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승 석가모니

‘인간 붓다’의 길 따라 ‘삶의 달’을 보다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2. 23:14

 

‘인간 붓다’의 길 따라 ‘삶의 달’을 보다
한겨레 2009/02/25/17:32


‘금강경 표준본’ 기념 인도 순례
벽돌만 남아 불상도 없는 성지터엔 원숭이떼만
금강경 처음처럼 일상에서 챙긴 마음 고스란히




조계종의 교과서격인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다. 그 금강경 주석본은 지금까지 수백 가지가 난립해 부분적으로 해석을 달리했으나 표준화를 위한 노력 끝에 이번에 최초로 표준본을 내놓았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대신해 대변인인 기획실장 장적 스님과 조계사 부주지 토진 스님 등이 이 표준본을 부처님에게 고하기 위해 지난 12일부터 인도 불교 성지로 떠난 순례에 동참했다. 붓다의 발자취가 서린 땅에서 인간 붓다의 삶을 되새겨보았다.

금칠한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쉬는 붓다 느껴

◇ 사바세계가 정토이며, 일상에서 챙기는 마음이 바로 도다 순례단이 인천공항을 떠나 델리를 거쳐 만 이틀 만에 도착한 첫 순례지는 북인도 유피주의 쉬라바스티(사위성)였다. 쉬라바스티는 서라벌로 음역된다. 서라벌이 서울의 어원이란 설이 있으므로 쉬라바스티는 곧 ‘서울’로 볼 수 있다. 붓다가 살았던 2500여년 전 이곳 북인도엔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비롯한 16개의 나라가 있었다. 쉬라바스티는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오랜 문화와 전통의 숙성미를 가진 마가다국에 비해 신흥강대국인 코살라국은 호전적이고 난폭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45년 가운데 24안거를 보낸 곳은 ‘정토’가 아닌 그런 사바세계였다. 기원정사는 그 쉬라바스티에 있다. 붓다는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했다.


 


벽돌만이 남은 기원정사의 넓은 잔디밭이 햇살 아래 평화롭다.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번뇌망상’에 단골로 비유되는 원숭이마저 붓다의 영역에서 마음을 챙기는 것인가. 보리수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다소곳이 순례객을 반긴다.

금강경을 설한 건물터인 ‘간다쿠티’에선 먼저 도착한 순례객인 포항 죽림사 주지 종문스님과 불자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다. 이곳엔 불상도 없으며 붓다도 이젠 없다. 그들은 누구를 향하여 예불하는 것인가. 정성스레 절하는 모습이 흐트러짐이 없다.

금강경 편찬을 고하는 법회는 자연스레 그 순례객들과 함께 했다. 장적 스님은 한국의 모든 불자들이 이 금강경의 진리를 깨달아 성불할 수 있도록 정진하리라는 일념을 세운다.


금강경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삶이 아니라 깨달음만을 설하는 대승경전의 핵이다. 그런데도 그 금강경마저 붓다의 삶으로 시작된다. 금강경은 붓다가 1250명의 비구들과 아침을 먹을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를 걸치고 발우를 들고 마을에 가 탁발해 돌아와 공양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는 ‘일상적 삶’을 마치 비디오처럼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옛 선지식들은 그 뒤에 잇따르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금강경의 수많은 경구들을 제치고 바로 첫 문장에서 금강경의 모든 것이 설해졌다고 했다. 왜일까? 첫구절은 좌선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마음 챙김이 흐트러지지 않은 붓다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붓다에겐 ‘일상심(매사의 마음)이 곧 도(道)’였다.

순례란 그런 삶을 만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티베트의 정신지도자 달라이라마는 모든 수행 방법 가운데 우선적으로 ‘순례’를 권장했는지 모른다. 순례지에서 만난 선재마을 유지선 촌장은 “성지에서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명상을 하다보면 금칠한 채 높은 좌대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 쉬는 인간 붓다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매년 1월이면 50여명의 순례단과 함께 각자가 숙식을 해결하며 가끔씩만 모이면서 한달간 하는 순례를 10여년째 이끄는 것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사진만 찍고 마는 여행이 아니라 인간 붓다를 가슴으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99명 죽인 희대의 연쇄 살인범도 받아들여


◇ 살인범에게도 부처의 종자가 있다 기원정사에서 북쪽으로 가면 같은 사위성 내 앙굴리말라 스투파가 있다. 스투파는 탑인데, 우리나라 탑과 달리 마치 집터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한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앙굴리말라를 붓다는 출가자로 받아들였다. 스투파 안엔 그가 숨어 수행했다는 토굴이 지옥굴처럼 깊다.

