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는 15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과 그로 인해 출현한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을 살펴보고,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가톨릭 내에서의 반동개혁 운동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에는 17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전통에서 생긴 몇 가지 사건과 그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 정신의 출현
서양에서 근대성(modernity)라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몇 세기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새로운 정신발달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을 촉진시킨 세 가지 커다란 요인을 들라면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에 의해 촉발된 근대정신이 그리스도교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1)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말 그대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예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으로부터 단절하려는 뜻은 없었지만, 그리스·로마의 문예를 강조한다는 자체가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를 무의식적으로나마 비판하는 셈이었다. 이런 초기의 무의식적 비판이 그 도를 더해 가다가 결국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드러내 놓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르네상스 운동의 선도주자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는 지금까지 신에게 쏠렸던 관심을 인간에게 향하도록 했다. 인간은 원죄를 쓰고 나온 존재로서 신의 용서를 받아야 할 처지라는 생각을 뒤로하고 인간의 가능성과 성취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마틴 루터가 《의지의 속박》이라는 저술을 쓴 것에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에 대하여》라는 책을 낸 것이 그 뚜렷한 예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삶을 사후의 삶에 대한 준비단계에 불과한 것이라 보지 않고 지금 여기서 풍요로운 삶을 즐겨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은 더 좋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책들이 나타났다. 그 외에 미술, 조각, 건축, 문학 등을 통해 이런 인간 중심적 사고를 표출하기도 했다. 교육을 비롯하여 문화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교회의 통제로부터 해방되는 세속화의 과정이 시작된 셈이다.
2) 자연과학의 발달
16세기 이전까지는 모두 우주가 신과 천사들이 거처하는 하늘과 인간이 사는 땅, 그리고 마귀와 그 부하들이 거하는 땅속이라는 3층 구조물이라 믿었다. 우리가 보는 파란 하늘은 지구의 지붕이면서 동시에 신이 거처하시는 하늘의 마루바닥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또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해, 달, 별이 주기적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 1543)가 《천체의 순환운동에 관하여》라는 책을 내면서 이런 천동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틴 루터는 물론 에라스무스 같은 르네상스 지도자 중에서도 새로이 등장하는 자연 과학의 발견을 비웃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같이 과학적 탐구를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과학자, 공학도였던 사람도 등장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적으로만 주장했던 지동설을 17세기 갈릴레오(Galileo, 1564~1642)는 그 당시 새로이 만든 망원경 관찰을 통해 실제적으로 증명했다. 교황청은 갈릴레오에게 지동설을 취소하라고 명했다. 그 때는 지구도 교황청의 허가 없이는 돌 수가 없었던 셈이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취소하겠다고 약속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갈릴레오는 1633년 결국 파문되고 그의 저술은 케플러, 코페르니쿠스의 저술과 함께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가 1822년에야 풀려났다. 1992년 교황청은 갈릴레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그를 복권시켰다.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천재의 세기’라고 불리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 과학적 지식은 놀랄 정도로 증가했다. 데카르트(Ren?Descartes, 1596~1650)와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과학적 방법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확립하고, 이어서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들고 나오면서 ‘뉴턴의 시대’, 혹은 ‘이성의 시대’가 만개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방법론적 ‘의심’을 통해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하여 입증하는 과학적 방법이 보편화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진화론이 등장하였다. 중세 대부분의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약 6천 년 전 신의 말씀에 의해 6일 동안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찰즈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1859년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발표하면서, 생물들이 오랜 시간을 통해 지금의 상태로 ‘진화’된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전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지구 중심설에 대한 믿음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로 흔들리게 되었는데, 모든 생명이 진화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화론은 정통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설상가상인 셈이었다.
