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6.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09:36

 

 

지난 회에는 초대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바울 등의 공헌에 힘입어 형성되었고, 어떤 이단들이 생겼는가, 어떻게 로마 제국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결국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받았는가, 어떻게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에 관한 교리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이렇게 형성된 교회가 중세를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하고 변천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그리스도교를 보기 전 중세로 들어가는 문턱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기원후 2세기부터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호교론자(apologists)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대표자가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트(150-220),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185-251), 라틴 신학의 대부 터틀리아누스(150-222) 등이다.

그러나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중 가장 뛰어난 사상가는 아무래도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자서전적 《고백록》?(Confessions) 첫 부분에 “오 주님,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저희를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쉼이 없사옵니다.” 하였는데, 그의 삶의 전반은 실로 이 고백을 뒷받침하듯 파란곡절의 삶이었다.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에서 비그리스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어릴 때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감화를 받으면서 자랐다. 크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베르질리우스 등을 읽고 수사학과 웅변을 익혔다. 1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욕에 휩쓸리고, 특히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카르타고로 옮겨 가면서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 및 동양 종교를 혼합한 마니교(Manichaeism)에 심취하게 되었다.

영육 이원론을 주장하며 육을 악으로 보는 이 종교가 그의 종교적 생각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육을 죄악시하는 태도가 그에게는 일종의 짐이 되기도 했다. 그는 너무나 정열적이어서 “저에게 정조와 절제를 허락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아니옵니다.”고 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육욕에 끌려 정열적인 삶을 살다가 아데오다투스(신으로부터 얻음)라는 사생아까지 얻게 되었다. 모두 9년간 그 종교에 몸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와 호소와 직접적인 간섭 때문이었는지 20대 후반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학문과 지성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쾌락의 추구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비참함만 더해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29세에 어머니를 피해 이탈리아로 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다.

그 당시 웅변으로 유명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찾아가 그의 강론을 즐겨 들었는데, 이는 물론 그의 종교적 통찰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웅변가로서의 그의 화술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점점 그의 그리스도교적 기별이 아우구티누스의 머리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성경이 ‘키케로의 근엄함에 비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겼지만 이제 성경도 ‘부조리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우구티누스는 그 때까지 외적인 것만을 위해 살면서 내적인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이 없이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신앙보다는 이성에 의지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그가 어찌 육체의 쾌락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적 씨름의 결정적 고비는 그가 그의 친구 알리피우스의 시골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아우구티누스는 언제나처럼 절망감에 시달리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믿음이 없는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구원과 치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 부르짖고 있었다.

《고백록》?에 의하면 그 때 그는 담 너머에서 자기 친구들과 무슨 게임을 하던 어린 아이가 “들어서 읽으라.”하며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을 하나의 신호라 생각하고 아우구티누스는 자기 친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가 읽고 있던 성경책을 집어 들고 아무 곳이나 펴보았다. 그의 눈이 처음 닿은 곳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정욕이나 방탕함이나 경쟁의 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뜻의 글이 있었다.

아우구티누스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하기로 작정하고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다음,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신부로 안수를 받았다. 396년 힙포 (오늘날 알제리아의 안나바)의 주교가 되고 그가 죽기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그가 한 때 따르던 마니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설들을 열정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 정통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옹호자로 우뚝 섰다.

그는 마지막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세웠다. 그가 쓴 많은 책들 중에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은 역사를 ‘신의 도성(civitas Dei)’과 ‘세상 도성(civitas terra)’의 투쟁사로 보고, 인간은 거기서 훈련을 받게 되므로 역사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 사상사 최초로 ‘역사철학’을 다루는 책이 된 셈이다. 그는 또 세상에는 신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성례전을 수행할 교회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의 성욕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에 인간에게 씌워진 ‘원죄’로서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원죄설을 주장하므로, 성욕을 가진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한 셈이다. 이런 원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미리 예정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예정론도 주장했다. 이런 이론은 그 당시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한 영국 출신 펠라지우스(Pelagius)와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물론 그 이후 가톨릭 신학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계통의 신학자로서 둘 다 신플라톤주의 철학 계통에 속했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예정설은 장 칼뱅에 의해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교회의 분리


