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2)

금강경의 핵심 - 종범스님

소리없는 아우성 2013. 6. 3. 08:40

불교 경전이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 45년간 사람들에게 베푸신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엮은 것을 말합니다.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소질과 성향에 맞게 불교의 진리를 설해주는 것입니다. 경전은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의 부처님 제자의 설법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금강경』

『금강경(金剛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줄여서 표현한 말입니다. 『금강경』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수지 독송한다는 점입니다. 『화엄경』이나 『법구경』보다 많이 읽는데, 그러면서도 경전 내용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즉 『금강경』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어려워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많은 경전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은 우리나라의 삼대 경전입니다. 흔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화엄경』이 대략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고, 또 『법화경』 역시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실천에 옮기기 어려워서 그렇지 경전 내용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경우는 드물죠. 그런데 『금강경』은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은 무엇일까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하는 사람마다 달라서, 경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엄경』이나 『법화경』보다 『금강경』을 더 즐겨 읽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수행하는 데 『금강경』이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을 닦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달마 선종, 즉 선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수행의 원전인 『금강경』이 수행의 지침서로서 독송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수행의 방편으로 독송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공덕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금강경』을 읽으면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금강경』의 「사구게」만 독송을 해도 그 영험과 효험이 한량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덕을 위한 방편으로 독송을 많이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도재를 지낼 때 의식 독송으로도 많이 활용됩니다. 의식을 봉행할 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극락세계를 기원하면서도 경을 읽을 때는 『금강경』을 읽습니다. 바로 천도의식 독송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은 업장소멸은 물론이고 소원성취를 위한 공덕독송, 천도의식을 위한 의식독송, 마음을 닦아 가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을 막상 이해하려고 하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살펴보면, 『금강경』의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불설 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 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卽非般若波羅蜜是名般若波羅蜜)

이 말은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즉 반야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뜻이죠.

그런가 하면 “여래설 세계 비세계 시명세계(如來說世界非世界是名世界)”라고 합니다. 즉 “여래는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라 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거든요. ○○이 곧 ○○이 아니고 이름이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라는 말은 무엇이고, 이름이라는 말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따라서 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의 대표 격이 바로 『금강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해석 자체가 어려운 아주 특이한 경전이지만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알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매력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금강경』의 두 가지 해석방법

『금강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인도식으로 이해하는 방법과 중국식으로 이해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해석할 때 세친 보살과 무착 보살이 지어 놓은 금강경 논()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친론과 무착론을 가지고 중국의 주공정밀 선사라는 분이 그 두 가지 논의 요점을 엮어서 해석한 『금강경 찬요』를 지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석서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살펴보기 위한 원본입니다. 즉 『금강경』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질 때 세친 보살의 『금강반야론』, 무착 보살의 『금강반야론』, 주공 스님의 『금강경 찬요』를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한편 중국의 많은 스님들이 『금강경』을 해석했는데, 중국식으로 『금강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육조 스님의 『금강경 육조의 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조 때 한글로 번역했는데 국문학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외 많은 분들이 『금강경』 주석을 달았어요. 우리나라 스님인 야부도천 선사가 게송으로서 『금강경』을 해석한 것이 있는데, 후대의 것으로 전형적인 중국식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중국사람들은 논리보다 직관을 중요시합니다. 한눈에 척 보고 알아서 생활 속에 응용하는 방식이 발달해 있어요. 하나하나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흥미가 없기 때문에 중국 풍토에서는 논리가 발달하기 어렵습니다. 불교학 중에 논리적인 생각에 의해서 모든 것이 펼쳐진다고 하는 유식학이 있는데, 중국 당나라 때 잠시 번역이 되고 성행했을 뿐 끝까지 발달하지 않고 결국 선()으로 돌아갔어요. 즉 논리적 성격보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적(게송)인 표현을 즐겨해 온 것이 전형적인 중국식입니다.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금강경』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금강경』의 의미를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반야라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핵심인데 반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도식이라고 한다면 중국식은 반야를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묘미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번뇌를 줄여 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번뇌가 줄어들면 청정심이 드러나는데, 이 청정심으로 자유자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인도식은 번뇌를 줄이는 데 집중되어 있고, 중국식은 청정심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인도에서는 번뇌를 소멸하고 청정한 생각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으로 『금강경』은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무애라든지 자재라는 말이 발달해 있습니다. 무애하고 자재하게 되려면 번뇌망상을 소멸해야 가능하겠죠. 따라서 번뇌망상의 성격, 생기는 원인, 없애는 방법과 과정을 쭉 설명하는 것이 인도식에 가깝고, 번뇌망상이 없는 청정심이 어떤 성격이고, 그래서 청정심이 활동하는 자재로운 모습, 걸림이 없는 모습, 이런 것을 얘기하면 중국식이 되는 것이죠.

