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家龜鑑
曹溪 退隱 術 조계종에 속한 퇴은이 서술했다
1. 한 물건 - 마음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져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也 六祖告衆云 吾有一物 無名無字 諸人還識否 神會禪師卽出曰 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此所以爲六祖之孽者也 懷讓禪師 自嵩山來 六祖問曰 什麽物伊麽來 師罔措 至八年 方自肯曰 說似一物 卽不中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 ◆三敎聖人 從此句出 誰是擧者 惜取眉毛
⇒ ‘한 물건’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둥근 원(一圓相)-입니다. 옛사람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노래하였습니다(頌云). “옛 부처께서 나시기도 전에, [이미] 뚜렷한(凝然) 둥근 하나의 모습(一相圓). 석가모니(釋迦)가 오히려 이해하지(會) 못한 것을 가섭(迦葉)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 물건’이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고 일찍이 사라져지지도 않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고 한 이유입니다. 육조 혜능 선사(六祖 慧能, 638-718)가 [둘러앉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어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 너희들이 곧 알겠느냐?” [이에] 신회 선사(荷澤 神會 686-760)가 곧 나와 대답했습니다. “[일물은] 모든 부처의 근본(本源)이고 저(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것이 [신회가] 육조의 [선(禪)의 법맥(法脈)에서] 서자가 된 까닭입니다. 회양 선사(南岳 懷讓 677-744)가 숭산(嵩山)에서 오니 육조가 물었습니다. “어떤 물건이길래 이렇게 오는가?” [이에 회양] 선사는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으며, 팔 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스스로 [깨닫고서] 기뻐 말했습니다. “한 물건이라고 [말]할지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不中).” 이것이 [회양이] 육조의 [선의 법맥에서] 적자가 된 까닭입니다. ◆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의 성인이 [모두] 이 말에 따라서 나왔다. 누가 이것을 예로 드는 것에 있어서 눈썹이 빠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겠는가!
2. 자각의 중요성 - 깨달음의 주체는 바로 나다.
佛祖出世 無風起浪
⇒ 부처(佛)와 조사(祖)가 세상에 나타났으니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이는구나!
佛祖者 世尊迦葉也 出世者 大悲爲體度衆生也 然以一物觀之 則人人面目 本來圓成 豈假他人添脂着粉也 此出世之所以起波浪也 虛空藏經云 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至於佛語 亦是魔業 是此意也 此直擧本分 佛祖無功能 ◆乾坤失色 日月無光
⇒ 부처와 조사라는 것은 석가모니(世尊)와 가섭입니다.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은 [부처와 조사가] 큰 자비를 본체로 삼아 중생들을 구하려(度衆生) 함입니다. 그러나 ‘한 물건’의 관점에서 본다면(觀) 곧 [이와 같은 부처와 조사가 대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세상에 나옴은] 각 사람(人人)의 본래 타고난 얼굴(面目)이 본래 완전히 이루어져있는데(圓成) 무엇하러(豈) [그 얼굴에] 기름을 더해주고 분을 발라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 하는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나온 것이 파도를 일으키는 까닭입니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서 이르기를, “문자(文字)는 악마의 일(魔業)이 되고 이름과 형상도 악마의 일이 되며 심지어(至於) 부처의 말까지[도] 또한 악마의 일이 된다”[라고 한 것은] 곧 이 뜻(意)입니다. 이는 본래 타고난 본성(本分)을 직접 들어 보인 것입니다. 부처와 조사는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게 할] 공덕과 능력(功能)이 없습니다. ◆ 하늘과 땅이 빛을 잃으며 해와 달도 빛이 없구나!
3. 부처와 조사의 자비의 방편
然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
⇒ 그러나 진리(法)에는 여러 뜻이 있으며 사람에게도 여러 기질(機)이 있으니 [여러 방편을] 베풀어 설비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法者 一物也 人者 衆生也 法有不變隨緣之義 人有頓悟漸修之機 故不妨文字言語之施設也 此所謂官不容針 私通車馬者也 衆生雖曰圓成 生無慧目 甘受輪轉 故若非出世之金鎞 誰刮無明之厚膜也 至於越苦海而登樂岸者 皆由大悲之恩也 然則恒沙身命 難報萬一也 此廣擧新熏 感佛祖深恩 ◆王登寶殿 野老謳歌
⇒ ‘진리(法)’라는 것은 ‘한 물건’입니다. ‘사람’이란 ‘중생’입니다. [세계의] 실상에는 변하지 않는(不變: 본질적인, 본래적인) 이치(義)와 인연을 따르는(隨緣: 현상적인, 현실세계의)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단박에 깨치는(頓悟) 기질(機)과 오래 닦아야(漸修) [깨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와 언어[의 방편]을 베풀어 설비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이른바 ‘관(官)에서는(공적으로는) 바늘[만큼]도 용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수레와 말이 오간다’[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비록 [그 본성이] 완전히 이루어져있다고 하지만 [윤회의 세상에] 지혜의 눈(慧目)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윤회와 전변(輪轉)을 달게 받습니다. 그러하니 만약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와서 베푸는] [지혜의] 금칼(金鎞)이 없다면 어느 누가(誰) 근본적인 무지(無明)의 두꺼운 꺼풀을 깍아낼(刮) 수 있겠습니까! 고통의 바다(苦海)를 건너 즐거운 피안(樂岸)[의 세계]에 이르는 것은 모두 [부처와 조사의] 큰 자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한즉 갠지즈강(恒)의 모래[만큼 많은] 목숨과 온 몸(身命)으로도 [그 대자비의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훈습(新熏)을 널리 들어 보여 [부처와 조사의 대자비의] 깊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 왕이 보좌(寶殿)에 오르니 시골 노인들이 그 은덕을 칭송하네(謳歌)!
4. 개념에 묶이지 말라.
强立種種名字 或心 或佛 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
⇒ [일물에] 갖가지 이름(名)과 호칭(字)을 억지로 붙여서(强立) 혹은 마음(心)이라 하고 혹은 부처(佛)라 하고 혹은 중생(衆生)이라 하지만, 이름에 집착해서(守) [주객을 구별하는 분별심(分別心)에 기초한] 이해(解)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體)은 곧 [그 자체로] 옳습니다. 생각이 움직이면 곧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그러집니다.
一物上强立三名字者 敎之不得已也 不可守名生解者 亦禪之不得已也 一擡一搦 旋立旋破 皆法王法令之自在者也 此結上起下 論佛祖事體各別 九旱逢佳雨 他鄕見故人
⇒ ‘한 물건’에 굳이 세 가지 이름과 호칭을 붙이는 것은 부처가 가르치면서(敎)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바[의 방편]입니다. 이름에 집착하여 [분별심에 기초한] 이해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한 선(禪)의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바 [방편]입니다. [이처럼 교학의 가치를] 한 번 들어올리고 한 번 잡아 누르며, 순간에 세우고 순간에 깨뜨리는 것은 모두 부처(法王)의 가르침과 명령(法令)의 [거칠 것 없는] 자재로움(自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로는 묶고 아래로는 일으켜서(높은 기질의 중생의 방자함을 막고 낮은 기질의 중생을 [깨달음을 향하여] 마음을 내도록 하여) 부처와 조사의 [세상에] 드러남(事)과 본래 모습(體)이 각각 다른 것임을 논하는 것입니다.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나고 타향에서 고향사람(故人)을 만나네!
5. 선과 교의 정의
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爲敎門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
⇒ 석가모니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은 선의 뜻이 되었고 일평생(一代) 설법한 바의 것은 교학(敎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이라고 합니다.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一也 靈山會上擧拈花二也 雙樹下槨示雙趺三也 所謂迦葉別傳禪燈者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 所說五敎也 人天敎一也 小乘敎二也 大乘敎三也 頓敎四也 圓敎五也 所謂阿難流通敎海者此也 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 ◆不得放過 草裏橫身
⇒ 세 곳’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가섭에게 자신이] 앉은 자리의 반을 나누어 준 것이 첫 번째 [곳]이고, 영산의 모임(靈山會)에서 꽃을 집어 든 것이 둘째 [곳]이고 [석가모니가 입멸한] 쌍수(雙樹) 아래에서 [늦게 온 가섭에게] 관 [밖으로] 두 다리를 [내] 보인 것이 세 번째 [곳]입니다. 이른바 가섭에게 선의 등불을 따로이 전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일평생’이라는 것은 사십 구 년 동안 다섯 교문(敎)을 가르치신 바의 것입니다. 인간과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가르침(人天敎)이 첫째 [교문]이고,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小乘敎)이 둘째 [교문]이며, 다른 사람까지 깨닫게 하고자 하는 자비를 내는 것(大乘敎)은 셋째 [교문],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頓敎)은 넷째 [교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圓敎)이 다섯 째 [교문]입니다. 이른바 가섭이 가르침의 바다(敎海)를 세상에 널리 통용되도록(流通) 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한즉 선과 교(敎)의 근원(源)은 석가모니입니다. 선과 교가 갈라져 나온 것은 가섭과 아난입니다. 말없음(無言)으로써 말없음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有言)로써 말없음에 이르는 것은 교입니다. 또는 마음(心)은 선의 가르침(法)입니다. 말(語)은 교의 가르침입니다. 즉 [모든] 가르침(法)은 비록 한 맛(一味: 같은 것, 세존이라는 한 근원으로부터 나왔을지라도)일지라도 [선과 교 각각이 갖고 있는] 의견은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멉니다. 이것이 선과 교의 두 [깨달음으로의] 접근법(途)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 방자하거나 잘못하지 말라. 풀 속에 쓰러질라!
6. 말에 집착하지 말라. - 선의 우위성
是故若人 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麤言細語皆是敎外別傳禪旨
⇒ 이런 이유로 만약 사람이 입에서 [가르침을] 잃는다면(失之於口) 곧 꽃을 집는 것과 은은히 미소짓는 것은 모두 교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되고, [만약] 마음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면 곧 세상의 [불법을 전하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말(麤言)과 [부족한 말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말(細言)이 모두 교학 이외에 따로이 전한 선의 뜻이 됩니다.
法無名故 言不及也 法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 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鷰語 深談實相也 是故寶積禪師 聞哭聲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明禪敎深淺 ◆明珠在掌 弄去弄來
⇒ [세상의] 참된 모습(法)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言不及), 참된 모습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心)이 미칠 수 없습니다(心不及). 입에서 [세상의 참된 모습을] 헤아리려는(擬) 사람은 본래의 마음(本心王)을 잃게되며, 본래의 마음을 잃게되면 곧 석가모니가 꽃을 집고 가섭이 은은히 미소지은 것이 모두(盡) 진부한 말(盡落陳言)로 떨어져 마침내는 죽은 물건이 되고 맙니다. 마음에서 얻은 사람은 단지 길거리의 잡담도 잘 설해진 가르침의 요지(要)가 될 뿐 아니라 제비의 울음소리(鷰語)까지도(至於) [세상의] 참된 모습(實相)을 깊이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보적선사(寶積禪師)는 [상가집에서] 곡하는 소리를 듣고서 몸과 마음[의 진리]를 깨닫고 춤추었으며, 보수선사(寶壽禪師)는 주먹질하며 싸우는 것(諍拳)을 보고서 [인간의] 본래 참모습(面目)에 탁 트여 깨닫게(開豁) 되었으니 [바로] 이로써 입니다. 이는 선과 교의 깊고 얕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 밝은 구슬을 손에 가지고서 이리 저리 자유로이 노니는구나!
7.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얽매임 없는 자유
吾有一言 絶慮忘緣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 “내가 한 마디 말하겠다. ‘근심을 끊고 인연을 잊어 [작위적으로] 일[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앉아 있구나. 봄이 오니 바야흐로 풀이 푸르구나!’”
絶慮忘緣者 得之於心也 所謂閑道人也 於戱 其爲人也 本來無緣 本來無事 飢來卽食 困來卽眠 綠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摠不知 春來依舊 草自靑 此別歎一念廻光者 ◆將謂無人 賴有一箇
⇒ 근심을 끊고 인연[의 산란함]을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한가히 노니는 도인(閑道人)처럼 말입니다. 아! 그 사람됨이여! 본래 [어디에도] 얽힘(緣)이 없고 본래 [작위적으로] 일[하는 것]도 없어서(無事) 배고픔이 오면 곧 먹고 피곤하면 곧 잠듭니다. 맑은 물과 푸른 산에서 마음대로(任意) 노닐면서(逍遙) 어촌과 술집(酒肆)에 거침없이 자유롭게(自在)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냅니다. 시대(年代)와 나이(甲子)를 도무지(摠) 모릅니다. 옛날과 다름없이(依舊) 봄이 오면 풀이 바야흐로 푸르러집니다. 이는 한 생각(一念)이 일어나려(歎=欲)할 때를 판단하여 [마음의] 빛을 돌이켜 [원래의 본 모습을 보고자] 함입니다. ◆ 문득(將) 이르기를, 사람이 없나 [했더니] 때마침(賴) 한 사람이 있구나!
8.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
敎門惟傳一心法 禪門惟傳見性法
⇒ 교학적 방법(敎門)은 오로지 한 마음에 대한 [말과 글로 된] 가르침(法)을 전하며, 선 수행(禪門)은 오로지 본성을 보는 가르침을 전합니다.
心如鏡之體 性如鏡之光 性自淸淨 卽時豁然 還得本心 此秘重得意一念 ◆重重山與水 淸白舊家風
⇒ 마음(心)은 거울의 본체와 같고 존재의 성품(性)은 거울의 빛과 같습니다. 본성은 [그] 스스로 맑고 깨끗하기에 깨닫는 즉시(卽時豁然)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습니다. 이것이 한 생각(一念)이라는 뜻(意)을 얻는 것을 비밀스럽게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 첩첩이 쌓인 산과 물. 깨끗하고 맑은 옛 가풍(家風)이구나.
評曰心有二種 一本源心 二無明取相心也 性有二種 一本法性 二性相相對性也 故禪敎者同迷守名生解 或以淺爲深 或以深爲淺 遂爲觀行大病 故於此辨之
⇒ 평하여 말하자면,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본체적 측면의 마음(本源心)이고 둘째는 존재에 대한 무지(無明)로 [인해 대상의] 모습(相)을 취하는 마음입니다. 존재의 성품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원리적 [차원의] 성품(法性)이고 둘째는 본성과 형상(相)이 상대되는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차원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선과 교의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어 이름을 지키고 [잘못된] 이해를 내어서 혹 얕은 것으로서 깊은 것을 삼고 혹 깊은 것으로서 얕은 것을 삼으니 마침내 앎(觀)과 실천(行)에 있어 큰 병이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구별한 것입니다.
9.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근원을 바로 드러내는 간결한 가르침
然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地 理顯於心源
⇒ 그러나 모든 부처가 설한 경에서는 먼저 모든 현상세계(法)를 분별하고 후에 궁극적인 공(空)을 설합니다. 조사들이 보인 구절에서는 생각(意)의 자취를 끊고 마음의 근원(心源)에서 이치를 드러냅니다.
諸佛爲萬代依憑故 理須委示 祖師在卽時度說 故意使玄通 迹 祖師言迹也 意 學者意地也 ◆胡亂指注 臂不外曲
⇒ 모든 부처[의 가르침]들은 만대의 의지할 바가 되어서 모름지기 [존재의 실상의] 이치를 자세히 보였습니다. 조사들[의 가르침]은 [수행자로 하여금] 즉시에 깨닫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뜻이 현묘하게 통하게 합니다. 자취란 조사의 말의 자취이고 뜻이란 배우는 자의 마음입니다. ◆ 오랑캐 난리에 손가락으로 물을 대더라도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
10. 지적인 알음알이에 대한 비판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 모든 부처의 말한 것은 활(弓)이고 조사의 말한 것은 [활]줄(絃)입니다. 부처가 말한 막힘이 없는 가르침은 바야흐로 한 맛(一味)으로 돌아갑니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도 떨어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인 바 한 마음(一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는 용궁의 대장경(龍欌)에도 아직 없는 바의 것입니다.
說弓 曲也 說絃 直也 龍藏 龍宮之藏經也 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州答云 庭前栢樹子 此所謂格外禪旨也 ◆魚行水濁 鳥飛毛落
⇒ 활이라고 말한 것은 구부러진 것입니다. 줄이라고 말한 것은 곧은 것입니다. 용장이라는 것은 용궁의 대장경입니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 從諗, 778-897)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조주는 대답하여 이르기를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르는바 틀 밖의 선의 뜻입니다. ◆ 물고기가 지나가니 물이 탁하여지고 새가 나니 깃털이 떨어진다!