그리스도교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 내에는 교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감정적으로 언제나 대립이 있었고 거기 따라 파당이 생겼다. 이들 중 더러는 이단으로 몰려 쫓겨나기도 하고 더러는 저절로 떨어져 나가 새로운 종파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교회의 원 둥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지리적 정치적 교리적 언어적 실천적 이유로 오랫동안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동방에 있는 교회들이 서방 로마 교황의 절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리적으로는 서방교회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부터도’ 나왔다고 하는 ‘휠리오케’(filioque) 교리를 받아들인 반면 동방교회는 이를 반대했다.

언어적으로 동방교회는 그리스어(희랍어)를 쓰는 반면 서방은 라틴어를 썼다. 그 외에도 동방교회는 좀 더 명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이고 정적인 반면에 서방은 실용적이고 율법적이고 적극적인 면이 강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서방교회에서 일으킨 십자군이 이슬람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그들로부터 되찾으러 간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가는 도중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을 때 동방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온갖 행패를 다 부린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는 일로 영영 갈라서게 되었다.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혹은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라고 하고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라 하였다. 동방교회는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본부를 1453년 이슬람교 침공으로 모스코바로 옮겼고, 서방교회는 물론 로마가 본부였다.

동방정교회가 로마교회와 다른 점이 많지만,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들면, 연옥을 인정하지 않고, 성직자에게 일률적으로 독신생활을 의무화하지 않는다. 평면 위에 그려진 상징적 성화는 사용하지만 조각상은 허용하지 않는다.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浸禮)를 준다. 성찬식에 평신도들에게 빵만 주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를 같이 준다. 물론 로마 교황의 특수 권위나 교황 무오설(無誤說)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방교회의 신비주의적 특성


동방교회가 서방교회보다 좀 더 신비주의적이라고 했는데, 동방교회의 이런 경향성을 불러일으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6세기 시리아에 살면서 《신비신학》?의 저자로 알려진 ‘위(僞)디오니시우스’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신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고,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존재나 비존재의 범주에도 속할 수 없는 무엇으로 파악했다.

물론 생명, 지혜, 선함, 능력 같은 아름다운 말을 신에게 돌릴 수 있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신적 깊이와 위대성에 비하면 이런 개념들이 모두 헛것, 빈 것에 불과하고 ‘그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견해나 개념들을 깨끗이 비울 때 비로소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경지, 궁극적으로 신이 되는 것(神化, deification)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비신학》?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랑하는 디모데야, 나의 간절한 기도는 네가 신비적인 명상을 실천하면서 모든 감각과 지각의 작용을, 그리고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모든 것을, 나아가 존재나 비존재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로지 앎을 버림(unknowing)을 통해 모든 존재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분과의 합일을 향해 높이 올라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을 서양에서는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 Apopathic Theology)’이라 한다. 마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 심지어 궁극실재에 대한 우리의 견해나 알음알이를 버려야 반야지에 이를 수 있다는 용수(龍樹)의 ‘공(空, ??nyat?) 사상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방교회에서는 특히 ‘신의 빛’을 보는 체험을 중요시했다. 7세기 고백자 막시무스라는 교부는 우리가 신비적 체험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신의 무한한 빛(無量光)에 압도되어 그 자체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런 체험을 신의 영광을 보는 것이라 설명하고, 우리의 종교적 삶은 궁극적으로 서방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를 본받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받았던 빛의 체험을 우리도 나누어 가지므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동방교회에서 내려오는 전통 중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것은 이른바 ‘예수의 기도’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하거나 좀 더 줄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것을 깨어있을 때든 잘 때든 쉬지 않고 염불하듯 외우는 것이다. 어느 단계를 지나면 기도가 심장 박동에 따라 속에서 저절로 나오게 된다고 한다. 이 기도를 통해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예수가 내 속에, 그리고 만물 안에 임재함을 느끼는 신비 체험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중세 로마 교황권의 강화

