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악마
악마는…바로 ‘내 마음’속에 살고 있다
한국 축구응원단 붉은악마(red devils)가 기분 나쁘다고 해서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운 이름의 응원단을 만들어 활동 중인 일화는 유명하다. 불교신자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을 기독교도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처럼 악마(惡魔)는 기독교 전유물로 인식돼 있다. 국어사전은 악마를 ‘악 또는 불의를 의인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정의했다. 악의 탈을 쓴 인간이 악마라는 것이다. 악마의 반대는? 천사나 선인(善人)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불교입장에서 보면 악마도 선인도 없다. 악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인 마라(魔羅)는 무엇인가. 불화나 조각에 등장하는 악마들은 누구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고 있는 손모양(手印) 항마촉진인(降魔觸地印)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교는 과연 악마를 부정하는지,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악마와 싸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죽음 직전 까지 가는 고행을 할 때와 성도 후에 이 마라는 부처님을 자주 괴롭힌다. 마라가 처음 등장할 때는 출가를 결심하던 날 밤이다.
-사진설명- 마왕의 무리들이 칼로 싯다르타를 위협하고 있다.
육계가 뚜렷하게 표현된 것에서 싯다르타가 정각 직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
〈본생경〉에는 악마가 “왕국을 다스릴 기회가 오니 가지 말라”며 외쳤다고 한다. 홀로 고행할 때 악마는 다시 나타났다. 부처님은 카필라 성을 나선 뒤 여러 스승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받지만 모두 버리고 홀로 고행한다. 그것은 식사양을 점차 줄이다 나중에는 아예 곡기를 끊고 호흡을 멈추기 직전까지 끌고 가는 죽음 직전의 극한 상태다. 이 때 ‘악마’가 등장한다. 악마는 보살을 유혹한다. “세상에서 목숨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목숨이 있어야 수행도 할 수 있다. 마음을 억제하거나 번뇌를 끊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즐거운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바라문이 하는 것처럼 불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고행을 통해 번뇌를 끊는 것은 불가능 하다. 공덕을 쌓지 못할 까 걱정하는 모양인데 쉽고 편한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에게 정말 혹하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보살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가 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다.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행을 계속하면 육체나 피는 말라버리지만 내 마음만은 항상 고요히 가라앉는다. 헛되이 살아서 무엇할 것인가” 그러자 악마는 물러난다.
두 번째 악마가 출현한 것은 부처님이 6년 고행을 끝내고 성도를 이루기 직전, 보리수 아래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을 때다. 마왕은 딸들을 불러 유혹하도록 명령한다. 불전에는 서른두 가지 교태를 보였다고 적었다. 마왕의 딸들은 갖은 아양을 떨면서 유혹했다. 그 요지는 이렇다. ‘젊고 잘생긴 사람이 왠 좌선이냐. 꽃피는 봄 날 우리랑 함께 즐겁게 놀자.’ 보살은 이런 말로 거절했다. “육체의 쾌락에는 고뇌가 따른다. 사람들은 이 도리를 알지 못해 욕정에 빠져있다. 나는 절대적인 정신의 자유에 도달하려고 한다.” 보살은 오히려 악마의 딸들을 타이른다. “너희가 이쁜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옛날 선업을 쌓아서 인데 지금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선악 이분법 부정하는 불교에선 악마도 천사도 없어
부처님 유혹한 악마 ‘마라’는 ‘천상欲界’ 최고의 왕
탐진치 못버리면 마라에 굴복…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여색을 통한 유혹이 통하지 않자 폭력을 사용했다. 마왕파순이 온갖 무기를 쏘았지만 부처님 머리위에서 모두 아름다운 꽃으로 변했다.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대응한 것이다. 악마는 이번에는 권력을 제시했다. “부처가 되거나 해탈하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니 세상의 지배자가 되거나 천상에 올라가 내 자리를 잇든지.”
결국 악마(마라)는 갖은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성도를 막지 못했다. 악마는 부처님이 성도 하자 “바로 열반에 들라”고 소리친다. 부처님은 “모든 인류가 이 진리를 올바로 찬양할 때 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악마는 부처님 열반 직전 까지 나타나 괴롭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악마는 누구인가. 이름은 마라 파피야스((魔王波旬)다. 사는 곳은? 지옥이나 시궁창 같은 더러운 곳이 아니라 천상이다. 그것도 욕계(欲界) 중에서 최고라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이다. 욕계란 인간이 사는 세상부터 아래로는 지옥 위로는 신의 일부 세계 까지 포함된다. 부처님은 마왕파순이 욕계의 왕이라고 했다. 단 한번의 선업으로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부처님의 고행에서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나타나 괴롭히던 악마를 통해 우리는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악마는 대상화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나태, 분노, 쾌락, 본능, 명예 등이다. 우리 마음 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의 권위 관습도 악마다. 이들의 실체를 잘 아는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군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제1군은 애욕이다. 제2군은 의욕 상실이고 제3군은 주림과 목마름이며 제4군은 갈망이다. 제5군은 비겁이고 제6군은 공포이며 제7군은 의혹이고 제8군은 분노다. 그리고 제9군은 슬픔이다. 그 위에 명예욕까지 갖추고 있다.”
이같은 욕망은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서 기인한다. 모든 번뇌는 삼독심에서 비롯된다. 삼독심을 버리지 못하고 노예가 된 자는 악마 마라의 ‘밥’이다. 〈법구경〉은 이렇게 말했다. “쾌락만을 좇아 사는 자, 자신의 오감을 통제하지 못하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며 게으르고 나약한자, 마라는 반드시 그를 쓰러뜨릴 것이다. 마치 바람이 나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8정도를 닦아 번뇌를 소멸해야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참선 염불 주력 등 수행을 통한 마음 공부는 악마와 싸우는 가장 긴요한 무기인 셈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거나 ‘마음 하나 돌이키면 곧 극락이며 지옥’이라는 선가(禪家)의 금언(金言)은 악마도 천사도 모두 마음에 달려있음을 말한다.
