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2)

九. 가난할 때...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27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을 도웁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요즘 사람들 많은 돈 들여 주식 투자를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투자 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투자도 하나의 요행을 바라는 것 아닌가요.

투자해서 큰 돈을 벌었다면
그것 또한 자신이 미리부터 지어둔 과보를
투자라는 형식을 빌어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큰 돈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업에 대한 과보를 받은 것이겠지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음.. 투자해서 내 업이 얼마나 되나 시험해 보자.’
하며,
어차피 해도 안해도 과보를 받는 거라면
그렇게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과보를 받게 되면
이익이 분에 넘치기 때문에 즉 자기 그릇보다 더 큰 이익을 받게 되기에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만 돕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허영이 커 지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만 커 질 뿐입니다.

그렇게 번 돈은 어리석은 마음의 과보이므로
다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말 할 것도 없고 복권이나 경마 등 또한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는
현대인의 심리가 만들어낸 어리석은 우리네 산업사회의 일부입니다.

도박을 하고, 경마를 하고, 복권을 긁고,
또 주식에 투자를 하고
이런 모든 일들이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익을 분에 넘치에 바라고,
그런 마음으로 실제 이익을 보았을 때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 탐내는 마음은 더욱 커집니다.

그렇게 쉽게 버는 일을 한 두 번 해 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 정당하고 정직한 노동을 통해
합당한 이익을 남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돈을 벌려고 하는가‘
하고 도리어 정직한 노동자를 어리석게 여길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 얼마나 뒤바뀌고 잘못된 생각이겠습니까.
그러나 실제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의 과보는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가엽고 불쌍한가요.

돈이 많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부유한 물질을 즐기며 즐긴다고 하더라도
이런 부유한 일상을 가지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계의 이치에서는 크게 어긋나는 행복이고,
어리석은 행복이며,
결국엔 추락하고 말 헛된 행복에 불과합니다.

돈을 벌고,
물질을 많이 얻음으로 인해,
이익을 더 많이 남김으로 인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은 이익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고,
큰 이익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은 이익으로 부자가 되는 쪽이
더 쉽고 편하기도 할뿐더러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입니다.

최소한의 먹고 입고 자는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다 갖춘 것입니다.

최소한의 먹고 입고 자는 필요를 충족하고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없어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욕망’ ‘욕심’ 때문에 가난한 사람입니다.

최소한의 필요 조차 충족하지 못한 사람은
요즈음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즉, 우리는 행복을 위한,
부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안으로 돌이켜 찾으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밖을 기웃기웃 거리고,
밖으로 또다른 부유함을 찾아 애를 씁니다.
밖에서 찾는 부유함에는 끝이 없습니다.
도무지 만족이 있지 않습니다.

얻음과 동시에 또다른 욕망을 불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집을, 모든 차를 다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익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부자입니다.
적은 이익으로 부자되는 일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복의 그릇이 커 지면
복의 과보는 그에 따라 크게 받게 마련입니다.
인연따라 그렇게 받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자신의 그릇은 키우지 못한 채 많은 복의 과보를 바란다면
주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만 불러옵니다.

법성게에서는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이라 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배의 비
허공 가득 내려오면 중생들은 그릇 따라 제 이익 얻어간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익되게 하는 보배의 비는
이 우주 법계의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렇게 언제나 법계의 이치, 진리는 허공 가득 하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릇 따라 그 이익을 얻어 가게 마련입니다.
그릇은 작은데 많은 것만 넣으려고 하면
주체하지 못하고 그릇을 넘는 만큼 어리석음만 쌓여간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많은 것을 바라려 하지 말고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릇을 키운다는 것은 작은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고요히 마음을 닦아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하나를 생각하기 보다 ''전체로서의 나''를 명상해야 합니다.
''나 없음''의 도리를 올바로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베풀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는 가운데
무한히 베풀고 무한히 받고 그럴 수 있는 지혜가 나옵니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쌓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행복해 진다는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적은 이익으로 부자가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누구나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랍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그릇에 맞는 이익은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즉 누구나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행복할 수 있는
그 만큼의 이익은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줄 모르고 우리는 보다 많이, 보다 좋은 것을 바랍니다.
내 밖에서 보다 많은 것을 들여와야
행복할 줄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우리입니다.
참 반성할 일입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개원 법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난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풍요 속에 사는 사람은 병들기 쉽지만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가난한 수행자만이 우주를 가질 수 있다고 그럽니다.
법계를 훔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