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불교의 종교성 문제
근본불교의 이같은 성격에 대해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절대신이나 또 다른 어떤 의지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종교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란 어떤 절대자의 자비에 의한 구제를 전제로 시작되는데 근본불교에는 그런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어떤 학자는 ‘근본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학자는 ‘불교는 처음에는 기도가 없는 도덕적 조직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종교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불교 특히 근본불교의 종교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종교관이 기독교적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蟹)란 그 껍질에 맞도록 구멍을 판다고 한다. 기독교의 강한 영향 밑에 있었던 그들은 당연히 기독교적 종교관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종교관이란 ‘신과 사람의 관계’라는 틀 안에 모든 종교를 묶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전모를 드러낸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은 그들의 종교란 틀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황했고 그래서 앞서와 같은 주장을 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종교관은 기독교적인 틀 안에서 규정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아가서는 무엇인가 초자연적 능력이나 기적·기도·주술적 의식 속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불교의 본래 모습이 포장되지 않은 채, 또 왜곡되거나 변용되지 않은 채 나타날 때, 불교의 종교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하나의 학문의 영역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개념은 이제 크게 변하였다. 기독교 이외에는 종교로 인정하려 하지 않던 사람들도 세계의 많은 종교에 관한 지식이 모아지자 그 같은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적 대상은 반드시 신비하고 초월적 대상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결코 모든 종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종교인가. 사람들은 이제 다시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에서 무엇인가 공통적이고 본질젓인 것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낸 것은 ‘성스러운 것(das Heilige)'이라는 그것이다.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인 불교도 이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종교에 포함될 수 있다. 프랑스의 학자 뒤르켐은 ’성스러운 것에 관한 신념과 행사, 그리고 이에 기초한 공동사회가 종교의 본질적 요소‘라고 규정하면서 ’불교에는 신은 없지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와 그로 인한 행사와 공동사회가 있기 때문에 위대한 종교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여간 이렇게 하여 불교이 종교성문제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관념이 등장하면서 객관적 학문의 문제로서는 일단 지금까지의 애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이 있다. 도대체 불교에 있어서 성스러움은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사람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종교관념에 의하면 종교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이란 절대자에게 바쳐지는 신성관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근본불교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석연치 않는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불교에는 절대적 신과 같은 신성한 존재는 없다. 부처님도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조차 인격적이고 절대적인 신성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면 도대체 불교의 무엇이 성스러운 것인가.
불교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이란 특정한 인격관념 혹은 행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사성제’에서 볼 수 있듯이 진리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불교에서 ‘성스러운 것’은 진리이다. 모두 성스러운 진리(法)에서 비롯된다. 불교도의 귀의 대상인 삼보(三寶)는 그 자체로서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삼보가 성스러운 것이기 위해서는 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부처님(佛寶)이 성스러운 것은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우리 앞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가르침(法寶)이 성스러운 것은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우리 앞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가르침(法寶)이 성스러운 것은 그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僧伽)가 성스러운 것은 진리를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이 진리를 깨닫지 않았다거나 승가가 진리를 향하는 집단이 아니거나, 가르침(法)의 내용의 진리와는 무관한 헛된 것(邪法)이라면 결코 성스러움을 획득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성스러운 것’은 독특한 입장이 명백히 나타난다. 불교의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미망(迷妄)의 허위 앞에 무릎을 끊지 않는다. 환상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전도(顚倒)된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허황되지 않은 것(眞實不處)에 무릎을 꿇고, 이치에 합당한 것에 고개를 숙인다. ‘성(聖)은 곧 정(正)이다’라는 명제만이 불교의 입장에 일치하는 것이다.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다 바쳐 진실불허한 경지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서 감동이 우러나고 ‘성스러운 것이’ 생기는 것이다. 불교의 종교성은 여기에서 비로소 해답이 찾아진다.
이것을 오늘날의 이해에 알맞도록 설명한다면 불교란 철두철미 인간의 자기형성의 가르침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 앞에 머리 숙이며 죄를 용서받으며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신의 은총에 의해 천국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 노력하지 않으면서 재물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공로도 없이 영예를 기다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종교철학의 용어를 빌면 운명론적이랄까 아니면 우연론적인 태도이다. 신의 뜻에 의해 예정된 운명, 아니면 그야말로 우연히 그렇게 되어질 거라는 생각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불교에서 간곡히 추구하는 길은 앞에서 인용한 부처님의 말씀처럼 잘 조어된 자기를 확립하는 길이다. 이것을 현대용어로 말한다면 ‘훌륭한 자기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것이 훌륭한 자기형성인가. 그 이상상(理想像)은 다름아닌 부처님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이같은 이상적인 모습을 확립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이미 생존해 있을 때 그 이론과 실천방법이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 설명되어졌다. 부처님은 그 이상의 모습을 먼저 자신을 통해 구현하고 제자들에게 ‘그대들도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곳에 이르는 이론이나 실천에 대해 누구라도 의혹이 있으면 부처님은 언제나 간곡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을 해 주었다. 이것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맺어온 관계였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 얼마 뒤에 임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생각한 아난다는 슬픔과 함께 당황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처소에 가서 문빗장을 잡고 서럽게 울었다.
“아,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우리 부처님은 우리를 남겨 놓고 떠나시는 것인가.”
그때 아난다를 찾고 있는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처님이 찾으시니 어서 그리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가 급히 부처님 곁에 다가가자 늙은 스승은 그를 바라보고 오랫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렇게 마지막 말씀을 했다.
“아난다여. 혹시 너희들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즉 ‘우리는 스승의 말씀은 이제 끝난다. 이제 우리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그러나 아난다여. 내가 가르친 교법(敎法)과 계율(戒律)은 내가 죽은 후에도 너희들의 영원한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무상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는데 힘써야 한다.”
부처님이 최후로 남긴 이 말씀은, 불교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부처님도 일찍이 ‘진리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항상 있어온 것이며, 있을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부처님은 또 옛 성(古城)의 비유를 들어 당신은 옛 성터로 가는 길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고 좋은 안내자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의사(大醫王)의 비유를 들어 사람들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려주었다. 그 말을 믿고 약을 지어먹는 사람은 치료가 되지만 아무리 정확한 약방문이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효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야속하기까지 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속에는 참으로 속 깊은 자비가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착각이나 거짓말로 속이지 않고 진실을 밝힘으로써 진정한 해탈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야말로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탁월한 면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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