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불교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연기법의 종교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35

- 강사 : 이태승(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 주최 :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 후원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 일시 : 2008년 4월 23일
- 장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고타마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고타마붓다의 성도(成道, sambodhi, Abhi-sambodhi)는 불교의 탄생을 의미함과 동시에 불교적으로 붓다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오늘 강의 주제는 고타마붓다의 출가수행 이후의 성도기다. 강의를 맡은 이태승 교수는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대승불교 중관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 및 저서로는 (실담자기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 (을유불교산책 ―깨달음에서 지혜로) (인도철학산책) 등이 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는 불교적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말 자체는 상당히 모호합니다. 의미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자들은 불교를 이야기할 때 무조건 ‘깨달음의 종교’라고 정의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정의는 조심스러워야 하며 정확해야합니다. 물론 붓다의 정각 체험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적어도 불교를 칭할 때는 깨달음의 질적인 의미인 ‘지혜’란 말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지혜는 ‘연기(緣起)적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제가 (을유문화산책-깨달음의 지혜로)의 서문에 쓴 글을 소개합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다. 지혜란 연기에 대한 체득을 바탕으로 생겨난 삶의 통찰력과 합리적 실천 능력이다. 모든 번뇌를 떠나 지혜를 얻은 부처님은 이타행과 자비행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로의 법을 주었다. 부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중생에서 부처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곧 정신과 마음의 자기변화이다. 이것을 수행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의 정신과 마음을 닮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왜 처음부터 반야를 강조했을까요. 불교의 합리적 지혜라고 하는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의 핵심이 바로 연기입니다. 이후 대승불교철학에서는 ‘공(空)’으로 이야기 됩니다. 이것은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붓다의 성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불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동양으로 전개된 불교는 여과되고 습합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불교의 보편성을 알기에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붓다께서 살아 계셨던 인도 당시로 최대한 접근해 보고자합니다. 불교는 또한 신앙적인 부분과 동시에 철학적인 부분으로도 상당히 심오합니다. 붓다 당시 이미 인도에 ‘자아(我)’라는 개념이 있었기에 불교의 ‘무아(無我)’개념이 나올 수 있었다는 관계성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불교가 나오기 전 인도는 베다와 우파니샤드라는 문화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상 속에서 불교는 ‘我’를 바로 앎으로서 해탈에 이르는 수행을 제시했습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존이라는 인도의 보편적 이념 속에서 고타마붓다의 고민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의 진리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의 토론이 공존했던 사회 구조를 지닌 인도였습니다.

저는 고타마붓다가 연기법에 의해 성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완전한 행복, 윤회로부터의 해탈로써 성도는 불교의 근본 지향이 됩니다. 인간의 사유를 벗어나지 않는 연기적 성도에 대한 근거로 근본경전인 남전대장경 <율장(律藏)>의 대품(大品)을 살펴보겠습니다. 붓다는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 옆의 보리수 아래에서 7일간 7그루의 나무를 옮겨가며 49일간 법락(法樂)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1의 7일에 순역(順逆)의 순서에 따라 연기를 생각하심과, 제3의 7일에 무찰린다 용왕의 엄호, 제5의 7일에 이루어진 범천의 권청 부분에 주목합니다.

제1의 7일.
‘세존은 그날 밤 초야(初夜)에 연기를 순역의 순서에 따라 생각하셨다.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행에 연하여 식(識)이, 식에 연하여 명색(名色)이,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촉에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하여 애(愛)가, 애에 연하여 취(取)가, 취에 연하여 유(有)가, 유에 연하여 생(生)이, 생에 연하여 노(老)ㆍ사(死)ㆍ수(愁)ㆍ비(悲)ㆍ고(苦)ㆍ우(憂)ㆍ뇌(惱)가 생긴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고온(苦蘊)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환멸연기로서 무명이 남김없이 소멸되면 모든 고온이 소멸한다.’ 고타마붓다는 자송(自頌)의 게를 외우셨습니다.‘노력하여 깊이 생각하는 바라문에게, 갖가지 이로운 법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의 의혹은 모두 사라진다. 원인이 되는 이치를 확실하게 아는 까닭이다. 연이 소멸하는 이치를 아는 까닭이다. 모든 것을 다 알아 걸림이 없어 마치 태양이 천공을 비추는 것과 같다.’

제3의 7일.
삼매로부터 나온 고타마붓다는 무찰린다 나무 아래에서 다시 결가부좌를 하시고 해탈의 기쁨을 누리십니다. ‘갑자기 큰 구름이 생겨나 7일간 계속 비가 내렸고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무찰린다 용왕이 자신의 용궁에서 나와 세존의 몸을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큰 머리를 들어 세존의 머리를 덮으며 세존을 보호했다. 7일을 보낸 후 하늘이 개이자 용왕은 그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합장하고 귀의했다.’ 고타마붓다는 자송(自頌)의 게를 외우셨습니다. ‘만족을 알고 가르침을 듣고, 진리를 본다면, 홀로 있는 것은 즐겁다. 세간에 대한 노여움이 없고, 유정에 대하여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즐겁다. 세간에 있어서 탐욕을 떠나고 모든 욕망을 초월하는 것은 즐겁다. 그렇지만 아만(我慢)을 조복하는 것은 최상의 즐거움이다.’

제5의 7일.
세존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생겼습니다. ‘내가 깨달은 이 이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고요하며, 생각의 경계를 넘고 미묘하여 현자만이 능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집착의 경계를 즐긴다. 그런 이들은 차연성(此緣性)과 연기(緣起)를 보기 어렵다. 만약 내가 이 법을 설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피로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 고타마붓다는 침묵을 지키며 법을 설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당시 인도 철학의 핵심적 존재이자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梵天)은 붓다의 생각을 알고 세간이 소멸함과 성도의 침묵에 안타까워합니다. 범천은 붓다에게 합장하며 청합니다. ‘원컨대 법을 설하소서. 유정이더라도 그 더러움이 적은 자가 있어 법을 듣지 않으면 퇴보하더라도 법을 들으면 깨달을 것입니다.’ 붓다는 천안으로 세간을 관찰하시고 범천에게 게송으로 설합니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자신의 믿음은 버려라. 범천이여, 사람들을 번거롭고 힘들게 할 것이라 생각하여 미묘한 정법을 설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범천은 붓다의 설법을 확인받고 경배한 후 사라집니다. 범천의 권청은 전법 행진을 출발하는 붓다의 마음이 드러난 에피소드입니다.

불교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연기법의 종교입니다. 불법은 연기에 의해 귀일합니다. 붓다의 고행 6년이라고 하는 사유의 시간은 궁극의 지혜로 행하게 한 연기의 과정입니다. 수자타 여인의 유미죽 공양을 드시고 선정에 드신 이후 최초의 법륜을 설하실 때까지 시간을 짧게는 30일에서 길게는 60여일이 걸린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개념이 순간적인 종교체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도있게 구체화되지 않은 성도의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보다 길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젊은 날의 잠깐 용맹정진으로 깨달을 수 있는 궁극의 진리였다면, 고타마 붓다가 현재 우리에게 이토록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기의 도리는 관계성을 원리 그대로 체계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이러한 연기법을 설한 것은 오직 불교뿐입니다. 괴로움의 실체를 밝히는 12연기를 통해 고타마 붓다는 성도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에 고타마 붓다의 성도는 인간 정신의 내면적 질적 전환과 인간으로서 완성된 성자의 가능성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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