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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속이제 (眞俗二諦) - 제일의제, 세속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12

진속이제(眞俗二諦)
세속제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속의 도리로 설해진 것
진제 - 세속적 입장이 파기된 진리 ( 승의제, 제일의제 )

" 붓다는 두가지 진리에 의존해서 가르침을 펼쳤다.
일상적 관점에서의 진리(세속제)와 궁극적 관점에서의 진리(진제,승의제,제일의제)이다.
두가지 진리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붓다가 설한 교설의 깊은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우리는 공(空)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드러내어 설하는
것(假名)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이다. 연기/空 ?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은 없다."- 용수보살 중론


불서에 실린 진제의 의미
- 일체의 세속을 초월하고 불생불멸로서 말과 생각의 대상을 떠난 진리
- 말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보일 수 없다,
-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인식의 활동조차 없는 곳이다, 그기에 어떻게 문자의 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여래께서 문수사리에게 '승의'-진제를 설해보라고 하자, 문수사리는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므로
여래는 '문수여, 그대는 승의를 잘 설했다'고 말씀하셨다

비불교인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공(空)한 것이 아니냐(제법무아)
-모든 것이 생주멸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생주멸하는 것이 아니냐(제행무상)
-자아가 없다면 어떻게 인과응보라는 것이 있겠느냐.
-자아가 없다면 윤회는 어디에 있는가.
- ....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용수보살은 진속이제설로 대답했다.(이런한 구분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임)


진속이제의 일례

속제...........................................................진제
-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마라.....................선도 없고 악도 없다
-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존재한다..............세가지 시간은 얻을 수 없고 공(空)하다.
- 모든 중생들은 윤회한다..............................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 중생이 수행을 하면 곧 부처가 된다.............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곧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일체가 공(空)한데, 아픈 사람에게 그에 맞는 약을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세속의 도리로서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연기설도 당시 수행자들의 자아에 대한 집착( 실체는 영원하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밝혀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진제의 관점에서 일체가 공(空)하다고 한다면
생사도 공(空)하고 선악도 공하고 부처도 공하고 인과응보도 공하고,,,
이렇게 모든 것이 공하다면 어떻게 살든 공(空)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단멸론, 악취공,,)

이런 비판에 대해 용수보살은 이렇게 말한다.
- 공성(空性)이란 갖가지 세계관에서 벗어남이라고 깨달은 사람들의 의해 설해졌다,
그러나 공성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 잘못 파악된 공성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주술과 같이.
(* 자성(自性) - 그 무엇이 다른 무엇이 아닌 그 것이도록 하는 실체,
쌀의 자성 - 쌀이 보리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쌀이도록 하는 실체)
그러므로 자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만들어진다면 그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며
자성이 달라지면 그건 원래의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일체가 자성(실체)이 없어 텅비어 있다 ,공(空)하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는 가르침은,
일체가 공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삶이든 차이 날 것이 없고, 일체법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허무주의나 단멸론의 가르침이 아니다.
공성(空性)에 대한 가르침은 자아라는 착각에 집착하면서 세상의 모든 현상들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온갖 이분법적인 분별심으로 세상을 대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
해탈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이며,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과 같이,
비눗물로 때를 씻어내지만 비눗물도 마찬가지로 씻어내는 것과 같이 공성(空性)을 통해
무명을 벗고 제법무아 제행무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공성조차도 버린다는 말.


세상만사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마음이 곧 부처다, 놓아 버려라,,,선사들의 이러한 말을 듣고도
중생들은 그저 눈만 껌벅거릴 뿐 묵묵부답인 것이, 세속의 도리가 아닌 제일의제의 이치로
가르침을 펴기 때문인가...

" 스님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놓아 버려라 "
"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얼 놓으란 말씀입니까"
" 그럼 도로 가지고 가거라 "

이렇게 바꿀 수 있을라나.
" 스님 저는 이제 공성의 눈을 가졌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 공성이라는 것도 놓아버려라 "
" 이미 공한데 무얼 더 놓으란 말씀입니까 "
"그럼 도로 가지고 가서 공성을 바르게 다시 보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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