11. 교와 선의 비교 : 살 길 - 사교입선
故學者 先以如實言敎 委辨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始終 然後放下敎義 但將自心 現前一念 叅詳禪旨 則必有所得 所謂出身活路
⇒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먼저 참다운 말의 가르침으로써, 불변하고 인연에 따르는 두 뜻이 곧 자기 마음의 본성과 형상임과, 단박에 깨닫는 것과 점차로 닦아 나가는 두 수행법(門)이 곧 자기의 수행(行)의 처음과 끝임을 판별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가르침의 뜻(敎義)을 내려놓고서 다만 원래 가진 마음을 한 생각 앞에 드러내어 선의 뜻을 상세히 참구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번뇌의] 몸을 벗어나게 하는 살 길(活路)입니다.
上根大智 不在此限 中下根者 不可獵等也 敎義者 不變隨緣 頓悟漸修 有先有後 禪法者 一念中 不變隨緣 性相體用 元是一時 離卽離非 是卽非卽 故宗師據法離言 直指一念 見性成佛耳 放下敎義者 以此 ◆明歷歷時 雲藏深谷 深密密處 日照晴空
⇒ 높은 기질의 큰 지혜는 이 [교학적] 한계에 있지 않습니다. 보통이거나 낮은 기질의 사람은 [교학적 수행의] 등급을 뛰어넘어서는 안됩니다. 교는 불변함과 인연에 따름, 단박에 깨달음과 점차로 닦는 것에서 [무엇이] 먼저 있고 나중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선을 가르치는 것(禪法)은 한 생각 중에 불변함과 인연에 따름과 본성과 형상과 본체와 작용이 옳음을 떠나고 그릇됨을 떠나며 옳음도 긍정되고 그릇됨도 긍정되는 것이 본래는 [서로가] 곧 같은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사가 진리(法)를 들어 가르칠 때에 말에 의지하지 않고(離言) 한 생각을 직접 가리켜서(直指一念)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할뿐이니(見性成佛), 교학을 내려놓는다는 뜻은 [바로] 이로써입니다. ◆ 날 밝을 때에 구름이 깊은 계곡을 덮고 깊고 빽빽한 곳에 해가 맑은 하늘을 비춘다.
12. 활구의 중요성
大抵學者 須叅活句 莫叅死句
⇒ 대개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산 말(活句)을 참구하고 죽은 말(死句)을 참구하지 마십시오.
活句下薦得 堪與佛祖爲師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此下特擧活句 使自悟入 ◆要見臨濟 須是鐵漢
⇒ 산 말 아래에서 자리를 얻으면(薦得; 깨달음을 얻다) 부처와 조사와 마찬가지로(與, 더불어) 스승이 되는 것을 감당하고 죽은 말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도 끝내지 못합니다. 이에 특히 산 구절을 들어 가르쳐서 스스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 임제(臨濟 義玄, ?~867)를 보려면 모름지기 철의 사나이(鐵漢)가 되어야!
評曰 話頭有句意二門 叅句者 徑截門活句也 沒心路 沒語路 無摸索故也 叅意者 圓頓門死句也 有理路 有語路 有聞解思想故也
⇒ 평하여 말하자면, 화두에는 말(句)과 뜻(意)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참구한다는 것은 빠른 방법으로 산 말이니, 마음의 길을 빼앗고 말의 길을 빼앗어 더듬어 찾지(摸索, 지적이해) 않기 때문입니다. 뜻을 참구한다는 것은 원교와 돈교의 방법으로 죽은 구절이니, 이치의 길이 있고 말의 길이 있기에 들음, 이해, 생각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13. 화두 공부의 자세
凡本叅公案上 切心做工夫 如雞抱卵 如猫捕鼠 如飢思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 수행하는 사람이 본래 공안(公案, 화두)을 참구할 때에 간절한 마음(切心)으로 공부하기를 닭이 알을 품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며, 배고픔에 밥을 생각하듯이 하며, 목마름에 물을 생각하듯이 하고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는 것같이 하면 투철하게 알 수 있는 때(透徹之期)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祖師公案 有一千七白則 如狗子無佛性 庭前栢樹子 麻三斤 乾屎橛之流也 雞之抱卵 暖氣相續也 猫之捕鼠 心眼不動也 至於飢思食 渴思水 兒憶母 皆出於眞心 非做作底心 故云切也 參禪無此切心 能透徹者 無有是處
⇒ 조사의 공안에는 일 천 칠백 칙(則)이 있으니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뜰 앞의 잣나무’, ‘마 세 근(麻三斤)’, ‘마른 똥 막대기’ 같은 류(類) 들입니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따뜻한 기운이 서로 이어집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고 인위적으로 짓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절실하다(切) 합니다. 참선할 때에 이 절실한 마음이 없이 능히 투철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4. 참선의 세 가지 요소
叅禪須具三要 一有大信根 二有大憤志 三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
⇒ 참선에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큰 믿음의 근거(大信根)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깨달음을 이루려는] 큰 분투의 의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왜 내가 부처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큰 의문의 마음(大疑精)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그 하나라도 없으면(闕) 마치 [세 발] 솥의 다리를 [하나] 끊은 것과 같아 결국 버리는 그릇이 되고 맙니다.
佛云成佛者 信爲根本 永嘉云 修道者 先須立志 蒙山云 叅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 又云大疑之下 必有大悟
⇒ 부처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근본을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영가(永嘉 玄覺, 647-713)는 “수도자는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몽산(蒙山 德翁, 13C.)은 “참선하는 자가 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으니 곧 큰 병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 “큰 의심 아래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15. 일상에서 선에 전념하라 - 지적 이해에 얽매이지 말라
日用應緣處 只擧狗子無佛性話 擧來擧去 疑來疑去 覺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 放身命處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
⇒ 일상 생활 속에서 다만 ‘개에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어서 들고 가며 들고 오고(마음에 두고) 의심하여 오고 의심하여 감에 이해하는 길을 잃고 뜻의 길을 잃고 좋은 맛(滋味)을 잃어 깨달음을 얻어 마음(心頭)을 몰두하는 때가 곧 마땅히 사람이 몸과 목숨을 내버릴 곳이 됩니다.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 됩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此一字子 宗門之一關 亦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 亦是諸佛面目 亦是諸祖骨髓也 須透得此關然後 佛祖可期也 古人頌云 趙州露人劒 寒霜光燄燄 擬議問如何 分身作兩段
⇒ [한] 승려가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조주가 대답했습니다. “없다.” [‘없다’는] 이 한 글자는 종문(宗門)의 한 관문으로 역시 허다한 악한 지식과 악한 깨달음을 꺾는 무기(器仗)가 되며 역시 모든 부처의 본래 면목이 되고 역시 모든 조사들의 골수(骨髓: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름지기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간(透得) 다음에야 부처와 조사가 되는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은 [깨닫고서] 노래했습니다. “조주가 칼집에서 뺀 칼(露人劒)에 찬 서리 빛이 번득인다! 무엇인가(如何)를 주저하고 망설여(擬議) 묻는다면 몸이 나뉘어 두 동강나리!”
16. 바른 화두 들기 - 분별심이 없도록
話頭不得擧起處承當 不得思量卜度 又不得將迷待悟 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如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又尋常計較安排底 是識情 隨生死遷流底 是識情 怕怖慞惶底 是識情 今人不知是病 只管在裏許 頭出頭沒
⇒ 화두는 들어 일어나는 때(處)에 이해하려(承當)해서는 안되며 생각(思量)으로 헤아리려(卜度)해서도 안되며 또 어리석게(將迷)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생각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생각하면(就不可思量處思量: 생각할 수 있는 극단, 곧 생각의 막다른 곳에까지 이르면) 마음이 갈 바가 없는 것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곧 [우리의 생각이] 끊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평소에(尋常) 이리저리 비교하고(計較) 적절히 꾀어 맞춰 견주어보는 것(按排)도 곧 잘못된 생각(識情 : 망념 혹은 망상)이며 [존재의 참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도 곧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서 다만 [자신의 잘못된 견해] 안에 머물며 머리만 들락날락 합니다.
話頭有十種病 曰意根下卜度 曰揚眉瞬目處 타根 曰語路上作活計 曰文字中引證 曰擧起處承當 曰颺在無事匣裏 曰作有無會 曰作眞無會 曰作道理會 曰將迷待悟也 離此十種病者 但擧話時 畧抖擻精神 只疑是個甚麽
⇒ 화두[를 참구할 때 생기기 쉬운] 열 가지 병(病, 잘못된 습관)이 있으니, 생각(意根) 아래에서 헤아리는 것을 말하며,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 우물쭈물 하는 것을 말하고, 말로써 살 계획(活計)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문자 가운데에서 끌어 증명하려는 것(引證)을 말하고, [화두를] 들 때에 [그 뜻을]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방 안에 일없이 있는 것을 말하고 있고 없음을 이해하려하는 것을 말하며, ‘존재에는 참된 실상이 없다는 것(眞無)’을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고, 도리(道理)를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며, 미혹으로써 깨달음을 기다리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열 가지 잘못된 습관을 떠난 사람은 다만 화두를 들 때에 정신(精神)을 다스리고 분발하여 다만 ‘이 무엇인가’를 의심할 뿐입니다.
17. 바른 화두 들기 - 목숨을 다하라.
此事如蚊子上鐵牛 便不問如何若何 下觜不得處 棄命一攢 和身透入
⇒ 이 일(화두를 바로 참선하는 것)은 쇠로 만든 소 위에 앉은 모기가 어찌 어찌할 것인가 고쳐 묻지 않고(更不問如何若何: 즉, 다짜고짜) 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한 번 [정신을] 모아 [온] 몸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重結上意 使叅活句者 不得退屈 古云叅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 心路絶
⇒ 다시금 위의 뜻을 결말지으면 산 구절을 참구하는 자로 하여금 물러나거나 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고, 오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는 것(要窮心路絶)을 다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18. 바른 화두 들기 - 외곬으로 치우치지 말라.
工夫如調絃之法 緊緩得其中 勤則近執着 忘則落無明 惺惺歷歷 密密綿綿
⇒ [참선] 수행(工夫)은 [악기의] 줄을 고르는 원리(法)와 같아서 당김과 풀어짐이 적절함(中)을 얻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부지런하면 곧 집착에 가까워지며 [지나치게] 잊어 [소흘히 하면] 곧 근본적인 무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수행자의 정신 자세는] 또랑또랑하고 맑고 또렷하며 철두철미하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彈琴者曰 緩急得中然後 淸音普矣 工夫亦如此 急則動血囊 忘則入鬼窟 不徐不疾 妙在其中
⇒ 거문고를 타는 자가 말하기를 느림과 빠름의 적절함을 얻은 연후에야 맑은 소리가 널리 퍼진다고 합니다. [참선] 수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서두르면 즉 혈기(血囊)가 움직이게 되고 게으르면 즉 귀신의 소굴에 들어가게 되니,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그 가운데에 오묘함이 있습니다.
19. 바른 수행법 - 마음의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 마귀도 내 마음 작용의 소산이다.
工夫到行不知行 坐不知坐 當此之時 八萬四千魔軍 在六根門頭伺候 隨心生設 心若不起 爭如之何
⇒ 수행이 걸으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으면서도 앉는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면 마땅히 이 때가 팔만 사천의 마귀의 군대(魔軍)가 인간의 모든 감각과 의식(六根)의 출처(門頭)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음[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따라서 [그들도] 생겨나 펼쳐지는 때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마귀의 군대와] 다투겠습니까?
魔者 樂生死之鬼名也 八萬四千魔軍者 乃衆生八萬四千煩惱也 魔本無種 修行失念者 遂派其源也 衆生順其境故順之 道人逆其境故逆之 故云道高魔盛也 禪定中 或見孝子而斫股 或見猪子而把鼻者 亦自心起見 感此外魔也 心若不起 則種種伎倆 翻爲割水吹光也 古云壁隙風動 心隙魔侵
⇒ 마귀란 것은 생과 사[의 반복]을 즐기는 귀신의 이름입니다. 팔만 사천 마귀의 군대라는 것은 곧 중생의 [가진 바] 팔만 사천 가지의 번뇌입니다. 마귀는 본래 씨앗(種)이 없습니다. 수행자가 [본래의] 마음을 잃으면 따라서 그 [마귀의] 근원을 물결치게 합니다. 중생이 그[렇게 일어난 마귀의 군대라는 애욕과 집착의] 대상세계를 따르기 때문에 [생사의 순환고리를] 따르고,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그[렇게 일어난 마귀의 군대라는 애욕과 집착의] 대상세계를 거스르기 때문에 [생사의 순환고리도]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도](道)가 높으면 마귀도 번성한다”라고 했습니다. 선 수행(禪定)할 때에 누구는 효자를 보고서 허벅다리를 찍었다고 하며 누구는 돼지를 보고서 코를 잡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스로의 마음에[서] 견해가 일어나 감응한 것이 [바로] 이 밖의 마귀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가지가지의 재주(伎倆)는 도리어 물을 가르고 빛에다 바람을 부는 것(割水吹光)[과 같이 쓸모 없는 것]이 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벽의 틈으로는 바람이 들고 마음의 틈으로는 마귀가 침입한다 했습니다.
20. 조사가 전한 선의 가르침에는 분별심이 없다.
起心 是天魔 不起心 是陰魔 或起 或不起 是煩惱魔 然我正法中 本無如是事
⇒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하늘의 마귀(天魔)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어둠의 마귀(陰魔)이며 때로는 일어나고 때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번뇌마귀(煩惱魔)입니다. 그러나 나의 바른 진리(正法) 가운데에는 본래 이와 같은 일(事)은 없습니다(無, 일어나지 않습니다).
大抵忘機 是佛道 分別 是魔境 然魔境夢事 何勞辨詰
⇒ 대저 꾸민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忘機)이 부처의 길(佛道)이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분별하는 것은 마귀의 상태(魔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상태[조차]도 꿈속의 일(夢事, 실체가 없는 것)이니 어찌 판단하고 꾸짖는 것을 힘쓰겠습니까.
21. 살아있는 동안 부처는 못될지언정 노력해봐라.
