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5. 초대 교회 형성과 발전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09:35

 

 

지금까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그리스도교 신약성경에 나오는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을 좀 다르게 보고 해석하는 몇 가지 다른 시각들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촉발된 일종의 그리스도교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발전했던가, 그런 과정에 등장한 바울이 어떤 역할을 했고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 하는 등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루살렘 교회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과 그들의 행적은 신약성서 사복음서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이라는 책에 나와 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유월절 때인데, 이 책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유월절 이후 50일 만에 지키는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때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루살렘으로 와 어느 가정집에 함께 모였다.

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오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하면서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에 배운 일이 없는 여러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이라 각국에 퍼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대거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인데, 그들이 이 이상스러운 경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몰려왔다. 이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모두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른바 ‘방언’(speaking in tongues) 현상이 생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생각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 대낮인데 무슨 술이냐,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이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겠다고 예언한대로(??요엘서?? 2:28이하)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소개한 다음 예수님이 바로 모든 유대인의 ‘주와 그리스도’(??사도행전?? 2:36)이심을 설파했다. 이 일로 하루에 3천명이 침례를 받고 제자들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처분하고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 유무상통하는 원시 신앙 공동체가 성립된 셈이다.

제자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등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면서 그 공동체 구성원의 수는 더욱 커져갔다.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다. 이때의 지도자로 단연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 그를 믿게 된 사람이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물론 자기들이 여전히 유대교의 한 분파라 여길 뿐, 자기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다는 자각이나 의지 같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태생적으로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의 성경을 그대로 자기들의 성경으로 삼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의 율법과 규례를 잘 지켰다. 다른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성경에 예언되고 유대인들이 바라던 그 ‘그리스도(메시야)’라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믿음이 아직도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던 정통적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유대인들의 반대와 박해도 더욱 커져갔다. 스데반 같은 이는 거리로 나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사도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나아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이때 그리스도인 박해에 앞장 선 사람 중 지금의 터키 남단에 해당되는 다소(Tarsus) 출신의 유대인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소에서 지낼 때 그 당시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에 널리 퍼져 있던 밀의종교(mystery religions)와 접하고, ‘죽고 부활하는 신과 합일함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밀의 종교의 가르침에 익숙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당시 유명한 유대인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으므로, 유대 전통에도 정통한 바리세파 지식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첫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칠 때 그들의 옷을 맡는 일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예수쟁이 박멸운동에 진력하다가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멀리 다메섹(Damascus)에 있는 예수쟁이들까지도 진멸하겠다고 정열을 불태웠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쏟아져 내려 그를 비추자 그는 땅바닥에 엎어졌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도행전?? 9:4, 22:7, 26:14)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이 누구냐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이 왔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타난 것이라 확신했다. 다메섹으로 인도되어 가서 3일간 앞을 보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 후 거기서 아나니아라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안수를 받아 눈도 고치고 세례도 받았다. 이 엄청난 경험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옛 사울은 죽고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하는 새 사람 ‘바울’(Paul)이 탄생한 셈이었다. 그는 당장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거친 바울은 생각을 정리하고 더욱 내실을 갖추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얼마를 지냈다. 그 후 그는 실로 위대한 그리스도교 전도자로 등장했다.

바울이 처음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자처하고 이방인들 곧 비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는 등 우선 유대인의 규범을 준수하여 유대인이 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중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직접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앞장섰다. 이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대교의 분파로 여겨질 수가 없게 되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당시로서는 ‘세상 끝’이었던 지중해 연안 전역을 세 번이나 전도 여행으로 다녔다. ??사도행전??의 거의 반 정도가 그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 후 교회마다에 일일이 문안과 교훈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이 나중 신약 성경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것들은 신약 성경에 들어있는 문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이어진 것으로서 전통적인 계산으로 하면 신약 전체 27권 중 14권으로 권수로만 따지면 신약 성경 반 이상에 해당한다. 배가 난파되는 일, 감옥에 갇히는 일, 매 맞는 일, 심지어 돌 맞는 일, 굶고 잠 못 자고 추위에 떠는 일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고린도전서 11:23-28) 감행한 바울의 열성적인 전도와 그의 깊은 신학 사상으로 그리스도교는 명실공이 유대교의 분파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엿한 보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예수냐 바울이냐’ 하는 질문까지 한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났다가 유대인으로 죽었다. 그는 생전에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 퍼져나간 독립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창시자라 할 수도 있지만, 물론 예수님이 없이 그리스도교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온다고 하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많은 이들은 실제로 바울을 ‘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라 칭하기도 한다.