중국에서 발달한 것이 게송인데 게송은 주로 아름다운 얘기를 시로 읊지 복잡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게송으로 잘 읊지 않잖아요. 따라서 중국식은 반야의 무애하고 자재함을 주로 게송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반대로 번뇌망상에서 무애 자재함으로 가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은 인도식 표현입니다

 

『금강경』이야기 - 인도식 접근법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근간이 된 것은 『금강경』의 어떤 모습일까요? 당연히 중국식 표현입니다. 그래서 방법이 잘못된 셈입니다. 인도식 표현을 철저하게 공부한 후에 그것을 응용해서 중국식으로 넘어와야 하는데, 처음부터 중국식으로 접근하면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금강경』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인도식으로 금강경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강경』에서 금강은 비유죠. 다이아몬드, 즉 반야를 비유한 말입니다. 반야는 곧 지혜이고, 반야바라밀경은 지혜로 활동하는, 지혜를 드러내는, 지혜로 생활하는 그런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삶입니다. 반야바라밀, 즉 지혜를 완전히 이루었을 때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 깨달음을 『금강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표현합니다. 『금강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그것은 훌륭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은 반야(般若)이고, 그 반야를 깨달았으니 보리인 것입니다. 지혜의 삶을 사는 것, 즉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반야바라밀이요, 자기 원력과 공덕을 통해 반야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래부터 갖고 있는 반야를 왜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번뇌망상 때문이겠죠. 『금강경』에서는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방편을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기심은 중심생인데, 그 중생의 마음이 번뇌망상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번뇌망상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생의 가장 큰 번뇌가 아상(我相)이죠. 나라는 생각입니다. 나라는 것은 탐욕의 원천입니다. 중생은 무한한 탐욕을 갖고 있는데 소유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특히 남자의 경우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고 합니다. 선거철이면 자신을 찍어 달라고 하는데 결국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죠. 이처럼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이에요. 아주 어린 꼬마에게도 최고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어리석고 유치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입니다.

한편 상대방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도 크죠. 어떤 사람이 어릴 때 어머니가 결핵을 앓아서 감염될까봐 고개를 돌리고 젖을 먹였답니다.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어머니가 자기가 싫어서 외면하는 줄 알고 커서도 사람을 불신했다고 합니다.

누구를 봐도 믿지 못하는 거죠. 번뇌 역시 맹목적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번뇌망상은 항복해야 할 대상이지 인간이 위대하다고 해서 번뇌 자체를 위대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야, 그 지혜의 삶 자체를 칭송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번뇌는 항복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인도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그 첫째가 아상(我相)으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죠. 나 없는 탐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탐욕은 나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나와 관련 없는 일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인상(人相)은 화내는 마음입니다. 화내는 마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자기는 아무리 잘못했어도 잘했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자기 맘에 들면 상대방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맘에 안 들면 상대방도 싫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에 “놈이 하니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놈은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죠. 그런데 오늘날 놈은 욕으로 쓰이잖아요. 언젠가 한번은 고등학교 시험문제에 “누구를 님이라 하고 누구를 놈이라 합니까?”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님,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놈”이라고 답을 적었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바로 그 차이거든요. 남에게는 화를 내지만 자기에게는 관대합니다. 이처럼 인상은 내 맘에 안 드니까 화를 내는 것으로, 자신한테 화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는 것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나한테 적용하는 규칙과 남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달라요. 수자상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오래 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좋은 일도 그치면 미련이 없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죠. 오래 하면 할수록 더 하려고 하는 애착의 마음이 바로 수자상입니다. 이처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말하는 탐진치애는 모두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것, 즉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발심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수행, 항복기심