애초 앙굴리말라는 성실히 정진하던 젊은 수행자였다. 그런데 평소 남편에게 싫증을 느낀 스승의 아내가 스승이 멀리 출타한 틈을 타 젊고 잘 생긴 앙굴리말라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이에 앙굴리말라가 응하지 않자 자신의 행동이 남편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한 그녀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남편이 돌아오자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강제로 욕보였다고 거짓 고해바쳤다. 그러자 질투심에 불타오른 스승은 앙굴리말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앙굴리말라에게 100명의 사람을 죽여 천개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면 승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 철저히 따르던 스승의 말씀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은 앙굴리말라는 수행의 마지막 단계라는 생각으로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여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걸었다. 그가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한명을 찾아 헤맬 즈음 앙굴리말라의 어머니가 눈에 뜨이자 어머니마저 죽일 심산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붓다가 가운데 나타났고, 앙굴리말라는 대상을 바꿔 붓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도 붓다는 잡히지 않았다. 앙굴리말라가 제발 걸음을 멈추라고 애원하자 붓다는 “앙굴리말라여, 나는 이미 멈춘 지가 오래되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너다. 붓다는 번뇌와 고뇌와 경계에 끄달림을 멈춘 지가 오래 되었으나,너는 멈추질 못하고 있구나”라고 말한다. 이를 들은 앙굴리말라는 구름이 걷히듯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의 행위를 반조하고 참회했다. 그는 출가해 비폭력주의자라는 뜻의 ‘아힘사’라는 법명을 받았다. 간디의 아힘사운동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토진 스님은 “요즘으로 보자면 경기 서남부 살인사건 혐의자 강아무개씨를 능가하는 희대의 살인마를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요즘처럼 개명된 세상에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점”이라고 했다. 살인마가 붓다의 승가에 귀의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붓다의 제자들만 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어버려 일주일 넘도록 승가는 탁발을 할 수 없어 굶어야 했다. 그러나 붓다는 그를 받았다. 믿음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본래는 부처’라는 확신이었다. 대승사의 주지 철산 스님 및 불자들과 함께 나선 순례길에서 만난 고우 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은 “중생이 성인이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성인이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라면서 “성인과 중생을 나눠보는 한 결코 마음속의 시비심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앙굴리말라는 자신이 불성을 자각했고, 마을 사람들이 내려친 돌에 맞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챙겨 평화로움을 잃지 않았다.

열반에 들기 전 식중독 걸려 이질로 고통
 
◇고통과 죽음 속에 평화가 있다 쉬라바스티에서 수백킬로미터를 달려 다음날 간 곳은 붓다가 열반한 쿠시나가르다. 열반당의 넓은 잔디밭에선 인도인들이 가족단위로 소풍을 와 노닐고 있다. 마치 공원 같다. 100km 정도 떨어진 바스터에서 산다는 몬모아 알림씨와 몸모 살럼씨는 무슬림이지만 이 마을 친척집에 올 때마다 이곳에 놀러온다고 했다.


 


고통이라곤 없을 것 같은 이런 곳에서 붓다는 고통 없이 죽지 않았다. 붓다는 노구에 식중독 중세까지 보였다. 고우 스님은 “요즘으로 보자면 이질 증세를 보여 너무 아파서 부처님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멸진정(삼매의 일종)에 들었다는 얘기가 경전에 나온다”면서 “부처님은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말했다. 붓다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를 똑같이 겪으며 죽어갔다. 그러나 붓다는 몸의 통증에 의해 마음의 평화가 훼손되지 않은 채 열반에 들었다. 붓다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열반당 안의 열반상에서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와 열반상 옆에서 오랫동안 명상하던 겔트 제롤드는 “가슴 속에서 평화와 기쁨이 샘솟는다”고 했다. 그 죽음의 처소에서.

◇ 어느 한 중생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이 쿠시나가르에서 인간 붓다의 마지막 제자가 된 사람이 수바드라다. 붓다가 몸을 엄습하는 고통 속에서 열반에 든 바로 그 날이었다. 수바드라가 붓다를 찾아오자 시종을 들던 아난 존자는 “병든 부처님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돌아가라”고 했다. 120살이나 먹은 늙은 수바드라가 세 번이나 청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붓다가 “그를 막지 말라”고 했다. ‘수바드라는 나를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온 사람이니 그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바드라는 그 자리에서 붓다의 법문을 듣고 모든 의문점을 해결했다.

◇ 악연도 선연이 된다 붓다는 가난한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을 자처했다. 그런데 춘다가 공양한 ‘스카라 맛다바’라는 음식을 먹고 심한 설사병을 앓았다. 스카라 맛다바에 대해서는 독이 있는 야생토란, 돼지버섯, 돼지고기 라는 등의 여러 설이 있다. 춘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붓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자 모든 이들이 “춘다의 공양에 무슨 공덕이 있겠느냐”면서 춘다를 원망했다. 만약 붓다가 그대로 말없이 열반에 든다면 춘다야말로 붓다를 죽인 천고의 죄인이 될 처지였다. 그러나 붓다는 “붓다에게 깨닫기 직전과 열반 직전에 올리는 공양이야말로 최고의 공덕”이라고 못 박았다. 이 말 한마디로 불교 역사에 남을 죄인이 될 뻔한 춘다는 오히려 최고의 공덕주로 기사회생했다.

 


쿠시나가르(인도)/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장수경 기자
음악 Diego Modena의 Song Of Oc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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