바울의 가르침 중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稱義), 종말관, 인간관 등 다양하여 한마디로 간추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 신비주의(in-Christ mysticism)’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나는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던 할례를 두고서도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하였다(??갈라디아서?? 6:15). 이런 새로 지음의 체험, 새로운 의식에 이를 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갈라디아서?? 2:20).
바울은 이런 신인합일의 종교적 체험을 갖게 된다고 하여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르는 것을 중요시하고, 특히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1-2)고 하였다.

바울은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등,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리디아서?? 3:28)고 하였다. 성서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과 조나단 리드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서 배워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1)하는 말이나,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코 있어야만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4:34)하는 말 등 성경에 바울이 했다고 기록된 여성 차별 내지 여성 비하적인 발언은 가짜 바울(pseudo-Pauline), 후세 바울(post-Pauline), 반 바울(anti-Pauline)적 무리들이 ‘실제적이고 역사적 바울(actual and historical Paul)’을 변개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 나중 삽입하거나 첨가하거나 대치한 것이라 본다.

신약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바울이 유대인 예수의 실천적이고 단순한 가르침을 너무 그리스화, 신학화, 추상화해서 도리어 예수의 복음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또 사해 두루마리를 연구한 사람들 중에는 사해 두루마리에 포함된 ??하박국서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와 너무나 비슷해, 이 두 이야기들은 결국 동일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는데, ??하박국서 주석??에서 그 인물을 ‘의의 교사’를 배신한 ‘거짓말쟁이’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바울은 의의 교사였던 야고보를 배반한 거짓말쟁이, 심지어 ‘로마의 첩자’였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약 30년간 자기 나름대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던 바울은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인 기원후 60년경 로마로 갔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 이 후 어떻게 되었다는 언급이 없지만, 전통적으로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인 64년경 체포되었다가 65년경 거기서 처형되었으리라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 형식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행해지던 예배 형식을 본 따서 예배를 드렸다. 기도와 성경 읽기와 설교, 그리고 찬송이 예배의 중요 요소였다. 그 외에 그리스도교 예배 형식에서 중요한 요소로 첨가된 것은 침례와 성찬식이었다. 유대교 바리세파들이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입교시킬 때 일종의 입교식 형식으로 침례를 주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도 이를 따라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이를 중요한 의식으로 고정시켰다. 본래 침례는 몸 전체를 물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면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큰물을 찾아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물을 머리에다 붓거나 뿌리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침례 혹은 세례가 처음에는 입교식이나 입문식의 절차로서 어른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예식이 인간이 지닌 원죄를 씻는 예식이라 이해되고, 이에 따라 아이들에게도 침례를 주게 되었다. 특히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아이가 출생하자 말자 침례를 받도록 하여 혹시 어려서 죽더라도 원죄를 벗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 형식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본래 ‘애찬(愛餐, agape)’ 혹은 ‘감사드림(Eucharist)’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저녁에 모여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교의 유월절 밤 축제 만찬을 비롯하여 중동 지방 여러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종교 예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이 예수님이 죽기 전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나눈 식사를 재현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행사가 비교적 성대한 식사였다.

그러다가 교인수가 많아지면서 정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대신 이런 식사의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간소화했다.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스스로 성결해진다고 믿었다. 또 밤에 하는 대신 낮 예배 마지막 부분에서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었다.