『금강경』은 발심에 대해서 묻고, 수행에 대해서 묻고, 항복기심에 대해서 묻습니다. 『금강경』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第二)」을 보면 세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먼저 운하주(云何住), 여기서 주는 머문다는 뜻으로 내가 어떤 마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 하는데, 그 마음을 내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여기서 발()은 마음을 일으킨다는 의미죠. 번뇌망상에 찌들어 있는 마음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 공덕이 되는 마음, 자애로운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고, 줄여서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즉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중생 스스로가 번뇌망상 속에서 한평생을 마칠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 같이 살다가 죽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발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의 반대가 중생심이죠. 중생심은 탐진치 삼독심을 의미합니다. 즉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뜻하는 중생심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보리심입니다.

그렇다면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금강경』에서 묻고 있습니다. 즉 운하주 -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운하수(云何修) - 어떻게 닦아야 하며, 항복기심 - 중생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켜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금강경』 자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항복기심이죠. 중생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겁니다. 흔히 항복이라고 하면 상대편을 무찔러 없애는 것이죠. 그런데 중생심을 항복시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은 똑같은데 마음이라는 건 형태가 없기 때문에 무찌를 것도, 버릴 것도 없어요. 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휴망상(休妄想)이라고 합니다. 망상을 쉬는 것이 곧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항복기심입니다. 다시 말해 쓸데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화를 내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중생심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불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바로 성불이니까 너무 쉽죠. 그래서 불교가 오묘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중생의 업습(業習)이 있어서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중생심을 일으키던 습관 때문에 아무리 일으키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뿐이지 곧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심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좀처럼 힘든 경우에는 반대로 청정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발심(發心)입니다. 번뇌가 계속해서 일어나니까 그 번뇌를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공덕을 닦는 것, 이것이 곧 발심수행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항복기심이 곧 발심수행인 것입니다.

 

발심을 위한 네 가지 마음

『금강경』에서는 발심과 수행을 어떻게 설하고 있을까요? 『금강경』에는 발심을 위한 네가지 마음을 일으키라는 뜻의 ‘사심(四心)’과 수행을 위해 여섯 가지를 닦으라는 의미로 ‘육도(六度)’를 표현해 놓았습니다. ‘주사심수육도(住四心修六度)’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조선 시대 초, 불교에 심취한 효령대군이 『금강경』 서문에 적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머물 주() 자로 일으킬 발()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사심을 일으켜서 육바라밀을 닦는다’는 뜻이지요. 발심하여 수행하면 항복기심, 즉 중생의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드러나고, 그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깨달음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먼저 발심을 위한 네 가지 마음, 사심(四心)의 첫 번째는 넓고 큰마음을 뜻하는 ‘광대심(廣大心)’입니다. 광대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금강경』 대승정종분(第三)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佛告須菩提諸菩薩摩訶薩應如是降伏其心)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였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렇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아개영입무여열반이멸도지(所有一切衆生之類若卵生若胎生若濕生若化生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若非有想非無想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있는 바 모든 중생의 종류, 혹은 난생이건, 혹은 태생이건, 습생이건, 또는 화생이건, 혹은 유색이건, 무색이건, 혹은 유상이건, 무상이건, 혹은 비유상이건, 비무상이건, 내가 그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이를 제도하리라.

즉 모든 중생의 종류, 구류 중생을 생각하는 것이 광대심입니다. 중생이 아집에 사로잡혀 나만 생각하니까 좁고 편협하다는 거죠. 이기심 때문에 모든 중생이 있기에 더불어 내가 살아간다는 생각은 안하고 살아갑니다. 중생이 없다면 결국 나도 못 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광대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금강경 찬요』에 보면 광대심을 일으키고 난 후에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으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제일심’이 나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 조그만 이익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부 해탈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곧 제일심입니다.

세 번째는 ‘항심(恒心)’으로 『대승정종분』에 나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실무중생득멸도자(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實無衆生得滅度者)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고, 끝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은 중생으로서 멸도를 얻은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실은 한 중생도 무여열반을 얻은 일이 없다”는 말에 묘미가 있습니다. 중생을 모두 무여열반으로 인도했어도 결국 한 중생도 인도한 일이 없다는 거죠. 이것이 곧 항심입니다. 중생을 인도하기 전이나 인도한 후에도 항상 변함없이 똑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갖기 전과 후의 모습이 다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과 후의 마음 상태가 다릅니다. 흔들림 없는 마음, 항심이 높을수록 정신세계가 높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항심을 일으키는 폭이 클수록 정신세계가 낮은 사람입니다.

