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3. 그리스도교 발생의 역사적 배경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09:33

그리스도교는 1세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에서 일종의 ‘예수 운동’으로 생겨난 종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발생을 이야기하려면 그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ㆍ문화적 사정과 유대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제국은 유대뿐만 아니라 지금의 유럽과 중동 대부분, 심지어 북아프리카까지를 지배하던 거대한 정치권력이었다. 로마제국 치하에 있던 이 시기는 비록 유대인의 반란처럼 여기저기에서 소수 민족의 반란이나 폭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무자비한 철권으로 억누른 결과 적어도 외형적으로나마 통일천하 내지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의 시기였다.

한편 로마제국 이전에 알렉산더 대왕은 광대한 땅을 정복하고 정복지에 그리스의 말과 철학 사상을 전파하여 일종의 거대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여 놓았다. 상당 부분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땅을 이어받은 로마제국은 새로 등장한 단일 정치권력이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단일 문화권을 형성한 세력이기도 했다. 이런 정치 및 문화적 배경은 그리스도교 발생과 초기 역사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무엇보다 각 민족들은 자기 고유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외에도 그 당시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라는 일종의 국제어를 통해 서로 다른 민족과도 비교적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로마제국의 통일 권력 밑에서 민족 간에 교류가 자유스러워짐으로 서로 다른 종교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 간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 사이에서는 이집트의 오시리스(Osiris), 그리스의 디오니수스(Dionysus), 페르시아의 미드라스(Mithras)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이른바 ‘밀의종교(密儀宗敎, mystery religions)’가 크게 유행했다. 이 종교들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어느 형태이든 영생을 위한 수단이라 생각하며 침례식이나 성찬식 같은 비밀 의식을 행하였다. 이런 종교들은 인종이나 계급, 성별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신자들로 받아들이는 평등주의 성향을 띄우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도교도 이런 밀의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생성 발전했다.

한편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출현해서 로마제국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되리라는 이른바 ‘메시야 대망’의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런 믿음을 가장 열렬하게 실천에 옮긴이들이 바로 사해 서북쪽에 있던 쿰란(Qumran) 공동체의 에세네(Essene)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독신 생활, 금욕주의, 채식, 고립주의 등을 실천하며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보관했던 문서들이 1947년에 사해 서북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사해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과 환경에서 예수님이 등장했고, 일단의 무리들이 그를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 받아들였다.1) 이 무리들이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되었고 이들의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복음서를 기초로 예수님 알아보기

최근까지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4복음서(福音書)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학자들이 문헌학,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해석학 등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역사적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므로 복음서 기록에만 의존해서 생각하던 종래까지의 예수님 상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 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새롭게 등장한 예수님에 관한 이론들을 소개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를 기초로 하여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런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부터 명심해야 할 사항은 지금 『성경』에 포함된 사복음서가 결코 예수님의 삶이나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전기(傳記)나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증언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서’ 내지 자기들의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신앙 해설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기 위한 ‘믿음의 책, 믿음에 의한 책, 믿음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상은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유화를 그리듯 계속 덧칠해서 이루어진 일종의 초상화인 셈이다. 복음서가 이렇게 역사적 자료서는 불충분하지만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고백했던가 하는 것의 일단을 보여주는 자료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기초로 그의 삶의 큰 줄거리를 짚어보기로 한다.


창시자 예수

‘창시자 예수’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니 ‘그리스도인’이니 하는 말도 모르고 어디까지나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은 셈이다.2)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종교라 할 수 있고 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없었다는 뜻에서 그를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1) 출생과 성장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왕 때에’ 태어난 것으로 되었는데, 그렇다면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 이전이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앞부분(2:1-4)에 보면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호구조사를 하라는 명을 받고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고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구레뇨가 총독으로 있은 때가 기원후 6년에서 9년이 된다. 이렇게 엇갈리는 연대 중에 보통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라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기원전 4년경으로 보고 있다.