工夫若打成一片 則縱今生透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惡業所牽
⇒ 수행하는 것(工夫)이 만약 쳐서 한 조각을 이루는 것(打成一片)이라면 곧 지금 생(今生)에서 비록 [진리를] 꿰뚫지는 못할지라도,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眼光落地之時, 죽을 때)에 악한 업(惡業)에 이끌리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業者無明也 禪者般若也 明闇不相敵 理固然也
⇒ 업(業)이라는 것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無明)[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선(禪)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般若, prajñā)[를 낳는 것]입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필적하지 못하니 이치(理)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22. 참선 수행인의 일상 도리
大抵叅禪者 還知四恩深厚麽 還知四大醜身 念念衰朽麽 還知人命在呼吸麽 生來値遇佛祖麽 及聞無上法 生希有心麽 不離僧堂守節麽 不與鄰單雜話麽 切忌鼓扇是非麽 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麽 對人接話時 無間斷麽 見聞覺知時 打成一片麽 返觀自己 捉敗佛祖麽 今生決定續佛慧命麽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麽 此一報身 定脫輪廻麽 當八風境 心不動麽 此是叅禪人日用中 點檢底道理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 참선하는 사람은 대저 네 가지 은혜(四恩)가 깊고 두터운가를 또한 압니까? 세계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四大)[로 이루어진] 추한 육신이 생각생각마다 쇠하고 썩어가는 것(衰朽: 늙어가는 것)임을 또한 압니까? 인간의 목숨이 호흡에 달려있다는 것을 또한 압니까? 살아오면서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만났습니까? 그리고 최고의 가르침을 들어서 아주 기쁜 마음(希有心: 일어남이 드문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압니까? 절간을 떠나지 않고 수절(守節)했습니까? 주위 사람들(鄰單)에게 잡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절대적으로 선동(鼓扇)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是非)을 피했습니까? 화두가 하루 종일(十二時中) 뚜렷하여(明明) 어둡지 않았습니까(不昧)? 사람을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화두 잡음이] 끊어진 적은 없습니까? [무언가를]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 [잡생각들을] 두드려서 한 조각[의 마음]으로 [집중되도록] 만들었습니까? 자기자신(自己)을 돌아봐 관조(觀)하여 부처와 조사를 패퇴시켰습니까? 지금 생에서 부처의 지혜(慧命)를 이어받고자 [굳게] 결단(決定)하였습니까? 일어서거나 앉거나 편안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돌이켜 생각합니까? 이 한 [진리의] 능력(報身)이 정녕 윤회를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사람을 흔들리게 하는] 온갖 대상과 환경(境)에 당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이 평상시에(日用中) 점검해야 할 도리입니다. 옛 사람이 “이 몸이 이 생에서 깨달음(度)을 내지(生) 못한다면 어느 생에서 다시금 이 몸에 깨달음을 낼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四恩者 父母君師施主恩也 四大醜身者 父之精一滴 母之血一滴者 水大之濕也 精爲骨 血爲皮者 地大之堅也 精血一塊 不腐不爛者 火大之暖也 鼻孔先成 通出入息者 風大之動也 阿難曰 欲氣麤濁 腥臊交遘 此所以醜身也 念念衰?者 頭上光陰 刹那不停 面自皺而髮自白 如云今旣不如昔 後當不如今 此無常之體也 然無常之鬼 以殺爲戱 實念念可畏也 呼者 出息之火也 吸者 入息之風也 人命寄托 只在出入息也 八風者 順逆二境也 地獄苦者 人間六十劫 泥犂一晝夜 鑊湯爐炭劒樹刀山之苦 口不可形言也 人身難得 甚於海中之鍼故 於此愍而警之
⇒ ‘네 가지 은혜(四恩)’라는 것은 부모와 임금과 스승과 보시를 베푼 자(施主)의 은혜입니다. ‘세계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추한 육신(四大醜身)’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정액(精)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血) 한 방울[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이니 [이것은 육신의] 물의 요소(水大)의 ‘습함(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액이 뼈(骨)가 되고 피가 가죽(皮)이 되었다는 것은 땅의 요소(地大)의 ‘견고함(堅)’[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액과 피가 [만나 뭉친] 한 덩어리가 썩지도 않고 허물어지지도 않[고 태아로 자라난다]는 것은 불의 요소(火大)의 ‘따뜻함(暖)’[을 말하는 것]입니다. 콧구멍이 먼저 생겨서 들고 나는 숨이 통하게 하는 것은 바람의 요소(風大)의 ‘움직임(動)’[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난(阿難)은 “[육신은] 거칠고 탁한 정욕의 기운이 비리고 노린내 나는 [더러운 것]과 서로 [만나] 도랑을 이룬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더러운 육신’[이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생각 생각마다 쇠하고 썩어간다’는 것은 머리 위[로 흘러가는] 세월(光陰)이 한 순간(刹那)이라도 머물지 않고 얼굴은 스스로 주름살[이 늘어가고] 머리털도 스스로 희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옛날과 같지 않으니 후에는 당연히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 무상(無常)한 육신입니다. 그러나 무상한 귀신(無常之鬼)[인 육신]은 [그 육신을] 죽이는 것으로써 놀이(戱)를 삼으니 생각 생각마다(念念, 늘) 두려운 것입니다. ‘내쉰다(呼)’는 것은 숨을 내보내는 불[의 요소]이고 ‘들이쉰다(吸)’는 것은 숨을 들여보내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인간 수명은 단지 숨이 들고 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여덟 바람(八風)’이라는 것은 [인간이 처하는] 좋은 [환경과] 좋지 않은 [환경] 두 가지의 환경(境)입니다.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의 육십 겁[의 무한히 긴 시간]이 지옥(泥犁)의 하루 낮과 밤이니, [지옥에서 받는] 끓는 큰 솥(鑊湯)과 숯불 화로(爐炭)[의 고통과] 칼로 된 숲과 칼[로 가득 찬] 산에서의 고통을 입으로는 표현(形言)할 수 없습니다. [다음 생에 날 때] 사람의 몸을 얻기가 어려운 것이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 [보다 어렵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愍, 안타까이) 여겨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評曰上來法語 如人飮水 冷暖自知 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苦輪 各須察念 勿以自謾
⇒ 평하여 말하자면, 위에 나온 가르침의 말들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차가움과 따뜻함을 스스로(自, 자연스럽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총명함으로는 업을 다 상대할(敵) 수 없고 마른 지혜로도 고통스런 윤회를 피할 수 없습니다. 각자 반드시 생각을 살펴서 스스로 [총명과 지혜로 고통을 벗을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23. 언행일치 - 말 공부만 하지 말라.
學語之輩 說時似悟 對境還迷 所謂言行 相違者也
⇒ 말(語, 교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달은 것 같으나 대상과 환경(境)을 대하게 되면 다시금 미혹되니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此結上自謾之意 言行相違 虛實可辨
⇒ 이것은 위의 ‘스스로 자만하다(自謾)’는 [것의] 뜻을 맺은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니 거짓됨(虛)과 참됨(實)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24. 분별심을 깨뜨리라.
若欲敵生死 須得這一念子 爆地一破 方了得生死
⇒ 만약 나고 죽음[의 문제]와 맞대결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한 생각(一念, 분별심)이라는 놈을 탁 소리나도록 단번에 깨뜨려야만 바야흐로 나고 죽음[의 뜻]을 깨달아 얻게 됩니다.
爆 打破漆桶聲 打破漆桶然後 生死可敵也 諸佛因地法行者 只此而已
⇒ ‘탁(爆)’은 칠통(漆桶)을 깨부수는(打破) 소리이고 칠통을 깨부순 후에야 나고 죽는 [문제를] 대적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부처가 수행 단계(因地)에서 가르침에 [따라] 행한 것은 단지 이것일 뿐입니다.
25. 선맥禪脈의 전통을 잇는 깨달음의 확증이 필요하다.
然一念子 爆地一破然後 須訪明師 決擇正眼
⇒ 그러나 ‘한 생각이란 놈(一念子, 분별심)’을 탁 소리나도록 단 번에 깨트린 후에는 반드시 [진리에] 밝은 선사(師)를 찾아가서 올바른 [지혜에 대한] 눈(正眼)을 가진 것인지 결정 받아야 합니다.
此事極不容易 須生慚愧始得 道如大海 轉入轉深 愼勿得少爲足 悟後若不見人 則醍醐上味 翻成毒藥
⇒ 이 일은 매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공부할 때는 자신의 경지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慚愧)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道)는 큰 바다와 같아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가기까지는] 점차 들어가게 되며 점차로 깊어지니 삼가 적은 것(少, 적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깨달은 후에 만약 선사(人)를 만나 [깨달음을 확증받]지 못하면 버터 위에 생긴 맛좋은 액체보다 뛰어난 맛(醍醐上味)[을 가진 것]도 도리어 독약(毒藥)이 되어버립니다(成).
26. 행위보다도, 무엇보다 깨달음이 먼저다.
古德云 只貴子眼正 不貴汝行履處
⇒ 옛 위인(古德)은 “다만 그대(貴子)의 바른 눈(正眼,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요 그대(汝)의 행위와 [그] 결과(行履處)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네”라고 했습니다.
昔仰山荅潙山問云 涅槃經四十券 緫是魔說 此仰山之正眼也 仰山又問行履處 潙山答曰 只貴子眼正云云 此所以先開正眼而後 說行履也 故云若欲修行 先修頓悟
⇒ 옛날에 앙산(仰山 慧寂, 840-916) 선사가 위산(潙山 靈祐, 771-853) 선사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열반경涅槃經』 사십 권은 모두 마귀의 설교일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앙산[이 가진]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正眼)입니다. 앙산이 또 행위와 [그] 결과(行履處)에 대해 질문하니 위산은 “단지 그대의 [진리에 대한] 눈(眼이, 견해) 바른 것만을 귀히 여길 뿐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먼저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열고 [그] 후에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만약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단박에 깨닫는 것을 수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27.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
願諸道者 深信自心 不自屈 不自高
⇒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道者)은 자기 마음(自心)을 깊이 믿어서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말되 스스로 자만해져서도 안됩니다.
此心平等 本無凡聖 然約人 有迷悟凡聖也 因師激發 忽悟眞我 與佛無殊者 頓也 此所以不自屈 如云本來無一物也 因悟斷習 轉凡成聖者 漸也 此所以不自高 如云時時勤拂拭也 屈者 敎學者病也 高者 禪學者病也 敎學者 不信禪門 有悟入之秘訣 深滯權敎 別執眞妄 不修觀行 數他珎寶故 自生退屈也 禪學者 不信敎門有修斷之正路 染習雖起 不生慚愧 果級雖初 多有法慢故 發言過高也 是故得意修心者 不自屈 不自高也
⇒ 이 ‘마음’은 본래 평등하고 보통 사람(凡)과 성인(聖)[의 구분]이 본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미혹됨(迷)과 깨달음(悟), 보통사람과 성인[의 구분]이 있게 됩니다. 선사(師)의 격려와 가르침(激發)으로 인하여 [어느 순간] 홀연히 참된 내(眞我)가 부처와 더불어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단박(頓)[의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비굴해지지 말라’는 [것의] 이유이니 “본래 한 물건(一物)은 없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으로 인하여 잘못된 습관(習)을 끊게 되고 보통 사람을 바꾸어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이 ‘점진적(漸)[인 수행]’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의] 이유이니 “때마다 부지런히 [잘못된 습관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비굴해진다(屈)’는 것은 교(敎)를 배우는 사람들의 병이고 ‘자만한다(高)’는 것은 선 수행을 하는 자들의 병입니다. 교를 배우는 사람은 선 수행의 방법(禪門)에 깨달음에 들어가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방편(權)인 교학에 깊이 정체되어(滯, 막혀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의 구분에] 특별히 집착하며 참선 수행을 닦지 않습니다. 남의 보배(他珎寶)만 헤아리고(數) 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서고 비굴해지는 것을 내는 것입니다. 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교학을 통한 방법(敎門)에 [잘못된 생각을] 닦아서 끊어버리는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비록 더러운 습관이 일어날지라도 참회(慚悔)[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므로 [선 수행의] 결과의 정도가 비록 초보라 할지라도 가르침에 대한 자만함(法慢, 잘 모름에도 자만함)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거만한 말을 하는(發言)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을 닦을(修心) 뜻을 얻는(得意, 결심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말아야 하며 스스로 자만해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評曰不自屈不自高者 略擧初心因該果海 則雖信之一位也 廣擧菩薩果徹因源 則五十五位也
⇒ 평하여 말하자면, ‘비굴해지지 말되 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라는 것은, 간략하게 들[어 말하자]면 [깨달음을 향한] 첫 마음이라는 원인(因)에 결과(果海)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 곧 수행의 제일 첫 단계(一位)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크게 들[어 말하]자면 보살이라는 수행의 결과(菩薩果)는 수행의 원인이 되는 근거들(因源)을 완전히 이루어야 [얻어진다는 것], 곧 수행의 가장 마지막 단계(五十五位)[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28. 깨달음과 수행은 함께 가야 한다.
迷心修道 但助無明
⇒ 미혹된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자] 수행하면 단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만 조장할 뿐입니다.
悟若未徹 修豈稱眞哉 悟修之義 如膏明相賴 目足相資
⇒ 깨달음이 만약 투철하지 못하다면 수행하는 것이 어찌 참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과 닦음의 뜻(悟修之義)은 기름과 밝음이 서로 의뢰하고(膏明相賴)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目足相資)[과 같습니다].
29. 깨달음은 다가가기 어려운 특별한 것이 아니다.
修行之要 但盡凡情 別無聖解
⇒ 수행의 핵심은 단지 보통사람의 분별심과 감정들(凡情)을 사라지게 하는 것(盡)이지 성인의 지혜(聖解)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病盡藥除 還是本人
⇒ 병이 다하면 약도 제거해야 곧 본래의 사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30. 이분법적인 인식을 버리라.
不用捨衆生心 但莫染汚自性 求正法 是邪
⇒ 중생의 [평범한] 마음(衆生心)을 버리거나 사용할 것이 아니라 단지 본래의 성품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른 가르침(正法)’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捨者求者 皆是染汚也
⇒ 버린다는 것, 추구한다는 것 모두 더러움입니다.
31. 이분법적인 인식이 생겨나지 않게 하라.
斷煩惱 名二乘 煩惱不生 名大涅槃
⇒ 번뇌를 끊는 것을 이름하여 이승(二乘)[의 수행]이라 하고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진정한 열반(大涅槃)이라고 합니다.
斷者 能所也 不生者 無能所也
⇒ ‘끊는다(斷)’는 것은 주관(能)과 객관(所)이 [남아있는 것이]고 ‘생겨나지 않는다(不生)’는 것은 주관과 객관도 없는 것입니다.
32. 마음의 본 모습이 곧 깨달음이다.
須虛懷自照 信一念緣起無生
⇒ 모름지기 [마음속에] 품고있는 [이분법적 생각]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보아(自照, 내적 성찰) [욕망과 생각, 그리고 행동의] 인과 관계(緣) 없이 생겨나는 한 생각(一念)[이 내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此單明性起
⇒ 이것은 단지 [본연의 자유자재한] 성품이 [어떠한 욕망과 의도에 이끌림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일어나는 것(性起)을 밝힌 것입니다.
33. 인간의 모든 악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諦觀殺盜淫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 죽임(殺)과 도둑질(盜)과 음란함(淫)과 거짓됨(妄이) 모두 한 마음(一心)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살펴보십시오. 이 곳(當處: 한 마음)이 곧 [비어] 고요한데(寂) 모름지기 무엇을 고쳐 끊을 것입니까!
此雙明性相
⇒ 이것은 본체(體)와 현상(相)의 둘(雙)을 밝힌 것입니다.
經云不起一念 名爲永斷無明 又云念起卽覺
⇒ 경전에 이르기를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근본적인 무지(無明)를 영원히 끊는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그 생각이 근본적인 무지로부터 말미암음을]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34. 만물의 헛됨을 깨닫는 단박의 깨달음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 [세상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아 곧 [그 환상을 일으키는 망념을] 떠나면 방편을 짓지 않습니다(더 이상 방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환상을 떠나면 곧 깨달으니 또한 점차로 [수행]할 것이(필요가) 없습니다.
心爲幻師也 身爲幻城也 世界幻衣也 名相幻食也 至於起心動念 言妄言眞 無非幻也 又無始幻無明 皆從覺心生 幻幻如空花幻滅 名不動 故夢瘡求醫者 寤來無方便 知幻者 亦如是
⇒ 마음(心)은 마술사(幻師)이고 몸(身)은 환상의 성(幻城)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幻衣)이고 이름(名)과 형상(相)은 환상의 음식(食)이니,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과 거짓이라 말하고 참이라 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환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시작이 없는 환상인 근본적인 무지(無明)는 모두 깨달은 마음(覺心)을 따라 생겨나니, 모든 환상(幻幻)은 허공의 꽃(空花)과 같으므로 환상이 사라진 것을 이름하여 부동[의 경지](不動)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꿈에 부스럼이 난 자가 의사를 찾는(夢瘡求醫) 것이 잠이 깨고 나니(寤來) 방편(方便: 의사)이 [필요]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임]을 안다는 것은 또한 이와 같습니다.
35. 구분 짓지 말라. 생사와 열반도...
衆生於無生中 妄見生死涅槃 如見空花起滅
⇒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에서 나고 죽음과 열반을 망령되게 보는 것은 허공의 꽃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性本無生故 無生 涅也 空本無花故 無起 滅也 見生死者 如見空花起也 見涅槃者 如見空花滅也 然起本無起 滅本無滅 於此二見 不用窮詰 是故思益經云 諸佛出世 非爲度衆生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
⇒ 본성은 본래 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것과 [죽는 것, 그리고] 열반[의 구분]이 없습니다. 공(空)에는 본래 꽃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起)과 사라짐(滅)[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는 것과 죽는 것을 보는 것(見, 분별적인 견해를 갖고 보는 것)은 허공의 꽃이 생겨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을 보는 것(見)은 허공의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어남은 본래 일어남이 없고 사라짐은 본래 사라짐이 없습니다. 이 두 견해를 끝까지 캐어묻는 것(窮詰)은 쓸모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익경思益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온 것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度)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고 죽음과 열반의 두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중생이] 깨닫게 하기 위한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6. 구분 짓지 말라. 중생과 보살도...
菩薩度衆生入滅度 又實無衆生得滅度
⇒ 보살(菩薩)은 중생을 깨닫게 하여 열반(滅度)에 들어가게 하지만 사실은 깨달음을 얻어야할 중생도 없는 것입니다.
菩薩只以念念 爲衆生也 了念體空者 度衆生也 念旣空寂者 實無衆生得滅度也 此上論信解
⇒ 보살은 단지 [그의] 모든 생각(念念)으로써 중생을 위합니다. 생각의 본체가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미 공적(空寂)하다는 것은 사실 깨달음을 얻어야 할 중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위는 믿음(信)과 깨달음(解)을 논한 것입니다.