자리에 따라서 태도가 변하고 위치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는 사람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됩니다. 중생을 제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전과 후의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춥거나 더울 때, 영광을 얻었을 때나 치욕을 얻었을 때 역시 마음의 변화 없이 같아야 합니다. 죽을 때와 살 때도 같아야 합니다. 오만과 비굴 등 이런 것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사람은 가까이 할 사람이 못 됩니다. 항심을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때를 잊고, 조금 형편이 풀렸다고 해서 나태해지는 사람은 항심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네 번째는 ‘불전도심(不顚倒心)’인데, ‘전도’는 이야기가 뒤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즉비보살(須菩提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발심하여 공덕을 닦을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나올 때가 있거든요. 그것은 전도된 마음이니까 이런 중생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불전도심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가지 마음, 곧 주사심(住四心)을 『금강경』에서는 발심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을 위한 여섯 가지 닦음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켜 발심한 후에 수행을 하는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이르는 말입니다. 『금강경』 묘행무주분(第四)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부차수보리보살어법응무소주행어포시소위부주색포시부주성향미촉법포시(復次須菩提菩薩於法應無所住行於布施所謂不住色布施不住聲香味觸法布施)

그리고 또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서 보시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보시’는 육바라밀을 뜻합니다. 육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여섯 가지를 말하는데, 전부 보시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 보시는 재보시(財布施)를 뜻하고, 지계와 인욕은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보시(無畏布施), 정진·선정·지혜는 법을 일깨워 주는 법보시(法布施)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육바라밀 전체가 재보시, 무외보시, 법보시인 것입니다. 무외보시에서 ‘무외’는 위안을 뜻합니다. 상대방에게 위안을 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의 기쁨을 주고, 평화를 주는 것이죠. ‘지계’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인욕’은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내가 함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옛 속담에 ‘백전백승이 불여일인’이라고 하죠?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한 번 참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참아 냄으로써 이겼지, 싸움으로써 이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택한 방법입니다. 인내로서 이겼을 때는 영원히 이기는 것이고, 싸움으로 이기는 것은 부작용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지계, 인욕의 참 의미는 내가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이 곧 계를 지키는 것이요, 상대방이 나에게 괴로움을 줬을 때 그 괴로움을 같이 주지 않는 것이 인욕입니다. 결국 이 모두가 무외보시인 셈입니다. 두려움 없는 것을 일체 중생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한편 법보시는 내가 공부를 해야 하고, 마음이 안정돼야 하며, 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공부를 안 하면 법을 말할 수 없고, 마음이 들뜨면 설법을 못하며, 또 지혜가 없으면 설법을 못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금강경』의 한 대목인 “응무소주 행어보시”는 말 그대로 ‘집착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사업이고, 그렇지 않으면 수행입니다. 보시 자체가 모두 공덕이 되는 것은 아니고,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 이것이 수행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참된 보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과 딸들을 위해서 평생 동안 후원자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아들과 딸에게 하는 것으로 보면 극락에 가야 하는데, 과연 대한민국 부모가 모두 극락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평생을 아들과 딸을 위해서 서비스를 했지만, 그것은 『금강경』의 입장에서 보면 응무소주 행어보시, 무주상보시가 아닙니다. 집착하는 바 없이 한 것이 아니라 뭔가를 바라고 했거든요. 바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모든 일을 내 생각대로 몰고 가는 겁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당신 생각대로 끌고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들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며느리를 내 맘대로 하려고 하겠어요?  며느리 역시 마찬가지죠. 친정어머니도 내 맘대로 못했는데 시어머니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억지로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어 준 놀부의 심보와도 같습니다. 각자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좋지만, 내 맘대로 이끌어 놓고 난 후에 돕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리고, 다시 잇겠다는 놀부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놀부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집착 없이 베푸는 마음 - 무주상보시의 공덕