사복음서 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복음서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약혼만 한 처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임신을 했다는 것과 그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약혼자는 목수 요셉이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별을 보고 ‘동방 박사’들이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아기를 경배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박사들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들이었다.3)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 당시 왕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이집트로 간 세 식구는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서 살다가4) 헤롯이 죽고 갈리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게 되었다.

누가복음』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던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기별을 받고 아기를 찾아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경배했다.5) 태어난 아기는 규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식을 치루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가 오는 것을 보고 받아 안고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하는 말을 했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아기에게 와서 한 말을 연상하게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사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잠깐 언급된 것 이외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다가 부모가 집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토라』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2:47)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그를 찾으러 되돌아 온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했다.(2:49)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2:52)


2) 침례와 시험

세계 종교사적으로 그렇게도 중요한 그 ‘30세’가 되어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는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요단강 강물에 잠기는 ‘침례’였다.6) 예수님도 물에 잠겼다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린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침례를 받은 후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40일이 지난 후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 시험이 세 가지였다고 하는데, 둘째와 셋째 시험의 순서가 각각 다르다. 『마태복음』의 순서대로 하면 첫째 시험은 사탄이 와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하는 성경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물리쳤다. 둘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 시험도 이겼다. 셋째는 사탄이 예수님을 산꼭대기로 데리고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다.

이 시험을 요즘 말로 고치면, 순서에 따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 성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참된 종교의 목적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같은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막강한 영광과 권위로 세상을 휘어잡고 세상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침례와 시험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궁극 실재와의 새로운 관계에서 가능한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다 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이야기다. 이런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완전히 ‘비보통적인’ 것으로 바뀌는 체험이다. 이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말씀(로고스)’ 곧 우주와 삶의 참다운 ‘뜻’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깨치신 분’ 곧 ‘성불하신 분’이라 볼 수는 없을까? 예수님 뿐 아니라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붓다를 위시하여 무함마드나 최제우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특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식과 확신으로 거듭 나게 되고, 이런 일이 가능한 후에 그 체험을 행동으로 옮겨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침

예수님은 침례와 시험을 받은 후 갈릴리로 돌아가 외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장 처음 외친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초 기별이자, 중간 기별이며, 또한 끝의 기별이었다.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된 기별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기별이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기별의 참된 뜻이 뭔가 하는데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이 기별의 뜻을 캐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종말관’(Jesus’ eschatology)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였다.

이런 학자들의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슈바이쳐의 ‘철저적 종말관’ -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의 당대에 세상 끝이 이를 것으로 믿고 거기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면서 ‘이스라엘 동리를 다 돌기 전에’ 세상이 끝나리라고 했다. 예를 들어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는 등의 가르침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으니 그런 일로 따지고 다툴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윤리는 세상 끝이 오기 전에 일시적으로 잠깐 적용되리라고 생각된 ‘중간윤리’(interim ethics)였다는 이론이다.

2) 다드의 ‘실현된 종말관’ - 영국 신약학자 다드(C. H. Dodd, 1884~ 1973)는 예수님이 미래에 올 별도의 종말을 기다리지 않고, 그가 실행하는 활동이 바로 천국의 건설을 위한 것이므로, 신천국은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22:28)고 한 말이나 그 비슷한 발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선언은 “천국이 이르렀느니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쿨만의 ‘구속사적 종말관’ - 스위스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은 예수님이 그의 활동으로 천국이 ‘이미’(already) 시작되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스스로 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 풀이했다.

4)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관’ -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예수님이 임박한 종말을 가르친 것은 일상적 시간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시각이 임했음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라 해석했다.

5) 보그의 ‘비종말관’ -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를 비롯하여 최근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종말론적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천국이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말을 기다린 그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 스스로는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견해다.

