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경전 산책

왜 아함을 배워야 하는가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00:25

왜 아함을 배워야 하는가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1.들어가는 말

오늘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왜 아함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불교관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불교는 너무나 방대하고 난해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고 있는 불교 현상만으로는 붓다의 근본 교설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초심자는 무엇이 불교의 핵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불교라는 바다는 너무나 깊고 넓어서 전체를 가름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또 여러 지역에 전해졌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를 분류할 때 시대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합니다. 불교를 시대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붓다시대, 초기불교시대, 부파불교시대, 대승불교시대로 나눌 수 있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면, 인도불교,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각 지역의 불교도 시대적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광대한 불교를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정확히 이해해야만 남에게도 똑바로 전해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습득했다고 자만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은 아직 불교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서 이러한 자만은 금물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끊임없이 정진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 불교의 이해는 아함에서부터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불교대학에서도 교수마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최고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화엄학자(華嚴學者)는 화엄학(華嚴學)이야말로 불교철학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법화행자(法華行者)는 법화경(法華經)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종착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반야경전(般若經典)이야말로 불교 사상의 진수(眞髓)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정토행자(淨土行者)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이야말로 말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이러한 교학(敎學)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전공하는 과목이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이야말로 붓다의 핵심 사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합니다.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말이 참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불교에는 이처럼 다양한 철학과 사상이 있다는 자체가 불교의 특질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올바른 불교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흔들림 없는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올바른 이해는 아함(阿含, Agama)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제일 먼저 제기한 사람은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고(故) 고익진(高翊晉) 박사였습니다. 그는 1970년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였습니다. 또한 이 논문이 우리나라에서의 초기불교 연구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학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방면의 전문 학자 외에는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서적이 번역 출판되면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불교 전문강원에서도 아함경(阿含經)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선우도량(善友道場)에서는 이 시대 새로운 승가 교육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가려뽑은 아함경>을 1992년도에 발행했습니다. 선우도량의 공동 대표인 도법(道法)스님은 이 책의 발간사에서 “불교 신앙과 수행의 근본 생명인 올바른 불교 세계관을 확립해 내기 위해서는 불교의 근본 뿌리인 부처님의 육성과 불교의 원형이 담겨져 있는 아함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학문과 수행에 투철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불교의 원형이 담겨져 있는 아함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아함을 배워야 하는 이유

그러면 왜 불교 공부는 아함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첫째, 후대의 불교는 모두 아함, 즉 초기불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붓다의 근본 교설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으면, 그 기초가 빈약하여 붓다의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마치 지도나 나침판 없이 길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초기경전인 아함경은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해 설한 소승경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정보는 잘못된 것입니다. 대승불교도들이 당시의 부파교단을 폄하하기 위해 지어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에 현혹되어 초기경전을 무시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껴두거나 감추어 두지 않고 남김없이 다 말씀하셨습니다. 대승불교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오해되고 있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지 결코 아함경의 내용을 부정하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붓다의 근본 사상은 법(法, dhamma)과 율(律, vinaya)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법과 율을 근거로 불멸후 결집한 것이 곧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입니다. 이 때 결집한 경장이 곧 초기경전 입니다. 팔리삼장에서는 율(律) · 경(經) · 논(論) 삼장을 정전(正典, canon) 이라고 하는데, 교과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성립된 대승경전과 선서(禪書) 혹은 조사어록은 참고서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과서를 무시하고 참고서만으로 공부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의해 붓다의 근본 교설을 이해한 다음 후대에 변천된 대승불교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 공부는 아함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아함경의 바른 이해는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고익진 박사는 대승불교의 기초학으로서의 아함 교설의 체계성을 밝히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대승불교는 흔히 서기전 1세기경에 흥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검토해보면 검토해볼수록 그 정신과 이론은 아함의 그것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대승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대승불교가 이와 같이 아함의 정신과 이론을 기초로 성립한 것이라면, 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이론적 기초를 닦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는, 청정한 믿음은 이룰 수 있을지언정, 믿음과 반야가 일치된 진정한 이해는 얻지 못할 것이다. 아함을 거치지 않고 대승의 진정한 뜻을 알아내는 상근기(上根機)가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아함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논리적 과정은 거쳐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들이 어떤 새로운 신앙활동을 영위하거나 혹은 새로운 신학을 내세우려고 할 때에 종종 그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바로 그 외침이었습니다. 불교계에서 <붓다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붓다로 돌아가 아함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셋째, 아함에서부터 출발해야 전체 불교 교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동화 박사도 불교를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불교의 그 심오하고도 광범한 교리를 참으로 안다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교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불교 교리를 이해하는 종류를 들어보면, ①한문의 경문(經文)을 해석할 수 있는 정도. ②특수한 불교 술어의 의의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는 것. ③일경일론(一經一論)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 ④일종(一宗)의 교학(敎學)을 조직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 ⑤전불교교리사상을 조류적(潮流的)으로 비교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 ⑥교리사상의 발달 과정을 역사적으로 더듬어 볼 줄 아는 것. ⑦전불교교리를 종합적으로 조직하고 또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 가운데 일부분을 아는 사람을 불교를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 내용과 그 연구의 범위가 이와 같이 넓다는 것을 재인식하여 현재에 만족치 말고 항상 그 연구에 전진할 신심과 용기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으로는 전체 불교 교리를 종합적으로 조직하고 체계화시킬 수 없습니다. 불교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순서대로 정리해 나갈 때 비로소 전체 교학에 대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 아함은 붓다 사상의 원류(源流)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강의 하류에서 출발하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발원지(發源地)를 찾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강의 지류(支流)에서 원류(源流)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차례 엉뚱한 지류를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발원지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때는 이미 서산에 해가 기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강의 원류에서 출발하면 흐름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목적지인 대양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전체 가르침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그 역사적 붓다의 생동하는 모습이 담겨있는 아함경에서 불교 공부를 시작할 때 비로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여기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선(禪) 우월주의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말류이자 종착점입니다. 그 말류에서 원류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선불교에서 원래의 불교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앞에서 비유한 것과 같이 중도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다가 지쳐서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아함에서 재출발한다면 가장 빠른 시일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아함에서는 인간 붓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에 묘사된 붓다의 모습은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태어나 숨쉬고 살았던 한 인간의 발자취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성립된 대승경전에서는 그러한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신격화된 붓다의 모습뿐입니다.

예를 들면 디가 니까야(Digha-nikaya, 長部)의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에 묘사된 붓다는 매우 인간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과 병을 극복하고 쇠잔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는 장면 등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대승의 <보요경(普曜經, Lalitavistara)>이나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에 묘사된 붓다는 신격화된 모습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헌 모두 붓다의 생애와 관련된 것입니다만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읽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붓다의 모습은 적어도 제자들의 기억 속에 인격적으로 살아 계신 부처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때 편찬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 공부는 아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함은 현재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 아함경과 팔리어로 씌어진 니까야(Nikaya)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역 아함경을 읽을 때와 팔리 원전을 읽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전재성 박사는 “빠알리 어는 표음문자로서 대단히 분석적이고 구체적인 언어구조를 갖고 있는 인도유럽어이고, 한문은 표의문자로서 직관적이고 추상적 언어구조를 갖고 있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는 아함경으로 번역되면서 그 분석적인 언어 구조를 상실하고 추상화되고 격의(格義)불교화된 감이 없지 않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팔리어 원전을 읽을 수 없는 분들은 우선 한역 아함경이라도 읽기를 권합니다. 지금 당장 아함경을 읽으면서 불교의 본래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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