이런 예식을 지금은 성체성사(聖體聖事), 미사(Mass), 성찬식(聖餐式), 성만찬(聖晩餐),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등으로 부른다. 현재 가톨릭에서는 미사에서 교인들이 앞으로 나와 집전하는 신부로부터 떡을 받아먹고 포도주는 교인들을 대신해 신부님이 혼자 마시는 예식을 행하고, 개신교에서는 성찬식 때 교인들이 앉은 자리에서 집사들로부터 조그만 빵 조각을 받아먹고 작은 포도주 잔을 받아 마시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조직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뚜렷한 조직이 없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야고보 같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곧 재림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별히 잘 정비된 조직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재림이 곧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또 교인들의 수도 점점 늘면서 좀 더 분명한 조직 체계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시몬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었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향해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태복음?? 16: 18)라고 한 말씀에 따라 베드로가 그 이름의 뜻 그대로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가 로마로 가서 기원후 65년경 처형되기 전 로마 교회의 주교로 섬겼다는 전설에 따라 베드로가 로마 교회 최초의 수장이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보면 몇 가지 직책이 나오는데, 주요 직책으로 감독 혹은 주교, 집사, 장로 등이었다. ‘감독’ 혹은 ‘주교’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피스코포스(episkopos)’는 ‘목자’라는 뜻이고, ‘집사’는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섬기는 자’라는 뜻이며, ‘장로’는 ‘프레스비테로이(presbyteroi)’로 ‘늙은이들’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 전도자, 선지자, 사도, 교사 등의 직책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런 직책들이 그 당시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지도자들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주로 유대 회당(시나고그)에서 거행되었지만, 정통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을 배척하게 되자 가정집 등에서 모여 드렸다. 이렇게 하면서 독립된 그리스도인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배일도 전통적인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서 그 당시 태양숭배의 날이었던 일요일로 바꾸고, 이 날을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삼았다. 헌금을 모으기는 했지만 설교자의 급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듯이 주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살았다.



초기 이단들


초대 교회는 이처럼 조직적으로도 느슨했을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지도 이념이 없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났는데, 대부분은 서로 공존 가능한 의견으로 수용될 수 있었지만, 그 중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여겨진 생각들도 많았다. 이런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지주의

주로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의 사상에서 나왔지만 그 이외에도 밀의종교(密意宗敎, mystery religions) 같은 여러 영적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성립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매우 복잡한 사상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
영지’(gnosis), 혹은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신의 영원한 불꽃’이 있는데, 악한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이 세상에 사느라 인간은 그것을 모fms 채 미망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신으로부터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구원자가 와서 우리에게 그 영지 곧 영적 깨달음을 주면 우리 속에 있는 그 불꽃은 그 근원인 하느님과 다시 결합하게 되고, 이것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영지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깨달음을 전해주는 영지의 구원자라 여겼다.

영지주의자들은 영과 육의 이원론을 주장하여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온 구원자 예수님은 순수한 영일 뿐, 육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고 믿었다. 결국 사람들이 본 예수는 육과 전혀 관계없는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하는데,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로부터 이단이라 맹공을 받았다.

최근까지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는 주로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이 남겨놓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1945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고 하는 곳 땅 밑에서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들이 박해 때문에 사라지기 전 땅에 묻어둔 문헌들이 대량 발견되므로 영지주의자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더욱 확실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파피루스지에 고대 이집트 말의 일종인 콥틱어로 기록된 그 문헌들 중에는 ??도마 복음??, ??빌립 복음??, ??막달라 마리아 복음?? 등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복음서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도마복음서??는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학자들 중에는 영지주의에서 강조하는 극단적인 영육 이원론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이들이
‘믿음’보다는 영지(gnosis) 곧 ‘깨달음’을 중요시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배워야 할 점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또 그리스도교에서 영지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면 현재 불교와 훨씬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두 종교 간의 대화도 훨씬 순조로워졌을 것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필자 스스로도 지난 제4회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 이런 ‘깨달음’ 중심주의적 차원이 다시 회복되어 성서의 깊은 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2) 마르시온 주의

바울이 죽은 후 백년 쯤 지나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율법과 은혜를 대비한 바울의 가르침을 구약과 신약을 대비하는데 적용했다. 구약의 신은 율법과 징벌의 신이고 신약의 신은 사랑과 자비의 신이라고 했다. 예수가 가르친 신은 사랑의 신이므로 율법과 징벌의 신을 강조하는 구약은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였는데, 이런 마태복음도 버리고, 바울의 서신 중 10개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만 가지고 그리스도교 경전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르시온은 144년 출교를 당하고, 그의 주장은 5세기경에 자연히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의 주장 때문에 오히려 구약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구약이 그리스도교 경전에 더욱 확실하게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 것이다.


