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스크랩] 백일법문 [제2장 원시불교사상] 4-2 한역 가전연경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8:41
4-2 한역 가전연경

 

세존사이트 / 성철스님 법어집 / 장경각 / 불기 2536.4.

 

가전연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정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세존께서는 정견을 베풀어 설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니라. 취하여 집착한 바이니 취하여 집착한 때문에 혹은 있다는 것에 의지하고 혹은 없다는 것에 의지하느니라. 만일 이 취함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여도 취하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고 헤아리지 아니하여, 나의 괴로우이 생할 때는 생하고 괴로움이 멸할 때는 멸하여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니, 이것을 정견이라 이름하며 이것을 여래가 베풀어 설한 정견이라 이름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모임〔集〕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며, 세간의 소멸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있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니라.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말하자마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純大苦聚〕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해 마치시자 존자 가전연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킨바 아니하고 마음에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迦가迦가가 延이 白佛言호대 世尊이시여 如世尊說正見 云何正見이며 云何世尊施設正見이니까 
佛告迦 延하시대 世間에 有二種依하니 若有若無라 爲取所觸이니 取所觸故로 或依有하며 或依無니라. 若無此取者는 心境擊着에 使不取不住不計하여 我苦生而生하고 我苦滅而滅하여 於彼에 不疑不惑하고 不由於他而自知하니 是名正見이며 是名如來所施設正見이니라 
所以者何오 世間集을 如實正知見하면 若世間無者不有하며 世間滅을 如實正知見하면 
若世間有者無有니라 是名離於二邊하여 說於中道이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니 謂緣無明行하고 乃至純大苦聚集하며 無明이 滅故로 行滅하고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佛說此經已에 尊者迦 延이 聞佛所說하고 不起諸漏하며 心得解脫하여 成阿羅漢하니라. 
[雜阿含 12卷 p.85下-86上]

세상에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많지만 철학적으로 깊이 파헤쳐 들어가면 마침내는 영원성이 있다거나 영원성이 없다거나 하는 두 가지 견해밖에 없습니다. 즉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다고 보며,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양 극단에 치우친 변견입니다.

'취하여 집착한 바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경계를 취해서 마음이 사량분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있다는 견해에 의지 하거나 없다는 견해에 의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변견을 내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취함이 없다'는 뜻은 분별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별심이 소멸되어 무심(無心)이 되어 모든 경계에서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간에 취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사량으로 헤아리지 않아서 변견이 나지 않습니다.

'나의 괴로움이 생할 때는 생하고 괴로움이 멸할 때는 멸한다'함은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이 생하고 또한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 (應無所主而生其心)' 는 금강경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함은 그 마음의 생멸(生滅)을 바로 보면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않고 명백히 스스로 자각하여 모든 분별심을 떠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입장에서 생멸을 바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세간의 모임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생성의 과정을 의미하는 집제(集諦)를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며,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있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다'고 하므로 소멸을 의미하는 멸제(滅諦)를 바로 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제와 멸제를 바로 보면 궁극적으로 그 관조되는 세간의 실상은 '또한 생함과 또한 멸함〔亦生亦滅〕' 이면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음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또한 있음과 또한 없음〔亦有亦無〕'이면서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음〔亦有亦無〕'입니다. 이러한 뜻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를 표명한 것 외에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함은 서로 의지하여 생멸한다는 뜻이니 부처님이 십이 연기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 구절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기란 서로 의지하여 생한다는 것으로서 본래 시간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됩니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함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순관으로 집제를 바로 보면 생을 바로 보는 동시에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역관으로 멸제를 바로 보면 멸함을 바로 보는 동시에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출처 : 고전 취미 붙이기
글쓴이 : 無爲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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