6) 필자의 ‘환기적 종말관’ - 필자는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했을 때 ‘회개’가 핵심이라고 본다. 이것은 ‘회개’라는 원문 ‘메타노이아’가 의미하듯 우리 내면의 ‘완전한 의식의 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은 이런 의식 개혁을 촉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천국의 임박한 도래를 환기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천국이 가까워 왔으니 의식 개변의 체험을 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체험한 의식의 변화를 다른 사람에게서도 보기를 원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7) 기타 - 이 외에도 예수님이 말한 ‘천국’이란 결국 상징적인 것이라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 자아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라 볼 수 있다는 입장 등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며 3년 정도를 보냈다.7) 그는 자기의 말을 받아들이는 열 두 제자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특히 어부들이 많았다. 열 둘이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라 할 수 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 등 열 두 남성 제자들 이외에도 그 유명한 막달라 마리아 등 그를 따르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건설을 위해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하라고 가르쳤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고8)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이 돌보시리라고 하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공중의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처럼 특별히 스스로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이보다 훨씬 귀한 너희 인간들일까 보냐 하는 생각이었다.(마6:25-34)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철두철미한 신뢰에서 오는 느긋함 아닌가.9) 노자(老子)를 연상하게 하는 말씀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르칠 때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든가 나병환자나 눈먼 자, 혈루병 앓는 여인 등 병든 사람들을 고친다든가 귀신을 쫓아낸다든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든가 물 위를 걸어 다닌다든가 광풍을 잔잔하게 한다든가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5천명을10) 먹인다든가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복음서에서는 이런 것들이 새로 임할 ‘왕국의 징조’(표적과 기사, signs)라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로서 가히 ‘파격적’(subversive)이었다. 그는 유대교를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로 변질시킨 종교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든가 ‘독사의 자식’이라는 등의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마15:1-20, 23:27-33 등) 나아가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히브리 성서 『레위기』(19:2)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모두 거룩해야 한다는 ‘정결제도’(purity system)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거기 매여 있을 때,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6:36)고 하는 ‘자비’의 가르침을 그의 중심 가르침으로 삼았다.

그는 병든 사람, 죽은 사람, 피 흘리는 사람, 불의한 사람, 천한 사람 등은 불결한 사람, 부정 타는 사람들로 취급되어 기피 대상이었던 그 당시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나병 환자, 죽은 사람, 혈루병 앓던 여인 등 누구라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적 위치, 인종, 종교에 따라 누가 의롭냐 거룩하느냐 깨끗하느냐 바르냐 하는 것이 사람을 대할 때 따져보는 표준이었던 세상에서 그는 이런 차별과 장벽을 허물고, 오로지 누가 고통을 당하느냐 하는 것 하나를 표준으로 삼고 고통당하는 사람과 스스로 고통을 함께 하는 ‘자비’를 실천하고 가르쳤다. ‘자비’에 해당되는 영어 ‘compassion’이 어원적으로 ‘아픔을 함께 한다’는 의미라면, 예수님은 실로 이런 ‘자비’의 스승이었다. 그의 ‘밥상 교제’(table fellowship)에는 창녀나 세리 등 그 당시 부정 탄다고 천시되고 기피되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예수님에게는 제도나 규례 같은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이었다. 제도나 규례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막2:27)고 한 그의 말에서 이런 태도가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도 이처럼 정결하느냐 거룩하느냐 제도나 규례를 성실히 따랐느냐 하는 따위 외부적인 표준과 상관이 없이 ‘사람들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등(마25:35-36) 얼마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잘 섬겼느냐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자기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김의 자세, 그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실증했다.

이런 사랑과 자비와 동정의 가르침은 물론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고 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 ‘신 의식(God-consciousness)’으로 변화된 사람,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결국 윤리적인 단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차원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항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아바’는 ‘아버지’보다 더욱 친근한 말로서 그가 하느님과 관계를 어떻게 파악했던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가르치면서 ‘비유’(譬喩, parables)를 많이 사용했다. 비유는 가르침의 핵심을 짧은 이야기로 표현하는 방법으로써,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핵심을 스스로 더욱 깊이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11) 그가 말한 비유 중 많이 알려진 것으로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어느 부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 허랑방탕(虛浪放蕩)하며 돈을 다 쓰고 돼지 밥으로 배를 채우다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니 아버지가 뛰어 나와 옷을 입히고 자기 반지를 빼서 그에게 끼워주는 등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를 받아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메시야 고백과 고난의 길

시간이 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일기 시작했다. 가끔씩 사람들을 피하여 산이나 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가이사라 빌립보라고 하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이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하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고 다시 물었다.