악마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십자가라고 했다. 상대방을 연민하는 자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진력,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의지, 목표한 바를 이루어내는 실천력 그것이 바로 악마가 무서워하는 ‘악마의 적’ 이다. ‘악마의 적’은 우리 마음속에 악마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면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악마의 유혹을 받고 싶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
# 기독교의 악마
사탄 바알세불 마귀는 서로 다른 존재
이브에 금단의 열매 먹게한 뱀은 사탄
기독교에서는 악마, 사탄, 바알세불 (Beelzebul), 마귀 (devil)라고 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존재지만 모두 악마의 의미로 쓰인다. 바알세불은 신약시대에 귀신대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악마는 세상에 군림하는자, 거대한 용, 옛 뱀, 악마의 제왕, 마왕, 불신의 자손들에 거하는 영(靈), 적그리스도라고도 불린다. 사탄(Satan)은 헤브라이어 ‘적(敵)’을 뜻한다. ‘루시퍼’라는 이름의 대천사(大天使)였는데, 신이 부여한 시련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인간세계에 떨어졌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라고 표현한다. 사탄은 모습을 자유로이 바꾸는데, 구약성서 〈창세기〉에 뱀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게 한다.
오늘날 서양 기독교 계통의 종교가 선 악 이분법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짜라투스트라다. 그는 이원론의 창시자였다. 선과 빛 어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이후 그리스와 히브리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이 둘의 합체인 기독교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종교에서 악마는…
죽음과 자연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
애초엔 숭배 대상…뱀 등의 동물로 형상화하기도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죽음과 자연을 두려워 하는 인간의 심성이 종교로 이어졌다. 악마는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관념의 산물이다. 그런 면에서 악도 선도 마음에 달렸다는 불교 교리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처음에 악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샤머니즘이나 토템 신앙을 여전히 믿는 일부 부족들의 종교행태를 조사한 결과, 인간을 괴롭히는 악령은 진지하게 섬기면서도 선령(禪靈)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집트인들은 세트 베스 티폰 등 다양한 이름으로 그들을 숭배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아테네 등 여러 민족들이 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나 제물을 바쳤다. 식인(食人) 풍습도 식량난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신의 분노를 진정시킨다는 종교적 목적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죽음이었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나오는 아멘티의 괴수 암무트나가 대표적인 죽음의 신이다. 혼돈과 암흑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빌로니아의 티아마트, 페르시아의 아흐리만(유대인들은 사탄이라고 불렀다)은 모두 혼돈의 악마다.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 유럽에서는 더 많은 악마가 나타났다.
인간들은 악마를 동물로 형상화했는데 뱀이 단연 수위를 차지했다. 뱀 머리를 한 용도 불명예를 덮어썼다. 주로 기독교가 탄생한 중동지역에서 뱀과 용을 경원시했다. 지금도 기독교는 뱀과 용을 사탄의 화신으로 멀리한다. 보수적인 한 기독교 단체는 십수년전 용 모양 국쇄(國碎) 문양을 제작하려는 정부 움직임을 막은 적이 있었다.
적국에서 섬기는 신이 졸지에 악마로 둔갑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연개소문과 이순신장군이 중국과 일본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이 사탄으로 부른 ‘바알세불’은 페니키아인들이 섬기던 신이다.
인도의 브라만과 이를 이은 힌두교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절대적으로 악하지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와 가장 비슷하다.
중세 유럽 기독교 문명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악마 논쟁은 근대에 들면서 인격적 실체가 아닌 주관적 산물이라는 관점으로 변화하고 있다. 마치 〈이솝우화〉에서 “왜 네가 양을 먹는 것은 괜찮고 내가 먹는 안되느냐”고 묻는 것 처럼.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마음의 산물이라는 불교 관점을 닮아가는 것이다.
# ‘악마’ 데바닷다의 교훈
세속욕망에 사로잡힌 ‘불교의 유다’
부처님 네번이나 시해하려다 실패
기독교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에 비견되는 불교 인물이 데바닷다이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사에 그는 거의 유일무이한 악마로 낙인 찍혀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네번이나 시해하려다 실패한 최악의 악마다.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밟아 죽이려 하고, 자객을 통해 청부살인을 시도한다. 부처님의 법력으로 인해 실패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 돌을 굴려 시해를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손톱에 독약을 묻혀 부처님을 죽이려다 자기가 되레 죽는다. 그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 제자인 연화색 비구니를 죽게 하고 충고하는 법시 비구니를 살해했다.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를 아내로 삼으려 했다. 이쯤 되면 악마의 반열에 오를만한 악행이다. 살해 동기도 불순하다. 부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으려 한 것이다. 가장 큰 죄악은 불교교단을 분열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똑똑하고 정진도 잘했다. 부처님 사촌이며 다문제일(多聞第一)아난의 친형인 그는 두타행에 뛰어났고 경전에도 해박했다. 무엇보다 엄격한 고행을 강조하는 원칙주의자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부처님의 유연한 태도를 비판했다고 한다.
그가 뛰어난 정진력과 총명한 두뇌로 부처님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악인의 나락으로 떨어진데 대해 란지푸 대만불광대 종교학과 교수는 “세속 권력에 대한 미련, 왕족 출신이라는 우월의식, 개혁과 변화에 대한 반감 등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불교신문 2323호/ 5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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