3) 계몽주의
과학적 혁명에 뒤이어 18세기에 꽃핀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이성(理性)의 세기가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종교, 철학, 도덕, 음악, 건축, 문학 등 모든 문화 영역에서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 세운 프랑스 혁명은 종교적 전통이 모시는 신 대신에 ‘이성의 여신’을 옹위한 셈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도 이런 이성의 기초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강조하지만 계몽주의는 처음부터 종교적 신념을 배격하고 이성을 통해 독립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했다. 구체적으로 자연과학이나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류 문화가 발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의 행복도 증진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가의 대표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들 수 있다. 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통해 전통 종교에서 가르치는 신의 섭리라든가 기적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윤리적 필요에 의한 ‘요청’으로서의 종교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이라든가 내세, 불멸 등은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므로 순수 이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고, 이런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윤리적 삶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실천적 요청에 의해 이런 것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이신론과 경건주의의 출현
18세기까지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과학과 종교의 충돌을 피하려는 노력이 생겨났는데, 첫째가 이신론이고 둘째가 경건주의였다. 이신론(理神論, Deism)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이제 우주의 뒤안길에 물러나 있다는 생각이다. ‘궐석 신(absentee God)’인 셈이다. 마치 자동시계를 만든 사람이 일단 시계를 만들어 놓고 시계가 그냥 돌아가게 한 것과 같이, 신도 세상을 만든 다음 스스로 돌아가게 해 놓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신의 직접적인 조작이나 간섭 없이 자연 법칙에 따라 저절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나 개인의 문제에 신이 섭리나 기적을 통해 직접 개입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창조주의 개입이 없는 세계는 오로지 이성으로 연구할 대상이라 보았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이성을 통해 자연 법칙을 발견하고 발견한 법칙에 맞추어 살고, 이를 통해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다. 뉴턴 같은 과학자를 비롯하여 미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등 18세기 많은 지성인들과 과학자들이 이런 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이런 이론이야말로 극히 논리적이므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부터 구하고 하는 길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에서 발견되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은 화끈한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이성에만 의존하기에 종교의 체험적이고 신비적 차원 같은 것을 소홀히 하는 등 종교로서는 뭔가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좀 더 뜨겁고 신비스러운 차원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런 요구에 응해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 운동이다.
경건주의의 시초는 17세기 독일 루터교 계통에서 일어난 새로운 개혁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처음에는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메마른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오기 전 시골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그리워하게 되고, 동시에 도시 생활 전반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해이, 세속화, 형식주의 같은 것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싹튼 종교 운동이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냉랭한 이성적 교리가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정적 체험이었다. 이신론적 설명으로는 이와 같은 그들의 종교적 필요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런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 중심의 믿음, 죄의식과 용서 받음, 개인적 회심, 단순한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성결의 실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등을 강조하였다. 이런 경건 운동은 18세기 기존의 여러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또 새로운 종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지난 회에서 살펴본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였다.
근본주의(根本主義)의 등장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거쳐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천문학, 생물학, 철학, 역사학, 문헌학, 사회학, 심리학 등 본격적인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헤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하, 칼 마르크스, 시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사상가가 등장하고, 자유주의나 휴머니즘이 정신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성서를 이른바 ‘역사 비판적 연구 방법’을 통해 보려는 시도가 왕성해졌다. 성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은 책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에 의해 특수한 환경과 필요에 따라 기록된 역사적 산물의 집합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학문적 발전이나 발견을 환영하고 받아들였지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진보의 물결을 도전으로 생각하고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 더러는 이런 도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1910년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진리의 증언(Fundamentals: A Testinomy of Truth)’이라는 일련의 책자를 발간하고, 이런 자유주의적 사고에 대항해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항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양보할 수 없이 사수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라 주장했다. 그 다섯 가지는 1) 성경이 문자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성경무오설, 2) 예수가 문자 그대로 처녀에서 태어났다는 동정녀 탄생설, 3)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 피를 흘리셨다는 대속설, 4) 예수가 죽음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났다는 육체 부활설, 5) 그가 장차 영광 중 다시 오리라는 재림설 등이었다.
이렇게 ‘근본’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라 했다.1) 이들은 이런 다섯 가지 근본 조항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결국 ‘믿을 수 없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맹신’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1942년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형성된 이후 이들 근본주의자들의 극보수주의적 태도를 약간 완화하면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Evangelicals)’라 칭하였다. 이들 중에는 ‘성령 받음’이나 개인적으로 ‘거듭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을 흔히 ‘카리스마(charismatic)’ 혹은 ‘거듭난(born-again)’ 그리스도인이라 하기도 한다.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같은 보수적 성향을 나누고 있다는 데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근래에는 이들 근본주의자들 중 ‘성경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하며 이른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이라는 것을 창안하고, 이를 일반 학교에서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일반 과학자들은 이런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증거보다도 어디까지나 믿음에 근거한 것일 뿐 과학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낙태, 여성 목사 안수를 위시한 여권신장, 동성애, 안락사, 뉴에이지 운동 등이 성경의 문자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는 등 사회·정치적 문제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이런 근본주의가 유럽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서양 세계에서 일종의 기독교 후진국에 속하는 미국에서도, TV에 빈번히 나타나는 이른바 ‘TV 전도자들(televangelists)’ 때문에 세가 대단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주로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이런 근본주의 선교사들에게서 그리스도교를 전해 받은 피선교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다수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도 이런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피선교국으로서 현재 90% 이상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근본주의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의 선교 운동
