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다스리는 기술 제목을 다스린다고 했지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가. 사람이 자연을 다스릴 수 없듯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다.
물론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사람이 자연 위에 군림한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현대 과학이 그 일을 해 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야말로 우리들의 순전한 착각일 뿐이다.
오히려 자연이 우리를 다스렸다고 해야 옳을까?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 하나 시비를 걸지 않고, 우리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 좋다 싫다 분별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지고 들지 않는다. 다만 그저 인간들의 일상을 지켜볼 뿐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방향대로 이끌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그 사람을 다스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놓아두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하고 참된 다스림인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에 대해 기대가 많고,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을 때, 꼭 그렇게 되어야만한다는 고집이 클 때, 그래서 그런 고집으로 자식을 내 뜻대로 다스리려 할 때, 자식은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겉모습이 설령 다스려 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영혼은 여전히 다스려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냥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 스스로가 찾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놓아줘야 한다.
내 고집대로 사람을 다스리려 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고집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상대를 보며 내 마음의 괴로움만 커져갈 뿐 상대를 내 손아귀에 넣고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놓은 지위에 있거나,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혹은 부모라는 지위에 놓일 때도, 어쩌면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혀 어긋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겉 모양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 내면은, 그 영혼은 오히려 내가 원하는 그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내가 원하는대로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전혀 그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다스림을 강하게 받는 사람일수록 그 내면은 거스르고자 하는 마음과 반발하려는 마음만 커갈 뿐이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놓아주었을 때, 더 큰 의미에서 나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장 올바른 다스림은 가장 열린 마음으로 놓아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다. 겉모습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영혼을 울릴 수 있고, 내면을 울려 더 큰 틀 속에서 지혜롭게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냥 놓아둔다고 해서 방임하라는 말은 아니다. 무관심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냥 상대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도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과 똑같다. 나를 다스리듯 사람을 다스리면 된다.
나를 다스린다는 것, 수행과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놓아버림(止)과 알아차림(觀) 다시말해 멈춤과 비춤에 있다.
온갖 번뇌며 고집, 편견들을 다 놓아버리고,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모든 수행의 핵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관(止觀)이고 정혜(定慧)인 것이다.
나를 다스리는 것처럼 상대를 다스릴 때에도 이 법칙은 적용된다.
내 안에 모든 고집스런 마음, 욕망과 집착,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들을 붙잡고서 고민하고, 근심하고, 복잡하게 살고 있는 바로 그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가만히 비추어 보는 것이 수행이듯,
상대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 내 생각대로 잘 다스려 보겠다는 마음, 내 고집대로 움직이겠다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가만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면 된다.
무관심이나, 무시한다거나, 내 멋대로 통제하려 드는 것은 다 좋지 않은 방법이고, 근원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도리어 불만을 사고, 반발을 살 뿐.
가장 좋은 방법은 다스리려 들지 말고, 통제하려 들지 말고 그냥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놓아 두는 것, 그리고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봐 주면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할 몫을 정확이 알아서 할 것이다. 본래 법계가 그렇게 여여하게 움직이고 있듯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따뜻한 관심이다. 그들에게 참된 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고, 그들 안에서 지혜가 움트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무언가 일을 행할 때, 내 생각으로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잘했다 잘못했다 말하고 분별하면서 어느 한 쪽을 택하도록 강요하지 말라.
분별없는 마음으로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의 결정에 따뜻한 바라봄의 시선을 보내고 응원해 주라.
누군가가 결정해 주는 것은 자신 스스로 내면의 답을 찾아 결정한 것만 못하다.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을 찾아 가 답을 구하곤 하는데, 열이면 열 답이 다 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살아온 경험에 비춰 답을 대신 내려주니까. 저마다 자신의 지식에 비춰 옳다 그르다 분별된 지식으로 알려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딱 정해져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들 분별지로써 둘로 나누어 거기에서 옳은 것을 택하는 지식은 불완전하고 근원적이지 않다.
그러나 절 집안에 찾아가 물으면 답을 대신해서 내려주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자신 안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 줄 뿐이다. 그것이 밝은 선지식의 답변이다.
그렇게 놓아주고 바라보아 주는 것 그것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이고, 자식을 키우는 방법이고, 직원들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사람들을 통제하려 들었는가. 얼마나 내 자식을 내 고집대로 키우려고 했고, 그로인해 내 자식의 마음은 얼마나 얼룩졌는가.
놓아주고 다만 바라봐 주자.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