보시할 때 중요한 것은 무주상보시여야 합니다. 베푸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베풀겠다는 무주상보시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는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묘행무주분(第四)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부(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수보리여, 남·서·북방과 모퉁이·위·아래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수보리보살무주상보시복덕역부여시불가사량(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福德亦復如是不可思量)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동서남북상하 허공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집착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는 공덕은 온 우주와 같이 한량 없다는 뜻입니다. 무주상보시는 그런 의미에서 『금강경』의 수행덕목입니다. 다시 말해 발심은 이와 같이 네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수행은 이와 같이 무주상보시로서 육바라밀을 닦을 때 『금강경』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부처님과 중생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부처님은 집착을 안 하고, 중생은 집착을 하는 그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 눈으로 볼 때 집착으로 바라보면 감옥인데, 집착을 떠나서 바라보면 그것은 해탈입니다. 보는 것은 절대 허물이 없죠. 집착하는 마음이 허물입니다. 눈으로 보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누가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집착하지 않으면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집착은 곧 애증심을 갖는 겁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집착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좋다, 혹은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해탈입니다. 중국 남종선에서 『금강경』이 발달했는데 우리가 말하는 달마선이 그것입니다. 이 달마선의 중요한 내용이 무념(無念)입니다. 따라서 무념은 중국 선종의 핵심입니다.

무념은 보고, 듣고, 맛보지만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고 사고도 일어납니다. 좋고 싫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누구나 무념 경지에 이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없는 마음, 그것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를 제대로 실천하면 그 한량없는 공덕으로 성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금강경』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강경』은 중생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고, 중생의 마음을 없애려면 먼저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여섯 가지 보시행을 집착 없이 닦아야 합니다. 수행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고, 집착함 없이 공덕을 닦으면 그것이 수행입니다. 무주상보시, 집착함 없이 보시하는 것,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스물일곱 가지의 질문과 답변

달마 남종선에서는 ‘육진삼매(六塵三昧)’라는 말을 합니다. 색성향미촉법 육근(六根)에 티끌진() 자를 붙여서 육진삼매라고 합니다. 삼매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데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삼매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무조건 못 보게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보여 주되 딴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눈 감고, 귀 막고 다닐 수는 없거든요. 듣되 무념으로서 듣고, 무주상, 상에 집착함 없이 대하면 그게 곧 해탈입니다. 이것이 수행이고, 바로 성불입니다. 여기까지 성불을 설명하고 나니까  인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스물일곱 가지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의심 하나 하나를 제거해 주기 위한 설법이 그 다음에 펼쳐지는 데,  27단위라고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금강경』의 핵심은 발심수행입니다. 『금강경』 전체가 32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1분에서 제4분까지 발심수행의 중요성을 담았고, 5분에서 제32분까지 그 발심수행에 대해서 궁금한 점, 스물일곱 가지 질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내용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궁금증이 『금강경』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第五)에 나오는데, 부처님께서도 성불하기 위해서 보시행을 닦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곧 상에 집착한 것이 아니냐는 뜻이죠. 여기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니라. 만약 모든 상이 다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즉 부처님은 형상의 부처님이 아니라 반야의 부처님이라는 거죠. 반야라는 것은 상을 여읜 겁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행은 ‘무주상보시’이고, 성불도 ‘무상성불’입니다. 곧 상()을 여읜 성불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을 32 80종호라고 해서 부처님만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금강경』에서는 무상, 즉 형상이 없는 부처님을 설명합니다. 이는 반야의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도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거죠. 상은 허망한 거니까 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야부처님을 보는 겁니다.

큰스님들이 설법할 때 주장자를 손에 쥔 채 팔을 들어 보이죠. 이는 팔을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보라는, 즉 반야를 보라는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에 집착하지 말고, 반야-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에서 상이 아닌 마음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반야성불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어려워합니다. 수행도 무주상보시를 하고, 성불도 반야성불을 한다고 하니까 누가 하겠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것이 정심희유분(正信希有分-第六)입니다.

수보리 백불언(須菩提白佛言)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 언설장구 생실신부(世尊頗有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生實信不)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알찬 믿음을 낼 수 있겠나이까?

