어인 만큼 역시 그 의미를 확실하게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 이를 알게 하는 경*(남전 상응부경전(35·70) 優波婆那. 한역은 없음) 라는 한 비구가 찾아와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스승께서는 가끔 ‘현생적인 법’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것이 현생적인 법입니까? 또 즉시적이고, ‘와서 보라’고 말하고, 열반으로 인도하며 또 지혜있는 사람은 각자 스스로 알 수 있는 법이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떤 법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우파바나라는 비구는 원래 사밧티 출신의 바라문으로 기원정사 건립을 계기로 신심을 일으켜 출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부처님의 시중을 들기도 했었다고 하니까, 결코 신참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 그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 문제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자의 질문을 받은 부처님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우파바나여, 여기 한 비구가 있다고 하자. 그는 눈으로 색(물체)을 보면 그것을 감지하고 또한 그것에 대한 탐욕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我) 안에 색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 ‘아아, 나는 내 속에 색에 대한 탐욕을 품고 있다’라고 스스로 느낄 것이다.

우파바나여, 이렇게 그 비구는 눈으로 색을 보면 그것을 감지하고 또 그에 대한 탐욕을 경험하고, 자기 속에 색에 대한 탐욕이 있으면 ‘아아, 나는 내 속에 색에 대한 탐욕을 품고 있다’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우파바나여, 그래서 나는 현생적인 법이란 이와 같이 즉시적인 것이며, 또한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인도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다시 귀와 소리, 코와 향기, 혀와 맛, 몸과 감촉, 의식과 생강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설명한 뒤, 그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파바나여, 여기 한 비구가 있다고 하자. 그는 눈으로 색을 보고 색을 감지하지만, 그것에 대해 탐욕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색에 대해 탐욕을 느끼지 않으므로 그는 ‘오오, 나는 내 안에 색에 대한 탐욕을 품고 있지 않다’라고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이렇게 그 비구는 누느올 색을 보면 색을 감지하지만 색에 대한 탐욕을 느낒 않고 또한 자기 속에 색에 대한 탐욕이 없으므로 ‘아아, 오오, 나는 내 속에 색에 대한 탐욕을 품고 있지 않다’라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파바나여, 이 현생적인 법이란 이렇게 즉시적이며 ‘와서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능히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지혜있는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처님은 다시 귀와 소리, 코와 향기 혀와 맛, 몸과 감촉, 의식과 생각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이런 설법을 듣고 있노라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관심이랄까 과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음이 짐작된다. 또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전환이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교법을 차근차근 음미하고 이해하는 것이 전제된다. 부처님의 교법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그리고 그에 때라 실천할 때 탐욕과 집착에 빠진 인간이 넓은 포용력과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고 있는 현생적인 법이란 켤코 이해못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구든 마음을 집중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자기가 품고 있는 집착이나 마음의 고뇌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집착을 떠난 사람이라면 마음이 평안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불타는 마음의불꽃, 그리고 그것이 훅 꺼져가는 과정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이땅에 쫓기는 마음의 암울하미 교법을 이해함으로써 밝혀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바로 알 수 있는 것을 부처님님에게 귀의한 제자들은 종종 암흑 속에 등불을 가져주시고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시듯‘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현생적‘ ’즉시적‘ ’내견적‘이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은 이러한 부처님 교법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현대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부처님의 설법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리얼리스트의 사상에 입각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태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인용할 경전의 설문이 있다. 그것은 ≪여시어경(如是語經)≫)*(남전 소부경전 102)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알고 있는 것, 보이는 것, 유루(번뇌)의 멸진만을 설한다. 모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은 그 분의 가르침이 결코 허망하고 환상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비하고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한 마디의 뜻이 무엇인지 새겨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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