성질이 급한 베드로가 제일 먼저 “주는 그리스도[메시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했다. 예수님이 자기의 메시야임을 스스로 인지하였을까 하는 문제는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점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그러나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권세와 영광으로 나타날 메시야가 어떻게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최대의 욕을 하였다.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그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 대신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를 잊어버림이요, ‘사람의 일’이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예수님이 스스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 한 것은 자기를 완전히 잊고 오로지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자기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바로 이 말에 이어서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16:24-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self-denial)이요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의 썩어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는 뜻이다. 작은 자아(self)를 구하면 큰 자아(Self)는 잃어버리고, 작은 자아를 버리면 큰 자아를 찾을 것이라는 종교적 역설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큰 자아를 위해 작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 독일 신학자 본훼퍼가 말하는 ‘제자 됨의 값’(cost of discipleship)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변형이 되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다시 하늘에서 소리가 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라”(마17:5)는 소리가 났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나중에 ‘변화 산’이라고 부른다. 영적으로 어느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모세나 붓다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이렇게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부처님 상에 빛이 퍼지는 모양이나 불꽃이 그러진 것도 이런 사실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죽음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위해 가는 길이지만, 제자들은 “누가 크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날 누가 재무장관이 되고 누가 외무장관이 되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격론을 벌인 셈이다. 노자님이나 공자님이 다른 이들의 자기들의 심원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그 실존적 고독을 예수님도 똑 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 때는 유월절 절기였는데, 예루살렘은 디아스포라(diaspora)12)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분주했다. 모두 ‘이 절기에 메시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11:10)하며 환호하였다. 이른바 예루살렘 입성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11:15) 제사장 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저녁에는 거기서 가까운 베다니라는 마을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라는 삼남매의 집에서 유하였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어느 집 다락방에서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면서 그의 살과 피니 받으라고 하면서 이것으로 그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 혹은 ‘성찬’을 하는 이유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가 ‘본질에서’(in substance) 정말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을 믿고,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희생과 현존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만찬이 끝나고 모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이르고, 거기서 ‘돌 던질 만큼’ 거리에 가서 홀로 기도했다. 이때의 기도가 그 유명한 기도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마26:39)하는 기도를 드렸다. 제자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잠을 잤다. 얼마 후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은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타나 예수님을 잡아갔다.13)

유대 대제사장 가야바로부터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하는 심문을 받고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마26:63-64) 가야바는 이런 발언을 신성 모독이라 규정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여기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질문을 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이 질문에 대답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14)

복음서의 주장에 의하면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며 오히려 민란을 꾸미다가 잡혀온 바라바를 그 대신 방면하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골고다라고 하는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음을 당했다.

십자가에 위에서 한 ‘일곱 가지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것이다.(막16: 34) 이 말은 시편(22:1)에 나오는 말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내리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한 가지 기억할 일은 앞에서 유대교를 이야기할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복음서가 쓰여질 때 벌써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결국 정치범이었다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정치범의 경우에 한해 십자가형을 내렸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 저항이 잦아 한 시도 그들에 대해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고, 특히 갈릴리는 무력봉기로 로마를 물리치려는 열심당들(Zealots)의 본거지로서 민란이 잦은 곳이라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로마 통치자들은 갈릴리 사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는 등 백성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처형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런 이야기의 흐름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를 쓸 당시 반유대인 정서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한 유대인들의 소행인 것처럼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이런 기술방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미워하고 박해하도록 한 성서적 근거가 되었다.


부활과 승천

복음서에 의하면 금요일 해지기 전에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일단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으로 옮겼다.15) 일요일 아침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를 정식으로 장사하기 위한 준비로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옆으로 비켜져 있고 무덤은 비어있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한 것이다.

사복음서가 부활사건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확신’이 절망 중에 있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한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복음서에는 분명한 언급이 없고,16
)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고 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이다.

이상이 복음서 기록에 기초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의 대략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할 것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이런 예수님 상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있었고 역사를 통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