기원후 5세기 로마 제국이 망하고 서방 유럽은 여러 봉건 국가들로 지리멸렬 갈라졌다. 이런 와중에 유럽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정 세력은 교회였다. 점점 교회가 세속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해서 8세기부터는 봉건 제왕들이 교황의 재가를 얻어야 왕이 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9세기에는 정식으로 권위의 위계(位階)를 설정해서 세상 위에 교회, 교회 위에 교황이라는 자리매김을 분명히 했다. 독일 황제 헨리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와 맞섰다가 파문을 당한 뒤 한 겨울 알프스를 넘어 교황을 찾아가 눈 속에서 흰 옷을 입고 맨발로 3일간 빈 다음 겨우 파문이 취소되었다는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이야기가 보여주듯, 후대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왕들을 자기 마음대로 옹립하거나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봉건 제왕은 그의 발에 입 맞출 정도로 낮아졌다.

교황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인 교회로부터 출교(excommunication)시켜 천국 가는 기회를 박탈하기도 하고, ‘이단적’인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일종의 교회 재판인 심문(Inquisition)을 통해 화형 등의 방법으로 다스리는 등 교황권의 전횡이 심해졌다.


서방교회 스콜라 신학


교황들이 절대권을 가지면서 권력남용, 매관매직, 부패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중세 유럽은 일종의 통일과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기에 이 시기 대사원의 건축, 수도원의 시작, 스콜라 신학의 흥기, 신비주의의 발달 등 신학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지극히 활발했다. 이 중에서 스콜라 신학, 신비주의, 수도원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2, 13세기에 유럽 전역에 대학들이 생기고 이 대학들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신학이었다. 이 때 활동하며 두각을 들어낸 신학자들을 스콜라 신학자(Scholastics)이라 하는데,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찍이 “신앙은 이성을 필요로 한다(fides quaerit intellectum.)”고 말한 것처럼,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을 종합하고 조화시키려고 애쓴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스콜라 신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였다.

이탈리아인 안셀무스(영어발음으로는 안셈)는 그의 유명한 말,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에서 보이듯이 신앙이 지식의 전제 조건이라 보았다. 신앙이 있어야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또 신의 존재를 이론으로 증명하려 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완전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하는 식으로 논증하려 했는데, 이를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라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를 꼽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드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대학 다닐 때 라틴어 강독으로 그의 책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보고 세상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아퀴나스는 신학적인 모든 물음을 ‘우리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일목요연하면서도 일관된 구조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논증한다.

아퀴나스도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는데, 그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두 가지는 이른바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과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라는 것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세상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 원인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따져가서 최초의 원인(first cause), 혹은 ‘원인되지 않은 원인(uncaused cause)’을 찾는다면 이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 주위에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움직임은 움직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그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는 것이 또 있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 올라가면 자기는 ‘움직여지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Unmoved mover)’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목적론적 증명이란 인간의 눈 같은 것을 보라.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일정한 질서,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이렇다면 이렇게 설계한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18세기 칸트에 의해 ‘순수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을 이렇게 이성의 한계 내에 놓고 증명할 수 없다고 반박된 이후 이런 논증을 절대적인 논증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콜라 신학의 시대적 제약성과 한계는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신학체계의 방대함이나 조직은 여전히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이 너무 이론에만 치우쳤다고 하여 ‘번쇄철학’(煩?哲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퀴나스 자신도 말년에 가서 자기가 신에 대해 가진 직접적인 체험에 비하면 지금껏 자기가 써온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하며 펜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신비주의 사상