37. 깨달음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실천적 수행
理雖頓悟 事非頓除
⇒ [존재의 참된 실상에 대한] 이치는 단박에 깨달아질(解) 수 있을지라도 잘못된 행위(事)는 단박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文殊達天眞 普賢明緣起 解似電光 行同窮子 此下論修證
⇒ 문수(文殊) 보살은 하늘의 진리(天眞: 존재의 실상)에 이르렀고 보현(普賢) 보살은 [만물이] 서로 잇대어 일어나는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깨달음은 번개 빛과 유사하며 수행은 곤궁한 아이(窮子, 갓난 어린애)와 같습니다. 이 아래는 수행(修)과 깨달음의 완성(證)을 논했습니다.
38. 계율을 지키며 선 수행하라.
帶婬修禪 如蒸沙作飯 帶殺修禪 如塞耳叫聲 帶偸修禪 如漏巵求滿 帶妄修禪 如刻糞爲香 縱有多智 皆成魔道
⇒ 음란함을 띠고서(帶: 갖고서) 선을 수행하는 것은 모래를 찌어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죽임을 갖고서(帶) 선을 수행하는 것은 막힌 귀에 소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탐냄(偸)을 갖고서 선 수행하는 것은 새는 잔이 가득 차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거짓됨을 갖고 선 수행하는 것은 분뇨를 깎아서 향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설사 많은 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모두 악마의 길(魔道)을 이루는 것입니다.
此明修行軌則 三無漏學也 小乘禀法爲戒 粗治其末 大乘攝心爲戒 細絶其本 然則法戒無身犯 心戒無思犯也 淫者 斷淸淨 殺者 斷慈悲 盜者 斷福德 妄者 斷眞實也 能成智 縱得六神通 如不斷殺盜婬妄則必落魔道 永失菩提正路矣 此四戒 百戒之根故 別明之 使無思犯也 無憶曰戒 無念曰定 莫妄曰慧 又戒爲捉賊 定爲縛賊 慧爲殺賊 又戒器完固 定水澄淸 慧月方現 此三學者 實爲萬法之源故 特明之 使無諸漏也
⇒ 이는 수행의 법칙인 세 가지 새는 것 없는 배움(三無漏學)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소승(小乘)[의 사람들/가르침]은 [부처의] 가르침(法)을 받아서 계율로 삼으니 그 끝을 대강 다스립니다. 대승(大乘)[의 사람들/가르침]은 마음(心)을 잡아 계율로 삼으니 그 근본을 세밀하게 끊습니다. 그러한 즉 가르침의 계율(法戒)에는 몸으로 범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계율에는 생각으로 범하는 것이 없습니다. 음란한 것은 말고 깨끗함을 끊습니다. 죽이는 것은 자비로움을 끊습니다. 도둑질하는 것은 복과 그 덕(福德: 일체의 선행과 그 선행에 의해 얻는 행복과 이익)을 끊습니다. 거짓된 것은 참된 열매를 끊습니다. 지혜를 능히 이루어 가령 여섯 가지 신통력(六神通)을 얻는다 할지라도 만약 죽이는 것과 도둑질과 음란함과 거짓됨을 끊지 못한다면 곧 반드시 악마의 길로 떨어져서 영원히 깨달음의 바른 길을 잃어버립니다. 이 네 가지 계율은 모든 계율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를] 별도로 명확히 하는 것은 생각으로[라도] 범하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억함(憶, 마음에 계속 품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을 일러 계율(戒)이라고 하며 생각(念)이 없는 것을 일러 선정(定)이라고 하고 거짓되지 않는 것을 일러 지혜(慧)라고 합니다. 또 계율은 도적을 잡는 것이며 선정은 [그] 도적을 포박하는 것이며 지혜는 [그] 도적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 계율의 그릇이 온전하고(完) 견고(固)해야 [그 곳에 고인] 선정의 물이 맑고 깨끗하게 되어 지혜의 달(慧月)[의 바른 모습]이 바야흐로 드러납니다. 이 세 가지 배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명확히 하여 모든 새어남(漏: 완전한 지혜로부터 부족한 것, 또는 번뇌)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靈山會上 豈有無行佛 少林門下 豈有妄語祖
⇒ 영산(靈山)의 모임에 어찌 [수]행(行)하지 않는 부처가 있겠으며 소림(小林)의 문중에 어찌 거짓된 말[을 하는] 조사가 있겠습니까.
39.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은 모든 허물의 근원
無德之人 不依佛戒 不護三業 放逸懈怠 輕慢他人 較量是非 而爲根本
⇒ 덕이 없는 사람(無德之人)은 부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몸과 말과 마음이 짓는 선한] 세 가지의 업(三業)을 지키려 하지 않으며 제 멋대로 방자하게 행하고 게으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많고 적음을 비교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一破心戒 百過俱生
⇒ 마음의 계율을 한 번 깨트리면 모든 허물이 함께 생겨납니다.
評曰如此魔徒 末法熾盛 惱亂正法 學者詳之
⇒ 평하여 말하자면, 이와 같은 악마의 무리가 말법(末法) 시대에 세력이 강대하고 왕성하니(熾盛) 배우는 자는 번뇌와 참된 진리(正法)를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40.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다.
若不持戒 尙不得疥癩野干之身 況淸淨菩提果 可冀乎
⇒ 만약 계율을 지니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음 생에] 비루병 걸린 여우의 몸[조차]도 얻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맑고 고요한 깨달음이란 열매(淸淨菩提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重戒如佛 佛常在焉 須草繫鵝珠 以爲先噵
⇒ 계율을 부처와 같이 중히 여기면 부처가 늘 [그 수행자의 곁에 함께] 있습니다. 모름지기 풀을 매는 것과 구슬 [먹은] 거위[의 이야기]로 길잡이를 삼아야 합니다.
41. 욕망을 끊어라.
欲脫生死 先斷貪欲及諸愛渴
⇒ 생과 사[의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貪欲)과 모든 애욕의 목마름(愛渴)을 끊어야 합니다.
愛爲輪廻之本 欲爲受生之緣 佛云婬心不除 塵不可出 又云恩愛一縛着 牽人入罪門 渴者 情愛之至切也
⇒ 애욕(愛)은 [생사의 세계에서의]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고, 탐욕(欲)은 [또 다시] 생명(生)을 받는 조건(緣)이 됩니다. 부처는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사번뇌(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가족 사이의 애정(恩愛)[일지라도 그것]에 한번 묶여버리면 사람을 끌어 죄를 범하는 근원(罪門)에 들어가게 하고 [애욕의] 목마름(渴)이란 것은 정욕과 애욕(情愛)이 간절한 [상태]이다”라고 했습니다.
42. 선정 수행의 중요성
無碍淸淨慧 皆因禪定生
⇒ 막힘 없으며 맑고 깨끗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 [수행]으로부터 생겨납니다.
超凡入聖 坐脫立亡者 皆禪定之力也 故云欲求聖道 離此無路
⇒ 범부[의 경지]를 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서 앉아서 [육신을] 벗고 서서 [육신을] 잃어버리는 것(坐脫立亡)[이 가능한 것]은 모두 선정의 힘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聖道)를 구하고자 하려면, 이것(선정의 수행)을 떠나서는 길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43. 존재의 실상을 알게 하는 지혜인 선정
心在定 則能知世間生滅諸相
⇒ 마음이 선정 [수행 중]에 있으면 곧 세상의 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相)을 알 수 있습니다.
虛隙日光 纖埃擾擾 淸潭水底 影像昭昭
⇒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허공[을 비추이면] 가는 티끌의 어지러운 움직임[이 드러나고] 맑은 연못 물[에 비치는 사물]의 영상이 밝게 빛납니다.
44. 깨달음의 확증인 참된 지혜
見境心不起 名不生 不生名無念 無念名解脫
⇒ 대상세계(境)를 보고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생겨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생겨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다(無念)’고 이름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이름합니다.
戒也 定也 慧也 擧一具三 不是單相
⇒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는 [각각이] 하나를 들어서 셋을 [함께] 갖추니 [이것들은 모두 깨달음에 있어서] 홀로 떨어진 별개의 모습[을 갖는 것](單相)이 아닙니다.
45. 존재에 대한 바른 앎, 그것이 열반이다.
修道證滅 是亦非眞也 心法本寂 乃眞滅也 故曰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 도를 닦아서 [모든 잘못된 생각을] 깨달음(滅) 확증한다(證)는 것도 또한 참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체(心法)의 본래 공적(寂)함이 곧 참된 깨달음(眞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法)은 본래 항상 스스로 열반의 모습(寂滅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眼不自見 見眼者妄也 故妙首思量 淨名杜黙 此下散擧細行
⇒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으니 [스스로의] 눈을 본다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 보살(妙首)은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유마 거사(淨名)가 침묵으로 막아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래에서는 세부적인 수행(行)을 갖가지로 들어 보이려고 합니다.
46. 계율의 첫째 덕목 - 베품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면 처지(分)에 따라서 베풀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과] 몸을 같이 하는 큰 자비(同體大悲)가 곧 참된 베품(布施)입니다.
自他爲一曰同體 空手來 空手去 吾家活計
⇒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몸을 같이 한다(同體)’고 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삶(吾家)의 살아가는 방식(活計)인 것입니다.
47. 계율의 둘째 덕목 - 참음
有人來害 當自攝心 勿生嗔恨 一念嗔心起 百萬障門開
⇒ 어떤 사람이 와서 해롭게 하거든 마땅히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攝心) 성냄(嗔)이나 원한(恨)이 생겨나지 않게 하십시오. 한 생각 성내는 마음(一念嗔心)이 일어나게 되면 모든 [깨달음을 막는] 장애[들이 튀어나오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煩惱雖無量 嗔慢爲甚 涅槃云 塗割兩無心 嗔如冷雲中 霹靂起火來
⇒ 번뇌(煩惱)가 비록 무한히 많다지만 성내고 거만한 [마음을 품는] 것이 [그보다 더] 깊은 것(甚, 제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은 “남이 나에게 잘하든(塗) 못하든(割) 양자의 경우 [모두]에도 [어떠한] 마음도 내지 말라. 성냄은 흰 구름(冷雲) 속에서 벼락(霹靂)이 쳐서(起) 불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48. 참음의 중요성
若無忍行 萬行不成
⇒ 만약 참음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수행(萬行)을 이루지 못합니다.
行門雖無量 慈忍爲根源 忍心如幻夢 辱境若龜毛
⇒ 수행의 방법(行門)이 비록 셀 수 없이 많지만 자비와 참음이 근본이 됩니다. [그렇지만] 참는 마음(忍心)도 헛된 꿈이고 치욕[을 주는] 대상(辱境)도 거북이의 털(龜毛)과 같습니다.
49. 수행에 정진하라.
守本眞心 第一精進
⇒ 본래의 참된 마음을 [깨끗이] 지키는 것이 제일가는 정진(精進)입니다.
若起精進心 是妄 非精進 故云莫妄想莫妄想 懈怠者 常常望後 是自棄人也
⇒ 만약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도] 곧 잘못된 생각이고 [참된] 정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은 항상 과거[만]을 추억합니다. 이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50. 묵은 업을 제거하기 위해 진언을 외우라.
持呪者 現業易制 自行可違 宿業難除 必借神力
⇒ 진언(呪)을 지니는 것(持, 외우는 것)은, 현재의 업은 쉽게 제어할 수 있어서 스스로의 수행(行)으로 고칠 수 있지만 묵은 업(宿業, 지난 생의 업)은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신령한 힘(神力)을 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摩登得果 信不誣矣 故不持神呪 遠離魔事者 無有是處
⇒ 가장 낮은 신분(摩登)[의 어떤 사람이 진언의 도움을 얻어 깨달음의]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진언을 지니지 않고서 마귀의 일을 멀리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51. 참된 예배 - 나의 참된 본성에 예배하는 것
禮拜者 敬也 伏也 恭敬眞性 屈伏無明
⇒ 예배라는 것은 공경(敬)하는 것이고 굴복(伏)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참된 본성(眞性)을 공경하고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無明)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身口意淸淨 則佛出世
⇒ 행동(身)과 말(口)과 뜻(意)이 깨끗하면 곧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52. 진정한 마음으로 하는 염불이 참된 염불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입에 있으면(在口, 입으로만 하면) 외우는 것(誦)이고 마음에 있[을때](在心, 마음으로 하면) ‘마음에 두는(念)’ 것입니다. 헛되이 외우기만 해서 ‘마음에 두는 것(念)’을 잃으면 깨달음(道)에 유익이 없습니다.
阿彌陁佛六字法門 定出輪廻之捷徑也 心則緣佛境界 億持不忘 口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名曰念佛
⇒ 아미타 부처(阿彌陀佛)의 여섯 자로 된 진리에의 방법(六字法門)은 반드시(定)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捷徑)입니다. 마음은 곧 부처의 경지를 따라서 마음에 품고 지니고 잊지 말[아야 하]고, 입은 곧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분명하고 혼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을 이름하여 ‘염불’이라고 합니다.
評曰五祖云 守本眞心 勝念十方諸佛 六祖云 常念*他佛 不免生死 守我本心 則到彼岸 又云佛向性中作 莫向身外求 又云迷人念佛求生 悟人自淨其心 又云大抵衆生 悟心自度 佛不能度衆生云云 如上諸德 直指本心 別無方便方將一法 便逗諸根 理實如是 然迹門實有極樂世界 阿彌陀佛 有四十八大願 凡念十聲者 承此願力 往生蓮胎 徑脫輪廻 三世諸佛 異口同音 十方菩薩 同願往生 又況古今往生之人 傳記昭昭 願諸行者 愼勿錯認 勉之勉之
梵語阿彌陀 此云無量壽 亦云無量光 十方三世 第一佛號也 因名法藏比丘 對世自在王佛 發四十八願云 我作佛時 十方無央數世界 諸天人民 以至蜎飛蝡動之流 念我名十聲者 必生我刹中 不得是願 終不成佛云云 先聖云 唱佛一聲 天魔喪膽 名除鬼簿 蓮出金池 又懺法云 自力*他力 一遲一速 欲越海者 種樹作船 遲也 比自力也 借船越海 速也 比佛力也 又曰世間稚兒 迫於水火 高聲大叫 則父母聞之 急走救援 如人臨命終時 高聲念佛 則佛具神通 決定來迎爾 是故大聖慈悲 勝於父母也 衆生生死 甚於水火也 有人云 自心淨土 淨土不可生 自性彌陀 彌陀不可見 此言似是而非也 彼佛無貪無嗔 我亦無貪嗔乎 彼佛變地獄 作蓮花 易於反掌 我則以業力 常恐自墮於地獄 況變作蓮花乎 彼佛觀無量盡世界 如在目前 我則隔壁事 猶不知 況見十方世界 如目前乎 是故人人 性則雖佛 而行則衆生 論其相用 天地懸隔 圭峰云 設實頓悟 終須漸行 誠哉是言也 然卽寄語自性彌陀者 豈有天生釋迦自然彌陀耶 須自忖量 人豈不自知 臨命終時 生死苦際 定得自在否 若不如是 莫以一時貢高 却致永劫沉墮 又馬鳴龍樹 悉是祖師 皆明垂言敎 深權往生 我何人哉 不欲往生 又佛自云 西方去此遠矣 十萬十惡八千八邪 此爲鈍根說相也 又云西方去此不遠 卽心衆生是佛彌陀 此爲利根說性也 敎有權實 語有顯密 若解行相應者 遠近俱通也 故祖師門下 亦有或喚阿彌佛者慧遠 或喚主人空者瑞巖
⇒ 평하여 말하자면, [선의] 다섯 번째 조사(五祖)는 “자기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모든 세계의 모든 부처를 마음에 두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선의] 여섯 번째 조사(六祖)는 “언제나 남의 부처를 마음에 두면 나고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지키면 곧 깨달음의 세계(彼岸)에 이르른다”고 했습니다. 또 “부처는 본성 가운데를 향하여서 이룰 것이지 몸 밖[의 다른 무엇]을 향하여 구할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또 “[나고 죽음에] 미혹된 사람은 염불을 하여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生)을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했습니다. 또 “대저 중생은 마음을 깨달아서 스스로를 구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구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위와 같이 덕이 높은 모든 사람들(諸德, 고승高僧)은 [중생의] 본래 마음을 직접 가리켰습니다. 별도의 방편은 없습니다. 바야흐로 하나의 가르침으로써 곧 모든 근본을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치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방편설(迹門)에는 참으로 극락세계와 아미타 부처의 마흔 여덟 가지 큰 서원 [세운 것]이 있습니다. 무릇 열 번 염불하는 사람은 이 서원의 힘을 이어서 죽어서는 연꽃의 태(蓮胎)에 나고 윤회의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다른 입에서 같은 소리를 낸 것이고(異口同音, 같은 말을 하였고) 모든 세계의 보살들도 [그 곳에] 나기를 같이 원한 것입니다. 더구나 과거와 현재에 [그 곳에] 왕생(往生)한 삶들의 전기가 분명하니(昭昭), 원컨데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삼가 [정토(淨土)가 없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고 염불에 힘쓰고 힘쓰십시오.
