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2-2.정각자의 고독(1)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5:42

2-2.정각자의 고독(1)


정각자의 고독을 설한 경전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한 경* (남전 상응부경전(6ㆍ2) 恭敬. 한역 잡아함경(4ㆍ14) 尊重) 은 그때의 부처님에 대한 얘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강변 아자파라니구로다나무 아래 머물고 있었다. 정녕 깨달음을 성취하셨을 때의 일이었다.


아자파라니구로다(阿闍波尼俱律陀)는 ‘양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나무’라는 뜻의 말이므로 필경 울창하고 무성한 잎을 가진 나무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불전(佛傳)에 의하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한동안 그 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깨달음의 기쁨을 음미했던 것 같다. 그런 뒤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아자파라니구로다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성취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므로 경전은 굳이 ‘깨달음을 성취하셨을 때의 일이었다고’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처님의 독백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존경할 곳도 없고 공경할 사람도 없는 삶은 괴롭다. 나는 어떤 수행자와 바라문을 가까이서 존경하며 살아야 좋을까….”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독백’이란,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만이지 왜 또 존경하며 가까이서 모시고 살 스승을 찾았을까 하는 점이다. 한역에서 ‘봉서공양(奉仕供養)’ (upanissāya:옛날에는親近이라고 번역.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함) 말로 번역하고 있는 그 의미는 누구의 제자가 되어 존경하고 봉사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독백 같은 이 말은 ‘그 누구도 의지하고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이란 불안한 것이다. 나는 누군가 존경할 만한 수행자나 바라문을 찾아내 그의 제자라도 외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어째서 이러한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정각자의 고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정녕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다. 정각자(正覺者)가 되신 것이다. 이토록 기쁜 일은 없다. 그래서 그 분은 보리수 아래 앉아 있을 동안 조용히 그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음의 내용을 다시 생각하며 정리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자파라니구로다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길 무렵부터 부처님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가 불가사의한 고독감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던 듯하다.

과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하면 이러한 깨달음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은 이 세상이 넓다 해도 오직 부처님 혼자뿐이었다. 그것은 외로운 일이고 불안한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정각자의 고독’이었다. 인건은 누구나 고통을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약 누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수행자나 바라문이 있다면 그 곁에서 제자라도 되어서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부처님은 이미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기 때문에 많은 수행자나 바라문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의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부처님은 이미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기 때문에 많은 수행자나 바라문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의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부처님은 다시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끝에 새로운 생각을 해냈다. 즉 경전에서 보여지는 ‘나는 오히려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경하고 그 곁에서 사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누군가 사람에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깨달은 법이야말로 자신이 의지하고 존경하며 살아가야 할 의지처였음을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부처님이 임종하면서 남긴 ‘자신에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라,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삼으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는 유훈에서도 나타난다. 후세의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이같은 태도를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는 말로 정리하고 있거니와 부처님은 마침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어서 경전은 신화적인 수법으로 이때의 부처님 심경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때 이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부처님은 심중을 헤아리고 마치, 힘센 남자가 팔을 굽혔다 펴듯이 범천계에서 내려와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범천은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부처님께 합장 예배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바로 그대로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바로 그러하옵니다. 부처님이시여, 과거의 정각자이던 부처님도 법을 존경하고 가까이에서 사시었습니다. 미래의 정등각자인 부처님도 법을 존경하고 가까이에서 사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정등각자인 부처님도 법을 가장 존경하고 가까이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범천은 다시 이런 노래를 불렀다.


과거의 모든 정각자들도

미래의 모든 정각자들도

그리고 현재의 정각자들도

중생의 우뇌(憂惱)를 면한 자는

모두 정법을 존경하며 살아간다.

지금도 정법을 존경하며 살며

미래도 정법을 존경하며 살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자신의 행복을 원하며

이웃도 그러하기를 원하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길이 기업하고

정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형식과 범천설화

여기서 우리는 범천설화(梵天說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아함경전의 문학형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경의 후반부에서 보듯 아함경전의 곳곳에 범천이 등장한다. 범천이라면 본래 인도의 최고신이다. 그런데 그 신이 하늘에서 나타나 부처님의 생각을 찬탄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화적이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다. 그것이 경전의 문학형식이 때문이다.

모든 경전은 서술방법에 있어 약속사항이 있다. 이를테면 경전은 부처님이 설법할 때 대지가 미묘하게 진동했다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현실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 당시 불교에서는 어떤 최고의 일이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형식이다. 아참경전에 악마와 범천이 출현하는 것도 경전저술에 있어 하나의 약속된 형식이다. 불쑥 악마가 나타나서 부처님께 무엇을 속삭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심리적 갈등의 그림자가 내심을 스치고 있었다는 심리적 묘사의 문학형식인 것이다. 범천이 모습을 나타내 부처님의 생각을 찬양한 것도 어떤 좋은 생각이 부처님의 내심에서 확립되었음을 표현하는 묘사의 약속인 것이다.

범천이 부처님에게 법에 의지하라고 권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가슴속에 어떤 결심이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정법에 의지하겠다는 결심이 범천의 말로써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이 의지할 곳은 정법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은 불교의 종교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모범삼아야 할 대상이 부처님이라고 할 때 그들 역시 의지해야 할 곳은 부처님처럼 정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정법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부처님은 그것으로써 전술한 ‘정각자의 고독’을 이겨냈을까. 그렇지 않았다. 정법에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법이 혼자만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한 정각자로서의 고독은 언제까지나 이겨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죽어버리면 혼자만 알고 있던 정법은 없어져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것은 부처님 자신이 그 정법을 짊어지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그 정법을 설하여 정법을 인간세계에 영주(永住)토록 하는 것이다. 즉 설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부처님 앞에는 그 이전까지 없었던 설법(說法) 이란 새로운 과제가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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