그리스도교는 세계 종교에서 불교와 이슬람과 함께 그 가르침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전하려고 노력하는 종교다. 불교에서 이를 ‘포교(布敎)’라 하듯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를 주로 ‘선교(宣敎)’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하나였던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에 일곱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인도인들 중에 도마(Thomas)나 매튜(Matthew) 같은 그리스도교 이름을 성으로 하고 있는 이른바 ‘성 도마 그리스도인들(St. Thomas Christians)’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세운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제2 창시자라 할 정도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도 바울도 열렬한 선교사로 그 당시 ‘온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소아시아와 남유럽 지역을 세 번이나 도는 ‘선교 여행’을 하며 가는 곳 여기저기에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전통에 따라 가톨릭에서도 일찌감치 해외 선교활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지난 회에 언급한 것처럼 16세기 설립된 예수회는 선교와 교육에 힘쓰고, 그 회의 소속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 같은 사람은 인도와 일본으로까지 선교사로 나가고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가서 선교에 전념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또 스페인 군대와 함께 중남미로 가서 중남미를 실질적으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 영국 교회 소속 요한 웨슬리도 1735년 미국 조지아로 선교여행을 하고, 그로 인해 현재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단이 된 미국 감리교의 터전을 닦았다고 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선교열이 최고조에 달했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개신교는 선교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셈이다. 특히 칼뱅의 예정론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 계통에서는 누구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 이미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을 사람이라면 자기네가 선교를 하든 안 하든 구원 받을 것이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어차피 못 받을 터인데, 자기네들이 나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시간과 돈의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부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모두 이런 생각에서 벗어났다. 19세기 중반 거의 모든 개신교 교파들은 어떤 형태로든 해외에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활동에 적극적이 되었고, 해외선교를 전담하는 여러 가지 기관들을 설립했다.
이런 기관들에 의해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로마 가톨릭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남미 등지로도 더러 갔지만,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 등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보지 않았거나 덜 받은 곳을 선교지로 택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 한국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찾아 왔다. 여기서 약간 곁길을 가는 듯한 감이 들지만, 우리 주위의 그리스도인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도입되고 뿌리내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잠깐 살펴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시작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것이 엄격하게 따지면 신라 시대라 보는 견해도 가능하다. 431년 그리스도교 교리 논쟁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가 페르시아와 인도를 거쳐 7세기 중국 당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경교(景敎)라 하였다. 8세기 경 당나라에 크게 성행했는데, 그 당시 당과 신라의 관계로 보아 분명히 신라에도 소개되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경주에 돌로 된 경교의 십자가 모양의 물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경교의 경우 외에도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594년 그레고리오 데 체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와 일본 예수회 회원 한 명이 일본 가톨릭 교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장군의 군대를 위한 군종으로 한국에 왔다고 한다.
다른 불교인 장수와의 불화로 둘은 곧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들이 한국인들과 접촉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들로 인해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생겼다는 흔적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 군대에 의해 나가사키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정부에 의해 순교 당한 205명 중 적어도 13명은 조선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2)
그리스교가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국을 통해서이다. 1600년을 전후로 청국 조정에 사신으로 가던 조선조 수신사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예수회 가톨릭 선교사들의 서책을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이수광(李?光)이 중국에 갔다가 1603년에 출판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릿치의 중국말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오고, 그 외에 소현세자 같은 이들도 1644년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가톨릭 서적을 다수 가지고 왔다.
이런 것들이 그 당시 남인계 실학파(實學派) 젊은 학자들에 의해 ‘서학(西學)’의 일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서학에 대한 이런 지적(知的) 호기심이 점차 종교적(宗敎的) 열성으로 바뀌어 18세기 중엽경에는 이들 중 상당수가 서학을 하나의 종교로 받드는 열렬한 신봉자들이 되고, 이들의 영향력으로 민간까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북경에 가서 정식으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어 한국 최초의 정식 가톨릭 신자가 되어 돌아오기까지 하였다.
가톨릭이 급진적으로 퍼져나가자 그 당시 유교를 국가의 종교·정치적 통치이념으로 받들고 있던 조선 조정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더 깊은 정치적 이유들이 있겠지만,3) 아무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임금이나 조국을 몰라보는 가톨릭 같은 ‘이단사설(異端邪說)’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신유(1801), 을해(1815), 정해(1827), 기해(1839) 등 일련의 박해의 물결들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서양인 성직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1866년에서 1871년까지 5년에 걸쳐서 있던 대 박해 한 번에 그 당시 한국에 있던 가톨릭 신자들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8,000명이 순교를 당했다.