산스크리트어(梵語)의 아미타(阿彌陀, Amitā). 이것은 ‘무한한 목숨(無量壽, Amitāyus)’이라고 하며 또 ‘무한한 빛(無量光, Amitābha)이라고도 합니다. 어디서나(十方) 언제나(三世) 첫째가는 부처의 이름입니다. 수행할 때의 이름(因名)이 법장(法藏)이었던 남자 승려(比丘)가 세자재왕 부처(世自在王佛)에 대하여 마흔 여덟 가지 서원을 내고서는 “내가 부처가 될 때에 셀 수 없이 [많은] 모든 세계의 모든 하늘의 존재와 사람들에서 제비 같은 나는 것과 움직이는 곤충들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나의 이름을 열 번 마음에 두는 자는 반드시 내 집에(刹中, 정토淨土를 말한다) 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옛 성인은 “[수행자가] 부처를 한 번 부르면 하늘의 마귀가 쓸개를 잃고(喪膽, 매우 놀라고) [그] 이름이 귀신의 명부에서 지워지며 [수행자의] 연꽃이 금 연못에서 나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참법懺法』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自力)과 타인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他力) [중에서] 하나는 더디고 하나는 빠르니 [윤회의] 바다를 넘고자 하는 사람이 나무 씨를 뿌리고서 [자라기를 기다려] 배를 만들려면 더딜 것이고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만들어진] 배를 빌려서 바다를 넘으려 하면 것은 빠를 것이니 이는 부처의 힘을 비유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 “세상에서 물이나 불이 어린아이에게 닥쳐와서 [그 아이가]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으면 바로(則) 부모가 그것을 듣고서 급히 달려와 구원하는 것처럼, 사람이 목숨이 다하는 때가 이르렀을 때에 높은 소리로 부처를 마음에 두면 바로(則) 부처는, 신통[력](神通)을 갖추었기에, 반드시 와서 [그를] 맞이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큰 성인의 자비는 부모보다 나으니 [이는] 중생이 나고 죽는 것이 물이나 불보다 심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정토(淨土)이기 때문에 정토가 [마음 밖의 다른 곳에] 생겨날 수가 없으며 자신의 본성이 아미타부처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보여질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옳은 듯 하지만 틀린 것입니다. 저 부처(彼佛, 아미타부처)는 탐냄도 없고 성냄도 없습니다. 나 또한 탐냄과 성냄이 없습니다. 저 부처는 지옥을 바꾸어 연꽃의 세계(蓮花, 깨달음이 넘치는 정토)를 만드는 것을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합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則) [쌓여 있는] 업(業)의 힘 때문에(以) 늘 [나]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 세계를] 바꾸어 연꽃의 세계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 부처는 무한히 많은 세계를 모두(盡)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응시(觀)하고 있으나 나는 곧 벽으로 막혀 있는 일(隔壁事, 벽 뒤편의 일)[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모든 세계를 보기를 눈앞의 것[을 보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사람 사람마다 [그] 본성은 비록 부처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곧 [미혹된] 중생의 것입니다. [본성(體)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其, 부처와 인간)의 드러남(相)과 쓰임(用)은 하늘과 땅[처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天地懸隔). 규봉(圭峰 宗密, 780-842) 선사는 “설사 진정으로 단박의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設實頓悟) 결국에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終須漸修)”고 했습니다. 진실이구나! 이 말이여! 그런 즉 자신의 본성이 아미타 부처라는 사람에게 말을 부치니(寄語, 물어보겠으니) 어찌 하늘이 낸(天生) 석가(釋迦)와 스스로 그러한(自然, 타고난) 아미타 부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 보면(忖量, 생각해보면) 사람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습니까. 목숨이 끝나는 때가 임하여서 나고 죽는 고통을 겪을 때에 걸림 없는 자유함(自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한 때의 공덕(一時貢,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의 높음으로 인해서(以) 오히려 [지옥에] 영원히 깊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 마명(馬鳴, Aśvaghosa, 1~2C., C. E.)과 용수(龍樹, Nāgārjuna, 추정 150~250 C. E.)가 모두 조사(祖師)[이지만] 교학(言敎)[을 배울 것]을 명백히 교훈하였고 [염불하여] 왕생할 것을 깊이 권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도] 왕생을 원하지 않으니... 또 부처 자신도 “서방 [정토]는 가기에 여기에서 멀다. 수많은 악함과 수많은 사악함[을 지나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둔한 근기(鈍根)[의 사람들]을 위해 [인간 현실의] 현상(相)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서방 [정토]는 가기에 여기에서 멀지 않다. 즉 중생인 마음이 아미타인 부처[인 것]이다(卽心衆生是佛彌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리한 근기(利根)[의 사람들]을 위해 [인간의] 본성(性)을 설명한 것입니다. 가르침에는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한] 방편(權)과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한] 진실(實)이 있으며 말(語)에는 [자세히 밝히기 위해] 드러내는 [가르침](顯)과 [자세히 밝혀 드러내지 않는] 비밀한 [가르침](密)이 있습니다. 만약 깨달아 아는 것(解, 바른 알음알이)과 행하는 것(行)이 상응하는 사람이라면 먼 것(遠, 인간 현실의 현상相과 정토淨土)과 가까운 것(近, 인간 본성性과 즉심시불卽心是佛)이 모두 갖추어져 [서로] 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사의 가르침(祖師門)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도] 역시 한 편으로는(或) 혜원(慧遠, 334-416)[과 같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한 편으로는(或) 서암(瑞巖, ?-?)처럼 ‘주인인 공(主人空)을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53. 실천의 중요성 - 공부하라.
聽經有經耳之緣 隨喜之福 幻軀有盡 實行不亡
⇒ 경전을 들으면 [그 소리가] 귀를 지나는 인연과 기쁨이 따르는 복이 있게 됩니다. 헛된 육신에는 다함이 있으나 참된 행동(實行)은 망하지 않습니다.
此明智學 如食金剛 勝施七寶 壽師云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不成 猶盖人天之福
⇒ 이것은 슬기로운 배움은 다이아몬드(金剛)를 먹는 것과 같아서 갖가지 보물을 베푸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영명(永明 延壽, 904-975) 선사는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들음은] 부처의 씨앗[으로 심어지는, 깨달음의] 원인으로 결과지어(結, 맺어)질 것이고 배워서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배움의 공덕은] 오히려 인간 세계나 하늘의 복을 덮어버립니다(盖, 더 큽니다).
54. 글공부보다 중요한 마음 공부
看經 若不向自己上做工夫 雖看盡萬藏 猶無益也
⇒ 경전을 보면서 만약 자기 자신을 향하여서 의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비록 모든 경전을 다 본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유익이 없습니다.
此明遇學 如春禽晝啼 秋蟲夜鳴 密師云 識字看經 元不證悟 銷文釋義 唯熾貪嗔邪見
⇒ 이것은 어리석게 수행 공부하는 것이 봄에 새가 낮에 울고 가을에는 벌레가 밤에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종밀 선사는 “글자를 알고 경전을 보는 것[만]으로는(識字看經) 원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글을 새기고 뜻을 푸는 것(銷文釋義)도 오로지 탐냄과 성냄과 사악한 견해(見)를 불타오르게 할뿐이다”라고 했습니다.
55. 자만하지 말라.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 相勝者 如厠屋塗丹雘
⇒ 수행하는 것(學)이 깨달음(道)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견해와 들은 바를 자랑하고, 쓸데없이 입과 혀의 말을 날카로이 함으로써 [수행자 사이에서] 서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측간(厠屋)에 단청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別明末世愚學 學本修性 全習爲人 是誠何心哉
⇒ [참된 가르침과 수행을 찾아보기 힘든] 혼란한 세상(末世)의 [수행자들이] 어리석게 수행 공부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수행 공부는 본래 [자기의] 본성을 닦는 것인데 모두들 [자기의 깨달음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익히고 있으니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 그리하는 것]이겠습니까?
56. 수행에 전념하는 자는 다른 가르침에 기울면 안 된다.
出家人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用而刀自傷焉
⇒ [수행에 전념하고자] 출가(出家)한 사람이 [불교의 가르침] 밖의 가르침(外典)을 익히는 것은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은 아무 곳에도 쓸모 없는 것이고 칼만 상할 뿐입니다.
門外長者子 還入火宅中
⇒ 문 밖의 부잣집 아들이 도로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는구나!
57. 승려가 되는 이유
出家爲僧 豈細事乎 非求安逸也 非求溫飽也 非求利名也 爲生死也 爲斷煩惱也 爲續佛慧命也 爲出三界度衆生也
⇒ 출가해서(出家, 세속을 떠나서) 승려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편안하고 한가한 것(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익과 명예를 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고 죽음[의 문제]를 위한 것이며 번뇌를 끊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의 지혜의 생명(慧命)을 잇기 위함이고 중생들을 구제해서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다.
可謂衝天大丈夫
⇒ 기세가 하늘을 찌름이 대장부라 할만 합니다.
58. 수행하는 자가 되었으면 전력을 다하라.
佛云無常之火 燒諸世間 又云衆生苦火 四面俱焚 又云諸煩惱賊 常伺殺人 道人宜自警悟 如救頭燃
⇒ 부처는 “덧없는(無常) [중생의 욕망의] 불이 온 세상을 태운다”고 했으며 또 “중생의 고통의 불길이 사면(四面)에 모두 타오른다”고 했습니다. 또 “모든 번뇌라는 도둑이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마땅히 자기를 경책하고 깨우치기를 머리 위에 불붙은 것을 구하듯이 [수행해야 합니다].
身有生老病死 界有成住壞空 心有生住異滅 此無常苦火 四面俱焚者也 謹白叅玄人 光陰莫虛度
⇒ 육신(身)에는 나는 것과 늙는 것과 병과 죽음이 있고 세계(界)에는 이루어지는 것(成)과 지속되는 것(住)과 파괴되는 것(壞)과 없어져버리는 것(空)이 있으며 마음(心)에는 생겨나는 것(生)과 지속되는 것(住)과 달라지는 것(異)과 사라지는 것(滅)이 있습니다. 이것이 ‘덧없는 고통의 불길이 사면에 모두 타오른다’는 것입니다. 삼가 고하오니 현묘[한 진리](玄)를 구하는(叅) 사람은 세월(光陰)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59.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
貪世浮名 枉功勞形 營求世利 業火加薪
⇒ 세상의 떠다니는 명예(浮名)를 탐내는 것은 쓸데없이(枉功) 육신(形)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애써서 구하는 것은 업의 불구덩이(業火)에 땔나무(薪)를 더하는 것입니다.
貪世浮名者 有人詩云 鴻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營求世利者 有人詩云 采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甛 枉功勞形者 鑿氷彫刻 不用之巧也 業火加薪者 麤弊色香 致火之具也
⇒ ‘세상의 떠다니는 명예를 탐낸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큰 기러기가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머문 흔적[만] 모래에 [남았구나]. 사람은 저승에 가고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라고 시를 지어 말했습니다. ‘세상의 이익을 애써 구한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온갖 꽃에서 채취해 얻어 꿀을 만든 후에 누구의 [혀의] 단 것을 위한 신고[의 고생]인지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시를 지어 말했습니다. ‘쓸데없이 육신을 괴롭힌다’는 것은 얼음을 뚫어서 조각하는 쓸데없는 재주[와 마찬가지]입니다. ‘업의 불구덩이에 땔나무를 더한다’라는 것은 거칠고 닳아버린 색과 향[을 가진 것]들이 불의 도구(火之具, 땔감)가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60. 명예와 이익에 물들지 말라.
名利衲子 不如草衣野人
⇒ 명예와 이익을 쫓는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衲子, 승려)은 풀로 지은 옷을 입은 야만인만도 못합니다.
唾金輪入雪山 千世尊不易之軌則 末世羊質虎皮之輩 不識廉耻 望風隨勢 陰媚取寵 噫 其懲也夫
⇒ 금으로 된 [수레] 바퀴에 침을 뱉고 눈 덮인 산에 들어간 것은 모든 세상의 존귀한 자(世尊, 깨달은 자, 부처)[가 되기 위해서]의 바꾸지 못할 철칙입니다. [진정한 가르침과 수행자를 찾기 힘든] 혼돈한 시기(末世)에 양의 바탕을 하고 호랑이 가죽을 쓴 무리들은 염치도 알지 못하고 [세상] 풍조를 바라고(望風) 세력을 따르며(隨勢) 아첨하기를 몰래하고(陰媚) 총애받는 것을 좋아하니(取寵) 아! [슬프다.] 그것을 징계해야 할 것인저!
心染世利者 阿附權門 趨走風塵 返取笑於俗人 此衲子以羊質 證此多行 以懲也夫三字結之 此三字 文出莊子
⇒ 마음이 세상의 이익에 물든 사람은 권력(權門)에 아부(阿附)하고 세속의 일(風塵)에 바삐 움직이다가(趨走)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얻을 뿐입니다. 이런 승려(衲子)를 ‘양의 바탕’으로 삼은 것(此衲子以羊質, 이런 승려를 양의 바탕[을 갖고 있다고] 비유한 것)은 이를 증명할만한 행위가 많이 [있기 때문에] ‘징계할 것인저(懲也夫)’라는 세 글자로 그것(之, 증명할만한 많은 행위)을 맺은 것입니다. 이 세 글자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것입니다.
61. 부처의 옷을 입은 도둑
佛云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부처는 “어떤 도둑이 내 의복을 빌려 여래(如來)를 소소하게 팔아(裨販) 갖가지 [악한] 업을 짓는가?”라고 했습니다.
末法比丘 有多般名字 或鳥鼠僧 或啞羊僧 或禿居士 或地獄滓 或被袈裟賊 噫 其所以以此
⇒ [진정한 가르침도 수행자도 없는] 혼란한 시대(末法, 말세)에 승려에게 흔한(多般) 이름이 [있으니] 혹은 ‘박쥐 승려(鳥鼠僧)’라고 혹은 ‘벙어리 염소 승려(啞羊僧)’라고 혹은 ‘대머리 거사(禿居士)’라고 혹은 ‘지옥의 찌꺼기(地獄滓)’라고 혹은 ‘가사 입은 도적(被袈裟賊)’이라고도 합니다. 아! [슬프다.] 그[렇게 불리는] 까닭은 이로써 입니다(以此, 아래와 같습니다).
裨販如來者 撥因果排罪福 沸騰身口 迭起愛憎 可謂愍也 避僧避俗曰*鳥鼠 舌不說法曰啞羊 僧形俗心曰禿居士 罪重不遷曰地獄滓 賣佛營生曰被袈裟賊 以被架裟賊 證此多名 以此二字結之 此二字文出老子
⇒ ‘여래(如來)를 소소하게 판다(裨販)’는 것은 인과(因果)[의 가르침]에 반발하고(撥, 믿지 않고) [그 결과인] 죄와 복을 배척하며 육신과 입으로 물 끓듯이 해서(沸騰身口, 몸과 입을 제멋대로 해서) 애욕(愛)과 증오(憎)를 번갈아(迭,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이니 가엽다고 할 만합니다. 승려도 피하고(避, 싫어해서 멀리하고, 아니고) 세속[의 사람]도 피하는 [자를] ‘박쥐’라고 합니다. 혀[가 있으나] 가르침을 펴지 못하는 [자를] ‘벙어리 양’이라고 합니다. 승려의 모습(形)[이나] 속세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를] ‘대머리 거사’라고 합니다. 죄가 무거운[데도] 고치지 않는 [자를] ‘지옥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부처를 팔아 생계(生)를 유지하는 [자를] ‘가사 입은 도적’이라고 합니다. ‘가사 입은 도적’[이라는 것]으로써 이를 증명하는 이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글자로서 맺은 것입니다. 이 두 글자는 『노자(老子)』에서 나온 글입니다.
