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2-4 네가지의 명제(1)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5:47

 

2-4 네가지의 명제(1)


나뭇잎을 손에 들고

부처님의 초전법륜 즉 최초의 설법은 이렇게 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설법의 주내용이었다고 생각되는 사제(四諦)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제야말로 불교교리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실로 뒤에 발달한 모든 교리사상도 이 사제의 기본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더 강조해서 말한다면 이 사제의 원리에 합당하지 않은 교설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신서(申恕)’*(남전 상응부경전(56.31)申恕. 한역 잡아함경(15.43)申恕林)라는 제목이 붙은 경이다. 그것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코삼비(憍賞彌)의 신서파(申恕) 숲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신서파잎을 따서 손에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손에 가지고 있는 약간의 신서파잎과 이 숲에 있는 그것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

“부처님, 그야 물론 손에 잇는 잎이 적고 숲에 잎이 더 많사옵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고 내가 깨달아 알고(證智) 있으나 너희들에게 소용없고 범행(梵行)에 크게 도움이 안 될뿐더러 염리(厭離)ㆍ이탐(離貪)ㆍ멸진(滅盡)ㆍ적정(寂靜)ㆍ증지(證智)ㆍ등각(等覺)ㆍ열반(涅槃)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내가 말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고(苦)’라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고의 원인’이라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고의 멸진’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말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왜 이런 것들을 말했겠는가. 그것은 너희들에게 소용이 있고 범행에 도움이 될뿐더러 염리ㆍ이탐ㆍ멸진ㆍ적정ㆍ증지ㆍ등각ㆍ열반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것은 고다’라고 부지런히 수행하라. ‘이것은 고의 멸진이다’라고 부지런히 수행하라. 그리고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부지런히 수행하라.”


신서파라는 나무는 단단하고 커다란 나무였던 듯하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코삼비에 있는 신서파가 무성한 숲을 산책하다가 문득 나뭇잎을 몇 개 따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구들과 자신이 설법한 양이 어느 정도고 무엇을 설법했는지를 비유해 말씀하고 있다.

부처님이 신서파라는 나뭇잎을 비유해서 설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첫째는 부처님이 증지(證智)했던 내용을 제자들에게 설법한 것은 극히 적고 설법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처님이 제자들에 설법한 내용은 한 마디로 사제(四諦)라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는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을 설법했는가 하는 점인데 그것은 비구들에게 소용이 있기 때문이며, 범행(梵行)의 첫걸음이 되지 때문이며, 마침내는 등각ㆍ열반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부처님은 이런 점을 반복해서 여러번 설명하고 있는데 사제설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대목이다.


사제와 연기의 이법

사제의 설법을 들으면 이상한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다. 사제 속에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던 정각의 내용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신서(申恕)’라는 경의 앞부분에도 이런 느낌을 주는 구절이 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그것에 의해 눈을 떴고 지혜가 생겼고 적정(寂靜)ㆍ증지(證智)ㆍ등각(等覺)에 이르렀다.


이미 말했듯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닫고 얻은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의 이법’이다. 앞서 인용한 《자설경(自說經)》(1ㆍ1) (1ㆍ2)의 게송을 보아도 이 점은 명백하다. 다시 인용하면 이렇다.


진실로 열성을 다해 수행하던 수행자에게

만법이 확실해졌을 때

그의 의혹은 모두 사라졌다.

유인(有因)의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열성을 다해 수행하던 수행자에게

만법이 확실해졌을 때

그의 의혹은 모두 사라졌다.

제연(諸緣)의 멸진(滅盡)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인의 법’이라든가 ‘제연의 멸진’이란 다름아닌 연기의 이법이며 그것은 곧 깨달음의 당체이다. 그럼에도 사제를 설함에 있어 부처님은 그 어디에도 그러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다. 연기의 연자도 없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전의 전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에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정각의 내용을 그대로 설법하지 않았다. 우선 경전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현존하는 아함경전에서도 사제설법을 기록하고 있는 ‘여래소설(如來所說)’이라는 제목의 경전은 상응부경전 제5권 ‘대품(大品)’ 속에 집록되어 있다. ‘대품’은 상응부경전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의 집록임을 뜻하는 말이거니와 또한 여기에 들어 있는 경전들은 모두 실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정각의 내용 즉 연기의 이법에 관한 경전들은 모두 상응부경전의 제 2권 인연품(因緣品) 속에 들어 있다. 인연품이란 연기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설법한 내용을 모은 것으로 말하자면 연기의 이법을 중심으로 한 사상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에 임해서 사상으로서의 연기의 이법을 실천체계로서의 사제로 재편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이같은 재편성을 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이미 인용한 ‘권청(勸請)’이란 경제서 길게 설명한 바와 같다. 그에 의하면 당초 부처님은 설법을 주저하였었다. 그 이유는 이 이치*(이치:부처님이 깨달은 내용, 즉 연기의 이법)는 모든 것이 상의성(相依性)이며 연(緣;조건)인데 그것은 ‘적정 미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선 우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이 일단 설법을 주저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알아듣지 못할 사람에게 설법을 주저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윽고 생각을 바꿔 설법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런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권청’이라는 제목의 장에서는 ‘범천의 권청’이라는 신화적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여전히 최초의 설법에서 정각의 내용 즉 연기의 이법을 그대로 털어놓고 설법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인용한 실제의 설법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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