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설청전수(說聽全收)
세존사이트 / 성철스님 법어집 / 장경각 / 불기 2536.4.
현수스님은 대 · 소승의 모든 교법(敎法)의 차별이 모두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하여 심식(心識)에서 비롯하여 나타난 것이라 하면서 본영상대(本影相對)와 함께 설청전수(說聽全收)를 설한 것입니다. 본영상대는 대승교와 소승교의 도리를 본질(本)과 그림자(影)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이고, 설청전수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현수스님은 설청전수를 네 가지로 구별해서 해설하였는데, 나중에 징관스님은 이것을 동교(同敎)와 별교(別敎)에 따라서 각각 네 가지로 분류하여 보다 상세하게 해설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한수스님의 학설을 해설한 다음에 징관스님의 학설을 계속 인용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법의 근원을 심식(心識)에 두고, 그 도리를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하였지만 그 근본사상도 또한 중도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說)'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한다는 말이고, '청(聽)'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듣는다는 말이므로 이것은 바로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설은 능(能)이고 청은이고, 청은 용입니다. 설과 청이 '전체를 거둔다(說聽全收)'함은 설과 청, 능과 소, 체와 용이 상즉상입하여 원융무애한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설법하는 부처님 따로 있고 교화받는 중생이 따로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 마음 그대로이지, 부처님의 마음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하느냐 하면 체즉용(體卽用)으로서 체(體)가운데 용(用)이 전부 구비돼 있다는 말입니다. 불심을 체로 잡고, 교화할 중생을 용으로 삼으면 체즉용으로서 중생 다르고 부처님 마음 다르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 이대로가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 이대로가 중생인데, 하물며 설하신 가르침은 그것을 능과 소로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부처님 마음 가운데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다 중생심 가운데 내재되어 있어 이 중생심을 여의고 부처님 마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용즉체(用卽體)를 표현한 것입니다.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를 떠나서 중생이 없고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가운데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이 쌍존(雙存)으로서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으로서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즉 부처와 중생이 서로 듣고 설법을 하지마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설하고 부처가 듣는다든지, 부처가 설하고 중생이 듣는다고 하든지 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 쌍존(雙存)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부처와 중생을 모두 긍정하여 쌍존을 말했지만, 이번에는 양쪽을 다 부정하여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쪽이 모두 형상을 빼앗는다는 것'은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므로, 중생이 부처라고 할 때는 부처가 아니고, 부처가 중생이라 할 때는 또 중생이 아니므로 서로 부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성립하지 못하여 부처도 찾아올 수 없고 중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부처님이 설하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중생의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이 설할 수 없어 체(體)와 용(用)양쪽이 다 쌍민해버려 두 모습이 모두 끊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쌍차쌍조하고 쌍조쌍차해서 차조(遮照)가 동시에 되어 원융무애하여야 실제로 일승원교(一乘圓敎)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승사구(大乘四句)나 지금 설명한 설청사구(說聽四句)는 그 표현방법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4구가 원융무애하여야 구경(究竟)이 되어 참다운 중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동교와 별교를 달리 말하는 것은 상즉과 상입의 분리에 입각하여말하는 것입니다. 상즉이 즉 상입이고 상입이 즉 상즉인데, 은밀히 보면 상즉보다도 상입 이것이 더 묘하다고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석을 엄격하고 미세하게 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동교(同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 밖에 달리 중생이 없어 부처 이대로가 중생이 되고, 둘째는 중생의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어 중생이 곧 부처이고, 셋째는 부처의 진심이 나타날 때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설함과 들음이 서로 쌍존해서 두 가르침이 같이 성립함으로써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와 중생이 완전히 쌍존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므로 서로 빼앗아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어 설함과 들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이것은 쌍차를 말합니다. 위의 동교 네 구는 이사무애한 상즉면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별교(別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 가운데 있어 중생이 사라지고, 둘째는 부처가 중생 가운데 있어 부처가 사라지며, 셋째는 중생과 부처가 모두 진실해서 각각 완연히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으니 이것은 쌍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 가운데 중생이 있어 중생이 부처와 같아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중생 가운데 부처가 있어 부처가 중생과 같아 부처를 찾을 수 없으니 이것은 곧 부처와 중생을 모두 가리는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별교 네 구는 사무애한 상입면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다로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쌍조이든 쌍차이든 서로 동시가 되어 쌍조가 즉 쌍차이고 쌍차가 즉 쌍조가 되어 서로 원융무애하여야 구경법(究竟法)이지, 만약 쌍조를 주장하고 쌍차를 버리든가, 쌍차를 주장하고 쌍조를 버리면 이는 곧 편견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도 사실은 원융무애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지 실제로 알고 보면 쌍차 속에 쌍조가 들어 있고, 쌍조 속에 쌍차가 들어 있어 원융무애한 도리에는 티끌만큼의 손색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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