62.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於戱 佛子一衣一食 莫非農夫之血 織女之苦 道眼未明 如何消得
⇒ 아! 부처의 길을 가는 사람(佛子)의 옷 한 벌과 밥 한 끼가 농부의 피와 베 짜는 여자의 고통이 아닌 것이 없으니, 도의 눈(道眼)이 밝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傳燈 一道人道眼未明故 身爲木菌 以還信施
⇒ 『전등록 傳燈錄』에 ‘한 도인(道人)이 도의 눈이 밝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서] 나무 버섯의 몸이 됨으로써 신자의 보시(信施)를 갚았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63.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수행도 하지 않으면서...
故曰要識披毛戴角底麽 卽今虛受信施者是 有人未飢而食 未寒而衣 是誠何心哉 都不思目前之樂 便是身後之苦也
⇒ 그러므로 “요컨대 털을 덮어쓰고 뿔을 이는 것을 알겠는가? [그것은] 곧 지금 신자의 보시를 헛되이 받는 것[의 결과]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대저 배고프지 않은데도 먹고 춥지 않은데도 옷 입는 자가 있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모두 눈앞의 즐거움이 곧 죽은 후의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智論 一道人五粒粟 受牛身 生償筋骨 死還皮肉 虛受信施 報應如響
⇒ 『지론智論』에 ‘한 도인이 다섯 낱알 곡식 [을 헛되이 버렸기] 때문에 소의 몸을 받아서 살아서는 [그] 힘으로써 [헛되이 버린 죄과를] 갚고,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로써 갚았다’[라고 했습니다]. 신자의 보시를 헛되이 받는 보응(報應)의 여파(響)와 같습니다.
64.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전심으로 수행하라.
故曰寧以熱鐵纏身 不受信心人衣 寧以洋銅灌口 不受信心人食 寧以鐵鑊投身 不受信心人房舍等
⇒ 그래서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감을지언정 신자(信心人)[가 보시하는] 옷을 받지 말고, 차라리 바닷물 [같이 많은] [청]동 [녹인 물]을 입에 부을지언정 신자[가 보시하는] 밥을 먹지 말며, 차라리 [끓는 커다란] 쇠 솥에 몸을 던질지언정 신자[가 보시하는] 방이나 집 따위를 받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梵網經云 不以破戒之身 受信心人 種種供養 及種種施物 菩薩若不發是願 則得輕垢罪
⇒ 『범망경梵網經』에 “계율을 깨트린 몸으로써 신자의 갖가지 공양(供養)과 갖가지 보시물(施物)을 받지 말라. 보살이 만약 이 서원을 내지 않는다면 곧 경구죄(輕垢罪)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65.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전심으로 수행하라.
故曰道人 進食如進毒 受施如受箭 幣厚言甘 道人所畏
⇒ 그래서 “도인은 독에 나아가는 것처럼 음식에 나아가고 화살을 받는 것처럼 보시를 받아야 한다. 후한 재물과 달콤한 말은 도인이 두려워하는 바이다”라고 했습니다.
進食如進毒者 畏喪其道眼也 受施如受箭者 畏失其道果也
⇒ 독에 나아가는 것처럼 음식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 도의 눈(道眼)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화살을 받는 것처럼 보시를 받는다는 것은 그 도의 열매(道果)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66. 헛된 명예를 구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
故曰修道之人 如一塊磨刀之石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而自家石漸消 然有人更嫌*他人 不來我石上磨 實爲可惜
⇒ 그래서 “수도하는 사람은 한 덩어리의 칼 가는 돌 과 같아서 이 사람이 와서 [칼을] 갈고 저 사람이 와서 [칼을] 갈며 오면서 [칼을] 갈고 가면서 [칼을] 가니, 다른 사람의 칼은 예리해지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돌에 [칼을] 갈러 오지 않는다고 도리어 불만스러워하는 자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워할 만하구나.”라고 한 것입니다.
如此道人 平生所向 只在溫飽
⇒ 이와 같이 수도하는 사람이 평생 바라는 바는 단지 따스함과 배부름에 있을 뿐 입니다.
67. 분발하여 수행하라.
故古語亦有之 曰三途苦未是苦 袈裟下失人身 始是苦也
⇒ 그러므로 옛 말이 또 있으니 이르기를 “삼도(三途)가 고통인 것이 아니고, 가사(袈裟) 아래에서 인간의 몸을 잃는 것이 고통의 시작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古人云 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此所以袈裟下 失人身也 佛子佛子 憤之激之 此章始起於一於戱 終結於一古語 中間紬繹許多故曰字亦一段文法也
⇒ 옛 사람이 이르기를 “지금 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해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사 아래에서 인간의 몸을 잃게 되는 까닭입니다.
부처의 길을 가는 자여! 부처의 길을 가는 자여! 분해하고 분발하라! 이 장은 처음 하나의 ‘아!’[라는 감탄사]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에 하나의 옛 이야기에서 맺어졌으며, 중간에 허다한 실마리(紬繹)들이 있으니 그러므로 “글자 또한 한 층의 문법이다”라고 한 것이다.
68. 헛된 육신에 집착하지 말라 - 청결의 규례
咄哉 此身九孔常流 百千癰疽 一片薄皮 又云革囊盛糞 膿血之聚 臭穢可鄙 無貪惜之 何況百年將養 一息背恩
⇒ 쯧쯧! 이 몸은 아홉 구멍에서 [더러운 것이] 항상 흐르고 수많은 악창(癰疽: 더러운 종기)을 한 조각 얇은 가죽[으로 싸 놓은 것입니다].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그득하고 피고름이 뭉쳐 있으니 냄새나고 더러워 천하게 여길만하며, 탐내거나 아까워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백 년을 기른다고 할지라도 한 숨에 은혜를 저버릴 것이겠습니까.
上來諸業 皆由此身 發聲叱咄 深有警也 此身諸愛根本 了之虛妄 則諸愛自除 如其耽着 則起無量過患 故於此特明之 以開修道之眼也
⇒ 위의 모든 업(業)은 모두 이 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꾸짖는 소리를 내는 것은 깊이 경계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은 모든 애욕의 근본이니 [그것의] 허망함을 깨달으면 곧 모든 애욕이 자연히 제거됩니다. 그와 같이 [자기 몸에 대한 애욕에] 빠져버리면 곧 무수히 많은 허물과 근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특별히 그것-육신의 허망함-을 밝힘으로써 도를 닦는 눈을 열려는 것입니다.
評曰四大無主故 一爲假四寃 四大背恩故 一爲養四蛇 我不了虛妄故 爲*他人也嗔之慢之 *他人亦不了虛妄故 爲我也嗔之慢之 若二鬼之爭一屍也 一屍之爲體也 一曰泡聚 一曰夢聚 一曰苦聚 一曰糞聚 非徒速朽 亦甚鄙陋 上七孔 常流涕唾 下二孔 常流屎尿 故須十二時中 潔淨身器 以*叅衆數 凡行*麤不淨者 善神必背去 因果經云 將不淨手 執經卷 在佛前 涕唾者 必當獲厠蟲報 文殊經云 大小便時 狀如木石 愼勿語言作聲 又勿畵壁書字 又勿吐痰入厠中 又云登厠不洗淨者 不得坐禪床 不得登寶殿 律云初入厠時 先須彈指三下 以警在穢之鬼 黙誦神呪 各七遍 初誦入厠呪曰옴로다아바[唵狠嚕陀耶 莎訶] 次誦洗淨呪曰옴하나 리데바하[唵賀曩 密□帝莎訶] 右手執甁 左手用無名指洗之 淨水旋旋傾之 *着實洗淨 次誦洗手呪曰옴주가라야바하[唵主迦囉野莎訶] 次誦去穢呪曰옴시리예바혜바하[唵室利曳婆□莎□訶] 次誦淨身呪曰옴바라놔가닥바하[唵跋折囉惱迦吒娑□訶] 此五神呪 有大威德 諸惡鬼神 聞必拱手 若不如法誦持 則雖用七恒河水 洗至金剛際 亦不得身器淸淨 又云洗淨 須用冷水 洗手須用皂角 又木屑灰泥 亦通 若不用灰泥 則觸水淋其手背 垢穢尙存 禮佛誦經必得罪云云 此登厠洗淨之法 亦是道人 日用行實 故略引經語 並附于此
⇒ 평하자면,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四大)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한 편으로 [육신은] 네 가지 원수를 빌려 이루어진 것입니다. 네 가지 물질적 요소는 [그것들로 이루어진 육신을 길러주는] 은혜를 저버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네 [마리] 뱀을 기르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들과 더불어(爲他人也; 타인들을 대하여) 성내고 업신여깁니다. 타인 또한 [자신의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爲我也; 나를 대하여) 성내고 업신여깁니다. [이것은] 두 귀신이 한 시신을 갖고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시신이 몸이 되는 것은 한 편으로는 거품이 모인 것이라 말하고, 한 편으로는 꿈이 모인 것이라 말하며, 한 편으로는 괴로움이 모인 것이라 말하고, 한 편으로는 똥이 모인 것이라 말하니 [그 시신은] 걸어다니지 못하고 속히 썩어서 또한 매우 비루(鄙陋)한 것입니다. [육신의] 위의 일곱 구멍에서는 항상 눈물과 침이 흐르며 아래의 두 구멍에서는 항상 똥과 오줌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하루 종일(十二時中) 몸의 그릇(身器)을 깨끗이 함으로써 [함께 수행하는] 무리에 참예해야 합니다. 대저 행위가 거칠고 깨끗치 못한 자는 선한 신(善神)이 반드시 등 돌리고 가 버립니다. 『인과경因果經』에서는 “깨끗치 못한 손으로써 경전 책을 잡거나, 부처님 앞에 있으면서 눈물과 침을 흘리는 자는 반드시 뒷간 벌레[가 되는] 보응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문수경文殊經』에서는 “대소변 볼 때에는 모습을 목석같이 하고 신중하게 말하거나 소리내지 말라. 또 벽에 글이나 글자를 그리지 말라. 또 측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 가래를 뱉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또 “측간에 오르고서 씻어 깨끗하게 하지 않는 자는 선방의 자리에 앉을 수 없고 [부처님 모신] 보전(寶殿)에도 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계율(律)에서는 “뒷간에 처음 들어갈 때에는 먼저 반드시 손가락을 아래로 세 번 튀김으로써 더러운 곳에 있는 귀신을 경계하고 신주(神呪, 신통력 있는 주술)를 [뒤에 나오는 경우에] 각각 일곱 번씩 조용히 외워야(黙誦) 한다. 처음 외우는 것은 뒷간에 들어갈 때의 주문(呪)으로 ‘옴 로다아 바’라고 한다. 다음 외우는 것은 씻어 깨끗하게 할 때의 주문으로 ‘옴 하나리데 바하’라고 하며 [이것을 외우면서] 오른 손에 [물]병을 집고서 넷째 손가락을 이용하여 왼손을 닦는데 깨끗한 물을 조금씩 기울여서 착실하게 씻어 깨끗하게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손을 씻을 때의 주문으로 ‘옴 주가라야 바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더러움을 제거하는 주문으로 ‘옴 시리예바혜 바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몸을 깨끗이 하는 주문으로 ‘옴 바라 놔가닥 바하’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신통한 주문은 큰 위엄과 덕이 있어서 모든 악함과 귀신이 들으면 반드시 손을 맞잡는다. 만약 규칙에 맞게 [주문을] 외워 지키지 않는다면 비록 일곱 개나 되는 갠지스 강의 물을 [다] 사용하여 씻어서 다이아몬드와 같은 깨끗함(金剛際)에 이를지라도 또한 청정한 몸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씻어 깨끗이 함에는 반드시 차가운 물을 써야하고 손을 씻음에는 반드시 귀염나무 껍질(皁角)을 사용해야 한다. 또 톱밥(木屑)이나 물에 갠 재(灰泥)도 또한 쓸 수 있다. 만약 물에 갠 재를 쓰지 않는다면 물을 만져 그 손등에서 물이 듣을 정도가 될지라도 때와 더러움은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런 자는] 예불하거나 경을 외울 때에 반드시 죄를 얻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뒷간에 오르고서 씻어 깨끗하게 하는 규칙(法)은 또한 도를 추구하는 사람(道人)이 날마다 때때로(日用) 실천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말을 간략히 인용하여 여기에 함께 덧붙이는 것입니다.
69. 죄를 참회할 줄 알라.
有罪卽懺悔 發業卽慚愧 有丈夫氣象 又改過自新 罪隨心滅
⇒ 죄가 있으면 바로 참회(懺悔)하고 [악한] 업을 냈으며 바로 부끄러워할(慚愧) [줄 알아야]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이 있는 것입니다. 또 허물을 고쳐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죄도 [그] 마음을 따라서 없어지게 됩니다.
懺悔者 懺其前愆 悔其後過 慚傀者 慚責於內 愧發於外 然心本空寂 罪業無寄
⇒ ‘참회한다’는 것은 그 이전(前)의 허물(愆)을 뉘우치고 그 이후(後)의 허물(過)을 뉘우치는 것(悔)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은 안으로 꾸짖고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밖으로도 [예불, 사과, 기도 등을] 내고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空寂)이기 [때문]에 죄의 업이 기댈 곳이 없는 것입니다.
70. 곧은 마음의 중요성
道人宜應端心 以質直爲本 一瓢一納 旅泊無累
⇒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마땅히 단정한 마음(端心)을 가져서(應, 단정한 마음[의 드러남]에 응해서) 타고난 본성(質)과 바른 [마음](直)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며 표주박(瓢, 발우) 하나와 누더기(納, 가사) 한 [벌]로 여행(旅泊)하면서 [걱정에] 묶임(累)이 없어야 합니다.
佛云心如直絃 又云直心是道場 若不耽*着身 則必旅泊無累
⇒ 부처는 “마음은 곧은 줄(直絃)과 같[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 “곧은 마음(直心)이 바로 수행하는 곳(道場)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육신을 탐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여행하면서 [걱정에] 묶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71. 객관과 주관 모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凡夫取境 道人取心 心境兩忘 乃是眞法
⇒ 보통 사람(凡夫)은 대상세계를 구하며(取境) [소승의]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마음을 구합니다(取心). 마음과 대상세계 양자를 잊어야면 곧 참된 진리(眞法)인 것입니다.
取境者 如鹿之趂空花也 取心者 如猿之捉水月也 境心雖殊 取病則一也 此合論凡夫二乘 ◆ 天地尙空秦日月 山河不見漢君臣
⇒ ‘대상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사슴이 허공의 꽃[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구한다’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세계[를 구하는 것]과 마음[을 구하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진리가 아니라] ‘병’을 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곧 하나입니다(一, 같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과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이라는 소승의] 두 수행(二乘)을 합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천지는 오히려 비어 진나라(秦, 221-207, B. C. E.)의 해와 달이 [없고] 산과 강에는 한나라(前漢, 202 B. C. E.-8 C. E. ; 後漢, 25-220)의 임금과 신하가 보이지 않는구나.
72. ‘나 자신’이라는 생각조차도 버려야 한다.
聲聞宴坐林中 被魔王捉 菩薩遊戱世間 外魔不覓
⇒ 성문(聲聞)의 수행자는 산 속에 편안하게 앉아 [수행에 전념할지라도] 마귀의 왕(魔王)에게 붙잡히게 되[지만] 보살은 세상에서 노닐지라도 외부의 마귀들이 [그를] 보지 못합니다.
聲聞 取靜爲行故 心動 心動則鬼見也 菩薩 性自空寂故 無迹 無迹則外魔不見 此合論二乘菩薩 ◆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
⇒ 성문의 수행자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곧 귀신이 [그를] 보게 됩니다. 보살은 [그] 본성이 스스로 비어 고요하기 때문에 [어떠한] 자취가 없습니다(無迹, 메임이 없습니다). 메임이 없으면 곧 외부의 마귀(外魔, 유혹이 되는 대상)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不見, 끌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이승[의 수행]과 보살[의 수행]을 합하여 이야기한 것입니다. ◆ 삼월에 꽃길에서 한가롭게 노니는데 한 집이 우중충하게 빗속에 문을 닫고 있네.
73.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 - 죽는 순간에도...
