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나는 등이 아프다. 잠시 누워야 하겠다.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54

불교의 인간관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경전이 전하는 고타마 붓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일 것이다. 여러 불교경전중에서도 인간 붓다의 모습을 비교적 충실히 기록해 놓은 빠알리어 경전 (아함경)을 대상으로 삼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세기 전후로 대승운동이 일어나면서 후세에 찬술되고 성립한 대승경전에서는 붓다를 신격화.우상화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세상의 조물주나 절대적인 신(神)을 거부하였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교는 인간본위의 종교였기 때문에 절대자나 신을 향한 예배나 기도도 없었고 오직 자기수행만이 요구 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늘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써 행동했을 뿐이며 어느 면에서도 남다른 무엇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는 불교 교단의 지도자로도 자처하지 않았고 자신의 육신에 있어서도 남다른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붓다가 가비라성 밖에 거주하고 계셨을 때 붓다의 출신 종족인 샤캬족 사람들은 새로운 회당(會堂) 을 짓고 붓다를 초청했다. 붓다는 기꺼이 초청에 응하여 밤 늦게까지 그들을 위해 설법했다. 그리고 피곤을 느끼자 설법을 아난다에게 맡기고 물러가 피곤한 몸을 쉬셨다. 그때에 하신 말씀이 제목에 인용한 문구다.

[나는 허리가 아프다. 잠시 누워야 하겠다.]

붓다를 초인적인슈퍼맨이나 신처럼 알아 오던 우리에게는 어떤 진리 이상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말씀이다.

부경전 16에는 늙은 붓다의 고백을 전해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난다여, 나는 노쇠했다. 나이 이미 80십이다. 이를테면 아난다여, 낡은 수레는 가죽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거니와 생각컨데 내 몸도 가죽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고 있는 것이나 다를바 없다.]


이런 붓다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법(法)에 대한 숭배였었다. 상응부 경전이 전하는 박카리의 이야기같은 것이 단적인 예이다.

박카리라는 비구가 어느 도공의 집에서 중병으로 죽어 가면서 그는 간호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소원을 하소연하였다.

[나는 이처럼 병이 무거워 회복할 가망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으로 붓다를 친견하고 발밑에 예배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몸으로 붓다가 계시는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다. 벗이여, 미안하지만 죽림정사까지 가서 '이곳까지 오실수 없느냐고' 붓다에게 여쭈어 주실 수는 없겠는가.]

그 말을 전해 들은 붓다는 곧 도공의 집으로 가셨다. 붓다의 모습을 보습을 보자 박카리는 아픈몸을 일으켜 앉았다.

[박카리여, 고요히 누워 있거라. 내가 그리로 갈 것이다.]

그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붓다가 그 옆에 앉으시자 박카리가 말했다.

[존자이시여,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몸은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으로 스승님의 얼굴을 우러러뵙고 발밑에 예배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엄숙하게 말했다.

[그만두거라 박카리여, 이 썩어가는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박카리야,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느니라.]

불교에서는 붓다가 스스로의 수행으로 진리의 길을 발견했지만 발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과거의 부처님들이 걸어갔던 그 길이 가리어지고 흙속에 묻혀서 잊혀졌던 것을 다시 찾아내고 길을 열었던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도(佛道)라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으로 발견한 길이 아니라 석가모니 이전의 많은 구도자들이 깨닫고 실천했던 그 길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과거의 부처님들이 (過去七佛 과거칠불) 걸어간 길 또 깨달은 길 그것을 고도(古道)라고 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고타마 붓다라는 개인에게 종교의 열쇠가 쥐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길을 발견했고 발견한 길을 가르키는 안내자일 뿐이다.

법(진리)는 그의 출현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의 가르침이 없다 해도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그 법을 깨달아 정각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절대자 개인에게만 구원의 권능을 인정하는 타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가져온 곳:
카페 -
홍사성의 불교사랑-        글쓴이 : 실론섬

'불교 공부방(1)' 카테고리의 다른 글

色 卽 是 空  (0) 2012.12.04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  (0) 2012.12.04
칭찬과 비난  (0) 2012.12.04
연꽃의 열가지 특성  (0) 2012.12.04
네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0) 201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