“불고수보리 막작시설(佛告須菩提莫作是說)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

여래멸후후오백세유지계수복자어차장구능생신심이차위실(如來滅後後五百歲有持戒修福者於此章句能生信心以此爲實)

여래가 멸한 후 후 오백 세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 이 구절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해 신심이 생길 것이다.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當知是人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일불, 이불, , , 오불에서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벌써 무량한 천만 불에 모든 선근을 심었고,

문시장구 내지일념생정신자(聞是章句乃至一念生淨信者)

이 구절을 듣거나 한 생각만으로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들이니라.

수보리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득여시무량복덕(須菩提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여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전생에 공덕을 많이 지었고, 무량백천만억불로부터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의문점들을 수보리와 부처님의 질의응답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풀어 나가는 것이 『금강경』에서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금강경』 다시보기 - 응무소주 이생기심

『금강경』에서 무아(無我)를 자꾸 설명하니까 “과연 ‘나’라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오안을 설명합니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나 형상의 나가 없을 때 참된 나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설하신 오안을 살펴보면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이 있거든요. 그런데 형상의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렸을 때 오안이 밝아진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육안이 있어 세상을 보고, 천안이 있어 천상을 보고, 혜안이 있어 근본을 보고, 법안이 있어 중생들을 작은 법으로 인도합니다. 큰 법으로 인도할 사람은 큰 법으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법안이 있어야 중생교화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오직 부처님만이 가진 눈이 있는 데 그것이 곧 불안(佛眼)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은 아집이 있기 때문에 눈이 어둡고, 아집이 없을 때 오안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면 누가 건드려도 모릅니다. 근심이 꽉 차 있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줄어들어야 주위 사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무아라야 오안이 밝아집니다. 아집이 많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第二十四)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약삼천대천세계중소유제수미산왕여시등칠보취(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로 유인(有人)이 지용보시(持用布施)하고 약인(若人)이 이차반야바라밀경내지사구게등(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야 위타인설(爲他人說)하면 어전복덕(於前福德)은 백분(百分)에 불급일(不及一)이며 백천만억분내지산수비유(百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에 소불능급(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야, 가령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에 있는 모든 수미산 왕과 같은 칠보더미를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한다 하더라도…… 견주어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앞서의 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도 능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니라.

이처럼 『금강경』에서 말하는 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잘 간직하되, 「사구게」라도 수지독송해서 다른 사람에게 연설하면 공덕이 더 높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금강경』을 연설할 때는 부동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부동심은 애증심이 없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얘기를 한다고 해서 잘 듣는 사람은 좋아하고, 제대로 듣지 않고 졸기만 하는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여부동한 상태로 『금강경』을 이야기해야 옳은 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금강경』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얘기 나눌 때 상대방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고 해서 화 내지 마세요. 상에 집착하니까 애증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연설하는 사람은 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상에서 상이 아닌 것을 보는 것이 반야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게송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라.

일체 유의법은 꿈과 환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나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 지어다.

이 말은 세상 만물이라는 것이 형상을 갖고 있는 일체 유위법인데 모두 허깨비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거죠. 세상에 존재하는 형상의 실체를 지혜로 보면 좋아하고 싫어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번뇌로 보니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죠. 이렇게 본다면 세상에 집착하고 화낼 것도 없는데, 스스로 지혜가 모자라고 판단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따라서 상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서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도의 경지이고, 반야바라밀입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것이 어렵지, 집착하지 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죠.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 쉬워야 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중생은 반대입니다. 하는 것은 쉽고, 하지 말라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불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해 가는 방법이 순서를 뛰어넘어서 중국식 게송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초부터 공부해 나가면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부처님은 결코 어렵게 설명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주상보시를 실천하고,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허물이 왔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매사에 애증심을 갖는 것이 허물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게 허물입니다. 애증심이 없으면 곧 해탈입니다. 본다고 해서 허물이 아니고, 보더라도 좋고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게 해탈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금강경』 안에는 「사구게」도 있고, 「이구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야를 증득하고 나면 증지사교라고 해서 비록 지혜의 말일지라도 말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간 후에 배에서 내리는 것처럼 청정한 반야법도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금강경』은 수행을 잘 하도록 하는 것이 경전입니다. 모든 경전들이 경마다 중요한 몫이 있는데, 『금강경』은 발심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고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실천하는 것이 곧 『금강경』의 수행공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