앞에서 언급한 동방교회의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이 9세기 경 아일랜드의 신부로서 파리에서 가르치던 스코투스 에리제나(Scotus Erigena)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고, 그 저작은 12세기 이후 서방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13세기와 14세기에는 독일 라인강을 중심으로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독일인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설교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는 실로 중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대의 신비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현대 사상가 마틴 하이덱거나 폴 틸리히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상가이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는 절대자로서의 신성(Deitas, Godhead)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신(Deus, God)을 구별하였다. 말로 표현된 신은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던 말을 하면 그는 그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그가 무엇이라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바의 무엇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는 《도덕경》? 제1장 첫줄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절대적인 신은 우리의 존재 근거(Ungrund)로서 우리의 신비적 직관이나 체험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힌두교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을 두고 ‘네티네티(neither this nor that)’이라 하든 것처럼 에크하르트도 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했다. 절대자는 이해될 수도, 알려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차라리 ‘없음(Nichts, Nothing)’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까지 했다. 절대적 신을 ‘무(無)’나 ‘공(空)’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이후 독일 신비주의 전통의 특성이 되었다. 독일 종교학자 루도르프 오토가 에크하르트를 인도 베단타 학파의 샹카라와 비교하여 Mysticism East and West 라는 책을 냈고, 일본인 다이세쯔 스즈키가 에크하르트의 생각을 선불교사상과 비교하여 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t 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지는 대목인 셈이다.

에크하르트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자로서 크게 주목할 만한 사상가는 독일 추기경 쿠사의 니콜라우스(Nicolas of Cusa, 1401-1464, ‘Cusanus’라 하기도 한다.)이다. 그는 교황청이 에크하르트를 정죄할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힘썼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술은 《박학한 무지에 대하여(De Docta Ignorantia)》?이다. 신은 ‘모든 완성의 정점(the summit of all perfection)’으로서, ‘모든 존재의 절대 존재(the absolute Being of all being)’로서 우리의 지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지만, 반야지와 같은 우리의 예지나 직관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신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모든 아는 체를 던져버리고 ‘일종의 비밀, 신비적 침묵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침묵, 이 ‘무지,’ 이 텅 빔 속에서 신이 우리에게 자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거룩한 무지는 우리들에게 신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므로 도저히 표현 불가함을 가르쳐주었다.” 신은 ‘스스로가 신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만’ 알려진다고도 했다. 실로 《도덕경》? 56장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는 구절을 비롯해 세계 신비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상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니콜라우스가 서양 정신사 내지 세계 정신사에 끼친 또 다른 공헌은 그가 그의 유명한 말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 the harmony of the opposites)’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어쩔 수 없이 ‘역설적(paradoxical)’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면, 무한한 절대자로서의 신은 가장 큰 것보다 더 크고 동시에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을 수밖에 없다.

무한히 크기 때문에 그 밖에 다른 무엇이 따로 있을 수 없고, 그 안에 다른 무엇이 따로 있을 수도 없다. 큼과 작음, 안과 밖 같은 일체의 모순이 신에게 있어서는 모순이 아니라 보완의 관계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 인격적이냐 비인격적이냐 하는 등 일체의 이항 대립적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가 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오로지 ‘이것도 저것도’(both/and)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신은 무한히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 Kempis, 1380-1471)를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다. 그의 책 《예수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는 사람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책이라 할 정도로 영적 힘을 가진 고전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이 책 첫머리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 한다’(요8:12)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깨침을 얻고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 벗어나기 원하면 그의 삶과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가 최우선으로 고려할 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근본적으로 나에게 죽는 무아의 삶, 나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비우는 삶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외에도 마치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다가 미륵보살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서 본 황홀한 보탑(寶塔)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책 《내면의 성(城)》?을 쓴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heresa of Avila), 우리와 신 사이에 있는 ‘무지의 구름’을 사랑의 창으로 뚫어야 한다는 《무지의 구름》?의 이름 모를 저자, 성 테레사와 같은 때 같이 스페인에서 활동하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강조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등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가장 일관되게 강조한 것이 내 안에 내재한 신성(神性)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어느 면에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과 대비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수도회(修道會)의 시작과 발전


기원 3세기말부터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honius, 250년 출생) 같은 사람을 비롯하여, 교회의 영적, 윤리적 퇴락이나 세속화를 보고,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피해, 속세를 떠나 이집트 사막으로 옮겨가 은둔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이라 한다. 예수를 따르려면 우선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마가복음 10:21)고 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무소유의 정신을 가지고 사막의 동굴이나 오두막 같은 데서 거의 혼자 살았다.