이런 그리스도교 박해는 1884년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의 체결과 함께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이때쯤 해서 개신교 선교사들도 한국으로 들어와 선교활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 의사가 1884년 최초로 한국에 들어오고, 다음해에는 같은 교단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미국 감리교단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입국했다.
이들은 그전 중국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가 서상륜 등 한인 협조자들과 함께 번역한 쪽복음서를 통해 이미 황해도 소래 등에 생긴 개신교 공동체를 기반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속속 들어온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 이외에도 교육, 의료, 구제 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극히 일부지만 한국인의 항일투쟁이나 독립 운동에 협조하기도 했다.
그 이후 한국 개신교는 신앙 대부흥 운동기, 일제(日帝) 시대의 수난기 등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선교사상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선교에 성공하는 가히 ‘현대 선교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4) 현재 서울에 있는 여러 개의 ‘세계 최대의’ 교회를 포함해서 개신교 교회만 한국에 삼만 개가 넘고 있다. 가톨릭도 1984년 교황이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가톨릭 신도 100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추대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은 그 성인 수에 있어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가톨릭 국가가 된 셈이다. 최근에 와서 신도수의 증가가 멈추거나 감소추세로 도는 현상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슨이 지적한 것처럼, “20세기 마지막 1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현대 한국역사의 주도적인 종교적 사건이 되었다.”5)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가 오로지 사회를 위해 좋은 일만 한 것은 아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특히 70~80년대에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교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수반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을 복을 받는 수단으로 여기는 기복 신앙과 이웃 종교나 심지어 그리스도교 내의 다른 교파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6)
에큐메니칼 운동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갈라져 나오고, 또 그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다시 여러 교파로 지리멸렬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교회 일치 운동의 필요를 절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치라고 해서 물론 물리적으로 여러 교회를 하나로 만들자는 것이라기보다,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가 말하듯,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아 세상에 더욱 효과적으로 선교하고 봉사하자는 의도였다. 이렇게 선교와 봉사를 위해 교회가 뭉칠 것을 강조하는 움직임을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 한다. 19세기부터 이런 움직임이 태동되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10년 선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세계 선교 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열리고, 1914년 콘스턴스에서 국제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세계 기구가 결성되었다. 이 기구가 결성된 8월 2일 바로 그날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으로 인해 이들 기구의 활발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끌고 있는 단체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결성된 세계교회협의회(WCC,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이다. 첫 대회에 44개국에서 107개 교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모였다. 협의회에서는 그 당시 국제 냉전 상황을 감안하여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양쪽을 모두 배격한다고 결의했다. 자본주의를 배격한다고 한 말 때문에 일부 과격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 의해 ‘용공 단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매 7년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2005년 제9차 대회까지 열렸다.7) 그동안 극도의 근본주의 교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입하여, 현재 110개 국가로부터 약 349개 교파가 참가하고 있다. 동방정교회도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가톨릭도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한다.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당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이 단체의 정신이나 활동에 찬동하지 않고, 특히 WCC의 ‘용공 색채’ 때문에 가입하기를 거부하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결성되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0세기 그리스도교에서 생긴 사건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 변화된 세계에 걸맞는 교회로 발돋움하고, 종교 간의 일치를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62년 당시 로마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이 공의회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 나아가 세계 종교사에서 괄목할 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1963년 6월 교황 요한 23세의 죽음으로 교황 바오로 6세가 뒤를 이어 1965년에 마무리 지은 이 공의회에서 채택한 중요 결의안으로서는 예전을 집전할 때 가능한 한 라틴어 대신 그 나라의 말로 하기로 한다든가, 평신도의 참여를 더욱 강화하기로 한다든가, 특별한 경우 가톨릭 신도가 비가톨릭 신도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허용한다든가, 가톨릭교회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든가 하는 것이 있었다.
중요한 선언 중 하나인 ‘비그리스도 종교들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에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여러 인종들 중에 자연의 흐름이나 인간사에 상존하는 그 신비스러운 힘을 감지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서 힌두교, 불교, 이슬람, 유대교에 대해 ‘좋은 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특히 유대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백성들이라 하던 일반적 주장에 대해 그 당시 유대 권력과 그 지도자를 맹종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을 뿐 유대인 전체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한 두 명의 신학자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한스 큉(Hans K?g)이었는데, 큉은 교황 무오설, 동정녀 탄생 등을 인정하지 않아 ‘가톨릭 신학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가톨릭교회가 교황 요한 23세 이후 다시 보수화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스 큉의 열린 신학사상은 여전히 가톨릭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본 필자도 사상적으로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
지금까지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사에서 일어나 몇 개의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새로운 신학적 흐름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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