凡人臨命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不來 生時性亦不生 死時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自由人也 若見諸佛 無心隨去 若見地獄 無心怖畏 但自無心 同於法界 此卽是要節也 然則平常是因 臨終是果 道人須*着眼看
⇒ 무릇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에 다다라서는 다만 인간존재의 모든 것(五蘊)이 모두 헛된 것이고 [세계의] 물질적 요소들(四大)도 자아라 할 것(我, 실체)이 없는 것이며 참 마음(眞心)[조차]도 모습(相)이 없는 것이어서 [이 모든 것이 어디로]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觀) 합니다. 태어날 때에도 본성(性)은 역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에도 본성은 역시 [어디로]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맑고(湛) 자연스러우며(然) 완전하고(圓) 고요하기에(寂) 마음(心, 주관)과 대상세계(境, 객관)가 동일합니다(一如). 다만 이처럼 [존재의 진리를 관찰]하면 바로(直下) 단박에 깨닫게 되어 [윤회의] 세계(三世)에 의해 잡혀 매이지 않게 됩니다. 곧 [윤히의] 세상을 벗어난 자유인(自由人)인 것입니다. 만일 모든 부처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따라서 가려는 마음이 없게 되며 만일 지옥을 보게 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 다만 스스로 [잘못된] 마음이 없게되면(無心) 현상세계 [모두](法界)와 같아지게 되니(同) 이것이 곧 [진리의] 요지(要節)입니다. 그러므로 평소 때는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는 때](因)이고 죽을 때는 [깨달음의]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怕死老年親釋迦 ◆ 好向此時明自己 百年光影轉頭非
⇒ 죽음을 두려워하는 늘그막에나 석가모니를 만나렵니까. ◆ 이 때를 향하여서도(向此時, 죽을 때까지도) ‘자기(自己, 나는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것을 좋아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백년의 세월(光影)이 머리 [한 번] 돌림에 그릇[되게] 되려니...
74. 분별심을 내지 말라.
凡人臨命終時 若一毫毛 凡聖情量不盡 思慮未忘 向驢胎馬腹裏 托質 泥犁鑊湯中煮煠 乃至依前再爲螻蟻蚊蝱
⇒ 무릇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에 다다라서는 만약 가는 털 한 [가닥 만큼]이라도 보통 사람과 성인이다 하는 감정과 구분(精量)을 다 없애지 못하고 [분별적인] 생각(思慮)을 잊지 못하면 [죽은 후에는] 나귀의 태(胎)나 말의 뱃속(腹裏)으로 향하여 [존재의] 바탕을 [동물에] 의탁하게 되고 지옥(泥犁, Niraya)의 끓는 솥 가운데에서 삶아지게 되며 심지어 앞의 것(前, 털 한 가닥의 분별심)에 의해서 땅강아지나 개미나 모기나 등에로 다시 [태어]나게(再爲) 나게 될 것입니다.
白雲云 設使一毫毛 凡聖情念淨盡 亦未免入驢胎馬腹中 二見星飛 散入諸趣 ◆ 烈火茫茫 寶劒當門
⇒ 백운(白雲 守端, 1025-1072) 선사는 “만일 한 가닥 털[만큼]의 보통 사람과 성인에 대한 감정과 [분별적인] 생각(情念)이 깨끗이 없어졌다 해도 또한 나귀의 태나 말의 뱃속을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이분법적인 견해(二見)가 [하늘의] 별처럼 날아다니니 별의 별 존재(諸趣)에 흩어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맹렬한 불길(烈火, 인간의 번뇌)이 아득히 [뻗어있으니](茫茫) 보검(寶劍)이 [불길을 벗어날] 마땅한 문일세.
評曰此二節 特開宗師無心合道門 權遮敎中念佛求生門 然根器不同 志願亦異 各各如是 兩不相妨 願諸道者 平常隨分 各自努力 最後刹那 莫生疑悔
⇒ 평하여 말하자면, 이 두 구절은 특별히 종사(宗師)가 ‘분별적 견해 없이 진리와 하나되는 방법(無心合道門)’을 열고서 [부처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염불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念佛求生門)’을 임시로(權) 막은 것[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根)와 그릇(器)이 같지 않고 뜻(志)과 원하는 것(願)이 또한 다른 것이 각각 이와 같아서 [‘분별적 견해 없이 진리와 하나되는 방법’과 ‘염불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 양자가 서로 방해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각자의] 분수에 따라 각자 노력하여 최후의 순간(最後刹那, 죽음의 순간)에 의심이나 후회를 내지 마십시오.
75. 선 수행하는 사람들의 병
禪學者 本地風光 若未發明 則孤峭玄關 擬從何透 往往斷滅空以爲禪 無記空以爲道 一切俱無以爲高見 此冥然頑空 受病幽矣 今天下之言禪者 多坐在此病
⇒ 선 수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래 모습(本地風光, 존재의 참 모습)을 만약 아직 밝히 [드러]내지 못했다면 곧 홀로 우뚝 솟은 심원한 [진리의] 관문(孤峭玄關)을 무엇을 따라 본떠서 뚫겠습니까. 더러는 ‘[완전히] 끊어 사라져버린 공(斷滅空)’으로 선 수행하며 [더러는 ‘언어로] 기록할 수 없는 공(無記空)’으로 진리를 삼고(爲道) [더러는] ‘모든 것이 다 없다(一切俱無)’는 것으로 뛰어난 견해(高見)를 삼습니다. 이것은 공(空)[에 대한] 어두우면서도 완고한 [견해들이니] 병(病)을 받음이 깊은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天下)에서 ‘선 수행(禪)’을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앉아 있습니다.
向上一關 措足無門 雲門云 光不透脫 有兩種病 透過法身 亦有兩種病 須一一透得 始得 ◆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 위[에 언급한] ‘한 관문(一關)’으로 향하는 것은 발 놓을 곳이 없는 방법입니다. 운문(雲門 文偃, ?-949) 선사는 “[진리의] 빛(光)을 뚫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두 종류의 병이 있고 진리 그 자체(法身)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에도 두 종류의 병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병들을] 하나 하나 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풀 내음 나는 길을 가지 않고서는 꽃잎 떨어지는 마을에 가기 어렵구나.
76. 뛰어난 선 수행자의 병
宗師亦有多病 病在耳目者 以瞠眉努目 側耳點頭爲禪 病在口舌者 以顚言倒語 胡喝亂喝爲禪 病在手足者 以進前退後 指東畵西爲禪 病在心腹者 以窮玄究妙 超情離見爲禪 據實而論 無非是病
⇒ 종사(宗師)들에게도 역시 많은 병이 있습니다. 병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瞠眉)과 눈을 부릅뜨는 것(努目)과 귀를 기울이는 것(側耳)과 머리를 끄덕이는 것(點頭)으로써 선[의 진리]를 삼고 병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말을 바꾸고(顚言) 말을 뒤집는 것(倒語)과 사납고 난잡한 고함 침(胡喝亂喝)으로 선[의 진리]를 삼습니다. 병이 손과 발에 있는 자는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서는 것(進前退後)과 동쪽을 가리키고(指東) 서쪽에 그림 그리는 것(畵西)으로 선[의 진리]를 삼고 병이 마음에 있는 자는 현묘함을 끝까지 연구하려 하는 것(窮玄究妙)과 감정을 뛰어넘고 견해를 떠나려는 것(超情離見)으로써 선[의 진리]를 삼습니다. [하지만] 사실대로(據實) 말하자면 [이 모두가] 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殺父母者 佛前懺悔 謗般若者 懺悔無路 ◆ 空中撮影非爲*妙 物外追蹤豈俊機
⇒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 앞에서 참회할 수 있지만 진리(般若)를 비방하는 자는 참회할 길이 없습니다. ◆ 허공 속의 그림자를 잡는 것이 현묘한(妙) 것이 되지 못하는데 세상 밖物外)에서 [무언가를] 뒤쫓는 것이 어찌 뛰어난 근기[의 사람이 할 일]이겠는가.
77. 스승은 진리를 말로써 표현하지 않는다.
本分宗師 全提此句 如木人唱拍 紅爐點雪 亦如石火電光 學者實不可擬議也 故古人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 최고의 스승(本分宗師)이 이 [진리를 담은] 구절을 완전하게 들어보이는 것은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노래하고 박수치는 것과 붉게 달아오른 화로에 눈(雪)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과 번개와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하는 사람(學者)은 참으로 [진리를] 생각[으로 알려]하거나 의논[해서 알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스승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앞 선 스승의 깨달음(道)과 공덕(德)을 중히 여기지 말고 다만 앞 선 스승의 나를 위해 [진리를] 끝까지 말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不道不道 恐上紙墨 ◆ 箭穿江月影 須是射鵰人
⇒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지 마십시오. 종이와 먹 위에 오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 화살이 강에 비친 달 그림자를 꽤뚫는 것이 반드시 독수리를 쏘는 사람일 것이니...
78. 선맥의 흐름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昔馬祖一喝也 百丈耳聾 黃蘗吐舌 這一喝 便是拈花消息 亦是達摩 初來底面目 吁 此臨濟宗之淵源
⇒ 대저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종파의 갈래(宗途)를 상세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옛날에 마조(馬祖 道一, 708-788) 선사가 한 번 고함침에 백장(百丈 懷海, 749-814)은 귀가 멀었고 황벽(黃蘗 希運, ?-850?)은 혀를 내밀었습니다. 이 ‘한 번 고함침’은 곧 [부처가] 꽃을 을었다는 소식[과 같은 것]이며 또한 달마(菩提 達磨, ?-528?)가 처음 온 본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아! 이것이 임제종(臨濟宗)이 [생겨난] 근원(淵源)입니다.
識法者懼 和聲便打 ◆ 杖子一枝無節目 慇懃分付夜行人
⇒ [부처의] 가르침(法)을 아는 사람은 두려워하라. [함부로 말로 진리를 드러내려 하면] 소리[냄]과 더불어 곧 때릴 것이니... ◆ 한 가지 마디 없는 [조사의] 지팡이(杖子)를 밤 길 가는 사람에게 은근히 건네주네.
昔馬祖一喝也 百丈得大機 黃蘗得大用 大機者 圓應爲義 大用者 直截爲義 事見傳燈錄
大凡祖師宗途有五 曰臨濟宗 曰曹洞宗 曰雲門宗 曰潙仰宗 曰法眼宗
[臨濟宗] 本師釋迦佛 至三十三世 六祖慧能大師下直傳 曰南嶽懷讓 曰馬祖道一 曰百丈懷海 曰黃蘗希運 曰臨濟義玄 曰興化存獎 曰南院道顒 曰風穴延沼 曰首山省念 曰汾陽善昭 曰慈明楚圓 曰楊歧方會 曰白雲守端 曰五祖法演 曰圓悟克勤 曰徑山宗杲禪師等
[曹洞宗] 六祖下傍傳 曰靑原行思 曰石頭希遷 曰藥山惟儼 曰雲巖曇晟 曰洞山良价 曰曹山耽章 曰雲居道膺禪師等
[雲門宗] 馬祖傍傳 曰天王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峯義存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
[潙仰宗] 百丈傍傳 曰潙山靈祐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涌 曰芭蕉慧淸 曰霍山景通 曰無著文喜禪師等
[法眼宗] 雪峯傍傳 曰玄沙師備 曰地藏桂琛 曰法眼文益 曰天台德韶 曰永明延壽 曰龍濟紹修 曰南臺守安禪師等
[臨濟家風] 赤手單刀 殺佛殺祖 辨古今於玄要 驗龍蛇於主賓 操金剛寶劒 掃除竹木精靈 奮獅子全威 震裂狐狸心膽 要識臨濟宗麽 靑天轟霹靂 平地起波濤
[曹洞家風] 權開五位 善接三根 橫抽寶劒 斬諸見稠林 妙恊弘通 截萬機穿鑿 威音那畔 滿目烟光 空劫已前 一壺風月 要識曹洞宗麽 佛祖未生空劫外 正偏不落有無機
[雲門家風] 劒鋒有路 鐵壁無門 掀翻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迅電不及思量 烈焰寧容湊泊 要識雲門宗麽 柱杖子□跳上天 盞子裏諸佛說法
[潙仰家風] 師資唱和 父子一家 脇下書字 頭角崢嶸 室中驗人 獅子腰折 離四句絶百非 一搥粉碎 有兩口無一舌 九曲珠通 要識潙仰宗麽 斷碑橫古路 鐵牛眠少室
[法眼家風] 言中有響 句裏藏鋒 髑髏常干世界 鼻孔磨觸家風 風柯月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 要識法眼宗麽 風送斷雲歸嶺去 月和流水過橋來
[別明臨濟宗旨] 大凡一句中具三玄 一玄中具三要 一句無文綵印 三玄三要 有文綵印 權實玄照用要
[三句] 第一句喪身失命 第二句未開口錯 第三句糞箕掃箒
[三要] 一要照卽大機 二要照卽大用 三要照用同時
[三玄] 體中玄 三世一念等 句中玄 徑截言句等 玄中玄 良久棒喝等
[四料揀] 奪人不奪境 待下根 奪境不奪人 待中根 人境兩俱奪 待上根 人境俱不奪 待出格人
[四賓主] 賓中賓 學人無鼻孔 有問有答 賓中主 學人有鼻孔 有主有法 主中賓 師家無鼻孔 有問在 主中主 師家有鼻孔 不妨奇特
[四照用] 先照後用 有人在 先用後照 有法在 照用同時 驅耕奪食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四大式] 正利少林面壁類 平常禾山打鼓類 本分山僧不會類 貢假達摩不識類
[四喝] 金剛王寶劒 一刀揮斷 一切精解 踞地獅子 發言吐氣 衆魔腦裂 探竿影草 探其有無 師承鼻孔 一喝不作一喝用 具上三玄四賓主等
[八棒] 觸令返玄 接掃從正 靠玄傷正 苦責罰棒 順宗旨賞棒 有虛實辨棒 盲枷瞎棒 掃除凡聖正棒
此等法 非特臨濟宗風 上自諸佛 下至衆生 皆分上事 若離此說法 皆是妄語
⇒ 옛날에 마조 선사가 한 번 고함쳤을 때에 백장 선사는 존재의 본질(大機)을 깨달았고(得) 황벽 선사는 존재의 현상(大用)을 깨달았습니다.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원만하게 응하는 것(圓應, 존재의 원리)’의 뜻이고 ‘존재의 현상’이라는 것은 ‘바로 끊는 것(直截, 잘못된 견해를 바로 끊는 것)’의 뜻입니다. [이런] 일은 『전등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략 구분하면(大凡) 조사선(祖師)에는 다섯 갈래가 있으니 임제종,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潙仰宗), 법안종(法眼宗)이라 합니다.
