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승 석가모니

초전법륜 - 중도 대선언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2. 23:07

초전법륜 --중도 대선언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
[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道)를 이루고 난 뒤에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불교의 근본교리가 들어 있으며, 중도설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도설은 극단적인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는 그 두 변은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라 수행의 면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사항입니다. 이와 같이 최초의 중도설은 수행자의 실천에 관계하여 제시된 것입니다.그 법문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먼저 팔리어(p?li)로 씌어진 남전장경(南傳藏經)의 번역문을 인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에 해당하는 북전(北傳)의 한역(漢譯) 경문을 일부 발췌하여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世尊)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南傳大, 律部 3, p. 18]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하는 두 변[兩邊] 가운데는 선악(善惡), 유무(有無)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들었습니다. 인용한 경문에 있는 두 변 중 첫 번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욕락(欲樂), 즉 낙(樂)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괴로움, 즉 고(苦)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으며, 부처님을 따라서 최초로 출가한 다섯 비구도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고행을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입니다. 많은 출가자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苦)와 낙(樂)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깨달은 것, 정등각(正等覺)한 내용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苦)와 낙(樂)을 버린다는 것이 어찌 그다지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고(苦)와 낙(樂)을 버리라고 한 것은, 평범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철학적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바로 깨쳐서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苦)가 아니면 낙(樂)이고 낙(樂)이 아니면 고(苦)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설사 열반(涅槃)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닙니다. 고(苦)와 낙(樂)을 떠난다는 것은 세간의 고(苦), 낙(樂)이라든지 출세간의 낙(樂)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그 고(苦)와 낙(樂) 등 일체의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합니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륜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변이 있으니 응당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함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음이다.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佛復告曰호대 世有二邊하니 不應親近이라. 一者는 貪著愛欲하여 說欲無過요 二者는 邪見苦形하여 無有道迹이라 捨此二邊 便得中道니라. [大正藏 22, p. 104中, 五分律]

“비구여, 출가자는 두 변을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 즐겨 애욕을 익히거나 혹은 스스로 고행하는 것이다. 현성의 법이 아니며 심신을 피로하게 하여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비구여, 이 두 변을 제외하고 나서 다시 중도가 있느니라.
比丘出家者는 不得親近二邊이니 樂習愛欲이나 或自苦行이라 非賢聖法이요 勞疲形神하여 不能有所辦이라 比丘 除此二邊已하고 更有中道니라. [大正藏 22, p. 788上 四分律]

이 중도선언은 이와 같이 한역(漢譯)의 오분율(五分律), 사분율(四分律)에도 나오나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장경의 기록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남전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Suttanip?ta)라는 경(經)이 있는데, 그 가운데 피안도품(彼岸道品)에서 중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두 극단인 두 변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의 행동입니다.
많은 불교학자들은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그보다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도 중도의 내용이 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기에 여기 ?피안도품?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철스님 법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