금욕주의적 삶을 원칙으로 하고, 명상과 기도, 노동, 성경 낭송 등은 물론 금식, 불면, 오래 서있기 등의 고행을 실천하기도 했다. 4세기 중엽부터 이런 사막의 교부들을 찾아 사막으로 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런 교부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수도회 역사는 처음부터 수도회 공동체 형식으로 시작한 불교의 역사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등장한 수도회가 이집트의 파코미우스(Pachomius, 약290-346)와 소아시아 가이샤라의 바실리우스(Basilius, 329-379)이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최초의 본격적 수도회는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약480-547)가 창설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수도원을 한국 가톨릭에서는 ‘베네딕토’ 혹은 한문 발음으로 ‘분도’ 수도회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노동, 연구, 기도의 삼중 훈련을 중요시했고 이 수도회에서 시작된 규약이 그 이후 다른 수도회의 귀감이 되었다.

중세에 유명한 수도회는 스페인의 성 도미니쿠스(Dominicus, 1170-1221)가 세운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Francisco, 1182-1226)가 세운 프란체스코 수도회라 할 수 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바울을 본받기로 하고 전도에 힘썼다. 마태복음 10:7-14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걸식하는 탁발승으로 살았다. 전도자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문에 열중하였고, 그 결과 중세 유럽에 많은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상류층 사회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토마스 아퀴나스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이 수도회가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교황으로부터 중세 십자군 원정을 위한 격려, 도서 검열, 이단 재판 등을 관장하라는 명을 받아 ‘정통신앙의 파수군’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런 것이 이 수도회의 기본 정신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코는 수도회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비체험을 한 다음, 모든 재산을 버리고 탁발승이 되었다. 그가 받은 계시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쓰러져 가는 교회를 수리하는데 힘썼지만, 나중 그것이 교회에서 사랑과 청빈의 복음을 다시 세우라는 명령이라 깨닫고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청빈과 기도의 생활을 하며 나병환자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짐승이나 새들과도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고도 한다.

죽기 2년 전에는 그의 손발에 예수의 못 자국(stigmata)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하는 말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기도는 바로 그가 지은 것이다. 이 수도회는 주로 일반 서민들에게서 크게 호응을 받았다.

거의 처음부터 수도회는 남자들만을 위한 것과 함께 여자들을 위한 것도 같이 생겨났다. 수녀들은 종교적 삶과 더불어 봉사기관, 학교, 병원 등에서 크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해왔다.


교황권의 쇠퇴와 중세의 종언


교황권은 13세기에 그 절정에 이른 후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황권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각 지역에서 점증하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교황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왕은 교황과 정치적으로 대치하기까지 했고, 이 때 프랑스 성직자들은 교정 분리의 원칙을 내 세워 왕의 편을 들게 되었다. 교황은 자기의 권위가 없어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에 순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선언하노라”는 등 엄격한 경고성 교서를 계속해서 발표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권위는 떨어지고 심지어는 감옥에 갇히는 일까지 생겼다.

이와 함께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들이 소개되어 이른바 문예부흥(Renaissance)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또 십자군들이 가지고 온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 마르코 폴로, 콜럼버스, 마젤란 등 여행가들이 들려주는 생판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 상업의 발달로 외부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새로운 밀려오는 정보 등으로 인해 지금껏 교황이나 성직자들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세계관이나 가치관, 나아가 일반적 관행 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개혁하려고 하는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고, 종교개혁과 함께 중세의 위계를 중시하는 권위주의적 시대는 지나고 개인주의와 평등, 자유를 중시하는 근대로 넘어오게 된다. 다음 회에서는 종교개혁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