《임제종》 근본 되는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釋迦佛)이고 [그로부터] 삼십 삼대 째인 육조 혜능 대사 아래로 직접 전해지기를(直傳) 남악 회양(南岳 懷讓, 677-744),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8-788),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 황벽 희운(黃蘗 希運, ?-850?),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흥화 존장(興化 存獎, ?-925), 남원 도옹(南院 道顒, ?-?), 풍혈 연소(風穴 延沼, 896-973), 수산 성념(首山 省念, 926-993), 분양 선소(汾陽 善昭, 947-1024), 자명 초원(慈明 楚圓, 987-1040), 양기 방회(楊歧 方會, 992-1049), 백운 수단(白雲 守端, 1025-1072), 오조 법연(五祖 法演, ?-1104), 원오 극근(圓悟 克勤, 1063-1135), 경산 종고(徑山 宗杲, 1089-1163)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조동종(曹洞宗)》 육조 [혜능] 아래에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傍傳)를 청원 행사(靑原 行思, ?-740), 석두 희천(石頭 希遷, 700-790), 약산 유엄(藥山 惟儼, 751-834), 운암 담성(雲巖 曇晟, 782-841), 동산 양개(洞山 良价, 807-869), 조산 탐장(曹山 耽章, 839-901), 운거 도응(雲居 道膺, ?-902)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운문종(雲門宗)》 마조 [도일에게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천왕 도오(天王 道悟, 748-807), 용담 숭신(龍潭 崇信, ?-?), 덕산 선감(德山 宣鑑, 780-865), 설봉 의존(雪峯 義存, 822-908), 운문 문언(雲門 文偃, ?-949), 설두 중현(雪竇 重顯, 980-1052), 천의 양회(天衣 義懷, 989-1060)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위앙종(潙仰宗)》 백장 [회해에게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위산 영우(潙山 靈祐, 771-853), 앙산 혜적(仰山 慧寂, 840-916), 향엄 지한(香嚴 智閑, 818-914), 남탑 광용(南塔 光涌, ?-?), 파초 혜청(芭蕉 慧淸, ?-?), 곽산 경통(霍山 景通,?-?), 무착 문희(無著 文喜, 820-899)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법안종(法眼宗)》 설봉 [의존에게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현사 사비(玄沙 師備, 835-908), 지장 계침(地藏 桂琛, 867-928), 법안 문익(法眼 文益, 885-958), 천태 덕소(天台 德韶, 891-972), 영명 연수(永明 延壽, 904-975), 용제 소수(龍濟 紹修, ?-?), 남대 수안(南臺 守安, ?-?)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임제종의 가풍(臨濟家風)》 맨 손에 단도[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며 ‘현묘함과 요긴한 것(玄要)’[이라는 방편으로] 과거와 현재[의 가르침의 뜻]을 판단하고 ‘주인과 손님(主賓, 주관과 객관)’[이라는 방편으로] 용(龍, 깨달음)인지 뱀(蛇, 깨닫지 못함)인지 시험합니다. 다이아몬드[같이 날카롭고 단단한] 보검(金剛寶劒)을 잡고서 대나무와 나무(竹木)[같이 무성히 솟아 있는] 도깨비(精靈)를 쓸어버리고 사자(獅子)의 모든 위엄으로 분노(奮)하여 여우와 살쾡이의 심장과 쓸개를 찢어발깁니다. 요켠대 임제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푸른 하늘에 벼락의 굉음[과 같은 것]이고 평평한 땅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동종의 가풍(曹洞家風)》 방편으로 다섯 [수행의] 자리(五位)를 열어놓았기에 세 [종류의] 근기[의 사람들]을 잘 가르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혜의] 보검을 비스듬히 [겨눠] 들고서 모든 [잘못된] 견해의 빽빽한 숲을 베어버립니다. [여러 방편들을] 널리 통하도록 신기하게 잘 맞추고(恊, 합하고) 온갖 세속의 일(萬機)에 대해 천착(穿鑿)하는 것을 끊어버립니다. 최초의 부처(威音那畔)[가 부처가 될 때]의 위엄 있는 모습이요(滿目烟光) 아주 오랜 시간 이전(空劫已前)의 한 병에 비친 풍경입니다. 요켠대 조동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부처와 조사가 나기 전의 아주 먼 옛날 밖에서는 원리(正)와 작용(偏)이 [모두] 있다거나 없다거나(有無)하는 틀(機, 분별적인 기준)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운문종의 가풍(雲門家風)》 칼날(劒鋒) [위]에는 [드물게] 길이 있[을 수 있]지만 철벽(鐵壁)에는 문(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뒤집히는 것을 번쩍들고 갈등은 분산시키고 평소의 [애욕의] 감정(精)과 [분별적] 견해(見解)를 잘라버립니다. 빠른 번개[조차]도 생각과 헤아림[의 번잡함]에 이를 수 없거늘 [그렇게 번잡한 생각이] 맹렬한 불구덩이에 머무르는 것을 어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운문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조사의] 지팡이(拄杖子)가 하늘 위에 날뛰고 술잔 안에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 펼쳐집니다.
《위앙종의 가풍(潙仰家風)》 스승(師)과 제자(資)가 부르고 화답하니(唱和)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옆구리 아래에 글자를 쓰고 머리 위에 뿔이 솟아있고 사자의 허리가 꺾어집니다. ‘네 가지 구절(四句)’도 떠나고 ‘백 가지 아니다[라는 가르침](百非)’도 끊어버리기를 한 번에 쳐서 부숴버리니(粉碎) 두 사람의 입이 있으나 하나도 혀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 아홉 번 구부러진 구슬에 [실을 꿰어] 통과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컨대 위앙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부러진 비석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옛 길에 쓰러져있고 쇠로 만든 소는 작은 방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법안종의 가풍(法眼家風)》 말 가운데에 메아리침이 있고 화두(句) 속에 칼날이 숨겨져 있습니다. 해골은 늘 세계에 [널려있고] 콧구멍은 [법안종의] 가풍을 비벼댑니다(磨觸, 일깨웁니다).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이 비친 시냇물은 참된 마음(眞心)을 드러냅니다. 푸른 대나무와 누런 꽃에는 오묘한 진리(妙法)이 선명합니다. 요컨대 법안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바람은 구름을 끊어 고개로 돌아가도록 보내고 달과 [그 달이 비친]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 [흘러]갑니다.
《임제종의 교의(旨)를 별도로 밝힙니다.》 크게 개요를 잡으면(大凡), ‘하나의 구절(一句)’ 속에는 ‘세 가지 현묘함(三玄)’이 갖추어져 있고 ‘하나의 현묘함’ 속에는 ‘세 가지 요지(三要)’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 구절’에는 문장의 훌륭한 모양이나 풍채(文綵)의 흔적(印)이 없으나 ‘세 가지 현묘함’과 ‘세 가지 요지’에는 문장의 훌륭한 모양이나 풍채의 흔적이 있습니다. 방편(權)과 진실(實)은 ‘현묘함’이고 [스승이 배우는 자의 속을] 비추어보는 것(照, 떠보는 것)과 [진리의 가르침을] 쓰는 것(用, 보여주는 것)은 ‘요지’입니다.
《세 가지 구절(三句)》 ‘첫 번째 구절’은 ‘몸을 잃고 목숨을 잃는 것’이고 ‘두 번째 구절’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릇된 것’이고 ‘세 번째 구절’은 ‘똥 삼태기와 빗자루’입니다.
《세 가지 요지(三要)》 ‘첫째 요지’는 ‘비추어 봄(照)이 곧 큰 기틀(機, 體, 본체)’이[라는 것이]고 ‘둘째 요지’는 ‘비추어 봄이 곧 큰 씀(用, 작용)’이[라는 것이]며 ‘셋째 요지’는 ‘비추어 봄(照, 體, 본체)과 씀(用, 작용)이 동시(同時)’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현묘함(三玄)》 ‘[진리의] 본체 가운데의 현묘함(體中玄)’[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세계(三世, 모든 역사와 시간)가 한 생각(一念)[일 뿐이다]’와 같은 것들(等)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구절 가운데의 현묘함(句中玄)’[이라는 것]은 ‘지름길(徑截)[과 같은] 말 구절(言句, 화두)’같은 것들이고 ‘현묘함 가운데의 현묘함(玄中玄)’이라는 것은 ‘[말없이] 한참 있는 것(良久)과 방망이질(棒)과 고함치는 것(喝)’ 같은 것들입니다.
《네 가지 헤아려 분간한다[는 것](四料揀)》 ‘주관(人)은 빼앗으나 대상(境)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낮은 근기(下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대상을 빼앗으나 주관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중간 근기(中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주관과 대상을 모두 빼앗는다는 것’은 높은 근기(上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며 ‘주관과 대상을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근기의] 틀(格)을 벗어난 [뛰어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손님과 주인의 네 가지 [유형]》 ‘손님(賓, 배우는 사람) 중의 손님(賓中賓)’이라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콧구멍이 없기에(無鼻孔) 질문이 있고 대답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손님 중의 주인(主, 가르침을 전하는 종사)(賓中主)’이라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콧구멍이 있기에 주인도 있고 가르침도 있[는 것입니]다. ‘주인 중의 손님(主中賓)’이라는 것은 스승의 집(師家, 스승 자신)에 콧구멍이 없기에 질문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주인 중의 주인(主中主)’이라는 것은 스승의 집에 콧구멍이 있는 것이니 [그] 기특함을 막을 수 없습니다.
《비추어 보고 씀의 네 가지 [유형](四照用)》 ‘먼저 비추어 본(학인의 속을 떠본) 후에 쓰는 것(가르침을 보이는 것)(先照後用)’에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먼저 쓴 후에 비추어보는 것(先用後照)’에는 가르침이 있을 뿐입니다. ‘비추어보는 것과 쓰는 것이 함께 할 때(照用同時)’에는 [밭] 가는 것을 내어쫓고 먹는 것을 빼앗습니다. ‘비추어 봄과 씀이 함께 하지 않을 때(照用不同時)’에는 질문이 있고 대답이 있습니다.
《네 가지 큰 방식(四大式)》 ‘섞임이 없는 이익(正利)[을 얻는 방식’이라는 것]은 ‘[달마가] 소림(少林)에서 벽을 대하여 수행한 것(面壁)’ 등[과 같은 것]입니다. ‘늘 그러함(平常)[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화산(禾山)에서 북을 두드린 것(打鼓)’ 등[과 같은 것]입니다. ‘본분(本分)[을 드러냄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산승(山僧)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을 바침(貢假)[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달마(달마, ?-528)가 “알지 못합니다(不識).”라[고 대답]한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고함침(四喝)의 네 가지 [쓰임]》 가장 뛰어난 금강[역사](金剛王)의 보검은 모든 감정(情)과 [분별적] 이해(解)를 칼 한 번 휘두름에 끊어 버립니다. 땅에 웅크린 사자가 말을 발하고 기를 토하여내면 마귀의 무리의 뇌수가 찢어져버립니다. 장대로 더듬고(探竿) 풀[뭉치]의 그림자[로 기척을 살피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쳐 받은(師承) 콧구멍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한 고함침(一喝)을 [단순한] 한 번 고함침(一喝)로 만들지 않는 [고함침의] 쓰임은 위의 세 가지 현묘함과 네 가지 손님과 주인[의 유형] 등[과 같은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방망이질(棒)의 여덟 가지 [쓰임]》 명령에 의거하여 현묘함에 돌아오게 하는 것과 [망념됨을] 쓸어버림을 접하고서 바름(正)을 따르게 하는 것과 현묘함에 의지하여 바름을 해치는 것을 강하게 꾸짖는 것[에 쓰는 것]을 벌주는 방망이질(罰棒)[이라고 합니다.] 진리(宗旨)를 따르는 것을 상주는 방망이질(賞棒)[이 있습니다.] 헛됨(虛)과 참됨(實)을 판별하는 방망이질(辨棒)이 있습니다. 눈 먼 도리깨[처럼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눈 먼 방망이(瞎棒)[가 있습니다.] 보통사람과 성인을 깨끗이 닦는, 바로잡는 방망이(正棒)[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임제종풍(臨濟宗風)에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위로는 모든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수 위의 일입니다. 만약 이 풀어놓은 가르침(說法)에서 떠난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말(妄語)입니다.
79. 고함침과 방망이질도 방편일 뿐이다.
臨濟喝 德山棒 皆徹證無生 透頂透底 大機大用 自在無方 全身出沒 全身擔荷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 然據實而論 此二師 亦不免偸心鬼子
⇒ 임제의 고함침(喝)과 덕산의 방망이질(棒)은 모두 생겨남[이나 멸함]이 없다는 [진리를] 꿰뚫어 깨닫게 하는 것이며 꼭대기를 뚫고 바닥을 뚫은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훌륭한 진리 자체(大機, 체)와 훌륭한 [진리의] 드러냄(大用, 용)에 [있어서] 방향없이(無方, 어디에서든지) 자유자재(自在)하기에 온 몸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온 몸으로 맡아 [육신이라는 물건을] 짊어집니다. [고함침과 방망이질의] 가르침을 펴지 않을 때에도(退)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과 같은] 위대한 사람(大人)의 경지(境界)에 있지만(守) 사실대로 논하자면(據實而論) [임제와 덕산이라는] 이 두 스승도 또한 귀신(鬼子)[들이나 하는] 탐내는 마음(偸心)을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凜凜吹毛 不犯鋒鋩 ◆ 爍爍寒光珠媚水 寥寥雲散月行天
⇒ 살을 에일 듯 [찬 빛을 뿜어내는 칼날에] 작은 털을 불어 [베어버리는 구나]! 날카로운 기세에 덤비지 말라! ◆ 번뜩이는 차가운 빛[을 내는] 구슬이 [담겨 있는] 물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적막하고 구름도 흩어진 [텅 빈] 하늘을 달이 간다!
80. 어디에도 얽매이지 말라. 부처와 조사에게까지도...
大丈夫 見佛見祖如冤家 若著佛求 被佛縛 若著祖求 被祖縛 有求皆苦 不如無事
⇒ [수행의 길에서 정진하는] 대장부(大丈夫)는 부처를 보고 조사를 보기를 원수(冤家)같이 [합니다]. 만약 부처[의 경지]를 구하는 것에 집착하면 부처에게 얽매이게 되고 만약 조사[의 경지]를 구하는 것에 집착하면 조사에게 얽매이게 됩니다. [어떤 경지를] 구하는 것이 있는 것은 모두 고통이니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佛祖如冤者 結上無風起浪也 有求皆苦者 結上當體便是也 不如無事者 結上動念卽乖也 到此 坐斷天下人舌頭 生死迅輪 庶幾停息也 扶危定亂 如丹霞燒木佛 雲門喫狗子 老母不見佛 皆是摧邪顯正底手段 然畢竟如何 常憶江南三月裏 鷓鴣啼處百花香
⇒ ‘부처와 조사가 원수’라는 것은 위의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이는구나!’를 맺는 것이고 ‘구하는 것이 있는 것은 모두 고통’이라는 것은 위의 ‘[사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體)은 곧-그 자체로-옳습니다.’를 맺는 것이며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는 것은 위의 ‘생각이 움직이면 곧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그러집니다’를 맺는 것입니다. 이에 이르면 천하 사람의 혀와 머리를 앉아서 끊어버리고 나고 죽는 [윤회의] 빠른 바퀴[의 회전]을 거의(庶幾) 멈춰 서게 합니다. 위기에서 구원하고 난리를 평정한다는 것은 단하(丹霞 天然, 739-824) 선사가 나무로 만든 부처를 태운 것과 운문(雲門 文偃, ?-949)이 개를 먹이겠다고 한 것, 그리고 [한] 노파가 부처를 보지 않겠다고 한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이는 모두 사악함을 막고 바름을 드러내려는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늘 강남의 삼월을 그리워합니다. 자고새(鷓鴣) 우는 곳에 온갖 꽃의 향기가!
81. 모든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마음의 신령한 빛을 스스로 드러내라. 이 글 조차도 방펀일 뿐이다.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으니 영원토록(萬古) 훌륭한 지혜여(徽猷)! 이 문(門, 선 수행)에 들어와서는 지식(知)과 [분별적] 이해(解)로 [진리를] 묻지(存) 마십시오!
神光不昧者 結上昭昭靈靈也 萬古徽猷者 結上本不生滅也 莫存知解者 結上不可守名生解也 門者 有凡聖出入義 如荷澤所謂知之一字 衆妙之門也 吁 起於名狀不得 結於莫存知解 一篇葛藤 一句都破也 然始終一解 中擧萬行 如世典之三義也 知解二字 佛法之大害故 特擧而終之 荷澤神會禪師 不得爲曹溪嫡子者 以此也 因而頌曰 如斯擧唱明宗旨 笑殺西來碧眼僧 然畢竟如何 ◆ 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으니’라는 것은 위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를 맺는 것이고 ‘영원토록 훌륭한 지혜여’라는 것은 위의 ‘본래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를 맺는 것이며 ‘지식과 [분별적] 이해를 있게 말라’는 것은 위의 ‘이름에 집착해서(守) [주객을 구별하는 분별심(分別心)에 기초한] 이해(解)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것을 맺는 것입니다. ‘문(門)’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과 성인이 [모두] 나고 든다는 의미가 있는데 하택(荷澤 神會, 685-760) 선사는 소위 “지식(知)이라는 한 글자가 모든 오묘한 [이치](妙)가 [나고 드는] 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 ‘이름 붙이거나 모습을 그릴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시작하여(起) ‘지식과 [분별적] 이해를 있게 말라’로 [끝을] 맺으니 한 편(篇)의 얽히고 설킨 [모든] 것(葛藤)이 한 구절(一句)에 모두 깨트려집니다(破). 그러나 [이 책 『선가귀감』도] 한 [분별적] 이해(一解)로 처음과 끝을 삼고 중간에 온갖 행동[에 대한 설명]을 [예로] 들었으니 세상의 서적(世典)들의 세 가지 뜻(三義)과 같 ‘지식(知)’과 [분별적] 이해(解)라는 두 글자는 부처의 가르침에 큰 해(害)[가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것들을 마지막에] 들어 [경고하고]서 마치는 것입니다. 하택 신회 선사가 조계(曹溪)의 정통 후계자(嫡子)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이 같이 으뜸 되는 뜻(宗旨, 진리)을 들어 소리 높여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파란 눈의 중이 크게 웃었을 것을...”이라고 게송(頌)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어찌하겠습니까! ◆ 외로운 달(孤輪)이 강과 산을 외로이 비쳐 고요하고, 저절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네!
禪家龜鑑終
『선 수행자들의 귀감 禪家龜鑒』[의 서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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