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스님의 84명 큰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분이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입니다. 스님의 저술로서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문에서 표본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마조스님이 이 책을 보고 법을 자유자재하고 융통자재하게 구술했다고 크게 칭찬하고 '대주(大珠)', 즉 큰 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근거가 되어 스님을 '대주(大珠)'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전등록」에도 대주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데 선문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체를 상세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몇가지 법문을 인용하여 대주스님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중도(中道)입니까." "중간이 업으며 또 양변이 없는 것이 중도이니라." "어떤 것이 양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곧 양변이다. 밖으로 소리와 색에 묶이는 것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고 한다. 밖으로 색(色)에 물들 지 아니하면 저 마음이 없다고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 마음이 없다 고 하는데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거니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하며 참 여래도(如來道)라 한다. 여래 도란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경계이니 경(經)에 이르되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 몸도 또한 그렇다' 하였다. 그러므로 일체 색이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곳에 무심함이며 모든 곳에 무심함이란, 즉 일체 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다. 색이 공했다고 하며 또 색에 법(法)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모든 곳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열반·적멸·선정·견성을 얻으려고 한다면 틀린 것이다."
중도란 중간도 없고 또 양변이 없는 것입니다. 양변을 여의면 중간이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무엇을 양변이라 하는가. 피차심(彼此心)이 있는 것이 양변이니 예를 들면 주관과 객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성색 경계에 속박되는 것을 저 마음[彼心]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此心]이라 하는데 밖으로 성색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 즉 인·경(人境)을 함께 없애면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境)이 즉 심(心)이고, 심(心)이 즉 경(境)이기 때문에 가운데 또한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이렇게 된 사람을 중도를 깨친 사람이라 하고 이를 여래도라 하고 조사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몸이고 불도를 증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색(色)이 빈 사람은 일체 심(心)도 공합니다. 결국 피심과 차심이 없는 동시에 일체색이 공이 되고 일체법이 동이 되며 따라서 색공(色空)인 동시에 법공(法空)입니다. 이것이 일체처에 무심(無心)입니다. 유심·무심을 다 떠났으니 진무심(眞無心)이라 합니다. 즉 중도무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가.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 몸을 보는 것입니다. 왜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몸을 보는 것인가. 유는 무를 원인으로 하여 설 수 있고 무는 유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본래 유를 세우지 아니하면 무도 또한 있을 수 없고 이미 무가 있을 수 없으면 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유와 무가 서로 의지해서 있으니 이것은 이미 의지해서 있으므로 모두 생멸입니다. 다만 양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하기를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인가? 자성청정심을 증득한 것을 유(有)라고 하고 자성청정심을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유(有)를 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자성청정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무(無)를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능엄경」에는 이러한 견해를 세우면 무명이요, 이런 견해를 보지 않으면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합니다. 즉 요견무견을 떠난 중도를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오문(頓悟門)은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무념이란 사념(邪念)이 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념(邪念)이란 유(有)를 생각하고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고 유·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념(正念)입니다. 선(善)·악(惡)을 생각하는 것이 사념이고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념이요, 고·락, 생·멸, 취·사, 원·친, 애·증을 생각하는 것은 사념이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정념이라고 하는데 정념이란 곧 중도입니다. 정념이란 보리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자성청정만 생각하되 보리도 가설로 세운 것입니다. 실지로는 자성청정을 깨쳐서 양변을 여읜 것이 쌍차쌍조가 될 때를 말하는데 이는 부처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이심전심(以心傳心)할 뿐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설로 보리라고 세운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얻을 수 없으므로 유념이 아니고 진념(眞念)입니다. 이와 같이 양변이 없고 따라서 중간도 설 수 없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찾아볼 수 없듯이 양변을 찾아볼 수 없는 동시에 가운데도 찾아볼 수 없는 동시에 가운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정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양변을 떠날 것 같으면 부처의 참 몸을 보는 것이요, 중도를 내놓고는 부처님의 참 몸이 없는 것입니다. 표현은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하지만 모두 다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