로마 교회와 핍박


예루살렘 교회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없어진 다음 로마 제국 내의 큰 도시들인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로마 등의 교회들이 중요한 교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정치적·문화적·종교적 이유로 결국 로마에 있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교회로 인정받으면서, 로마 교회의 주교(bishop)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드디어는 교황(pope)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여러 곳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그만큼 박해도 커져갔다. 박해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그 당시 여러 신들을 위시하여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절하는 ‘무신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종교적인 이유에서이기보다 로마제국의 권위에 대적하는 정치적 반역과 불충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지하 무덤(카타콤) 같은 데서 성찬식에 쓸 것을 넣은 바구니를 가지고 모여 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눈다고 하니 바구니에 담아온 아이를 먹는 식인종들이 아닌가, 밤중이나 새벽에 비밀 장소에서 남녀가 한데 모여 ‘애찬’이니 하는 것을 보면 성적으로 문란한 짓을 하는 폐륜아들이 아닌가, 세금이나 병역 의무도 기피하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야기나 하니 ‘제국 속에 제국’을 건설하려고 혁명을 꾸미는 불순분자들이 아닌가 하는 등의 의심을 받았다.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 때의 박해를 비롯하여 대규모 박해만 해도 95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 때의 박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의 박해 등 박해의 물결이 휩쓸었다. 박해는 주로 사자 굴에 던져 사자의 밥이 되게 하거나 화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수는 커져만 갔다.

드디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제위 306-337) 황제가 등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어머니와 부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로마 교외에서 있을 아주 중요한 전투를 앞둔 전날 밤 꿈에 ‘이 표시를 가지고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말을 보았다. 그의 군사들은 ‘그리스도’라는 낱말의 처음 두 글자 ‘Χρ’를 그려 넣은 방패를 들고 나가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13년 밀란 칙령을 공표하고 그리스도교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신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자신은 죽기 직전에서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몇몇 황제들이 전통적인 로마 종교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황제 때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언되었다.


니캐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나서 보니 그리스도교 분파들 중에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데 대해 상충하는 이론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을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황제에게 교회 내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이론들이 있어 싸운다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기원후 325년 그는 약 300명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지금의 터키에 있던 니캐아에 모이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이를 니케아 공의회(Nicaea Council of the Church)라고 한다. 마치 기원전 390년경 불교 승단에서 전통적인 규율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새로운 환경에서 이를 바꿀 것인가를 놓고 700명의 스님들이 모여 토론한 불교의 제2차 결집을 연상케 한다. 물론 토론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니케아에서도 사제와 평신도들을 위해 20가지 규율을 정하는 등의 토의도 있었지만 주된 의제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기독론(Christology)’의 문제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크게 두 파로 나누어져서 대결을 벌였다. 한 쪽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리우스(Arius)가 이끄는 파로서 예수가 피조된 존재로서 진정으로 인간도 아니고 진정으로 신도 아닌 그 중간 제3의 존재라고 보았다. 이 파의 생각이 득세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비서로 있던 젊은 신학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나타나 예수는 독생자로 ‘태어났지 피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동일한 존재’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homo-ousia’라고 하는데, 이 ‘호모우시아’ 이론이 결국 승리를 했다.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신조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381년 교회의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니케아 신조’(the Creed of Nicaea)로 공표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예수에 대한 교리를 확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는데, 451년 소아시아 칼케돈(Chalcedon) 공의회에서 예수는 ‘진정으로 신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인간’(vero deus ver homo)라는 이른바 양성론(兩性論)을 포함한 공식 교리를 다시 확정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있다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파면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추종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공의회의 결의에 불복하고 별도의 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심해진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퍼져 나갔다. 페르시아 왕들의 후원으로 크게 융성하였고, 인도로 가서는 ‘말라바르(Malabar)’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781년 서안(西安)에 비석을 세우는 등 8세기 당나라에 흥왕하던 경교(景敎)가 바로 그 파였다. 이 파가 한국의 삼국 시대 신라에도 들어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 중동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몽고가 중국을 다스리면서, 이 파도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인도 남쪽과 이란 북서쪽에 이 파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껏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뚫고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한 가지 모습, 한 가지 교리로 시작한 단일 체계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를 비롯하여 주위에 있던 여러 종교 전통이라는 종교적 토양이나 환경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면서 태어나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자랐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교회가 한 가지 외형적(exoteric) 교리만을 정통으로 삼고 다른 비의적(秘意的, esoteric) 흐름들을 억누른 결과 그 후 천6백년동안 그리스도교는 그 심오한 ‘신비적 차원’을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억누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21세기 탈근대적 세계에서 다원주의적 태도가 크게 대두되면서 그리스도교도 등한시하거나 배격했던 깊은 차원의 가르침을 회복하므로 스스로의 종교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 불교나 기타 이웃 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도 더욱 원만하고 활발해지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