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4-6. 출가수행자의 생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6:09

4-6. 출가수행자의 생활


최하단 생활의 의미

불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승가야말로 무엇보다도 훌륭하고 좋은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은 ‘성스러운 수행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러면 비구들은 승가생활에서 어떻게 불도를 실천했는가. 그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먼저 탁발이 있다. 탁발이란 다름 아닌 걸식이다. 승가에서의 비구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의복을 단정히 하고 거리로 나가 음식을 얻어 그것으로 하루를 살았다. 말할 것도 없이 걸식은 인간생활에서 가장 밑바닥의 삶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자진해서 이런 생활방법을 선택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한 경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샤카(釋迦)족이 살고 있는 카필라바스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자파라니구로다 동산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그때 비구들 사이에 무엇인가 언쟁이 있었다. 때문에 부처님은 그들을 물리치고 혼자 의복을 갖추고 발우를 들고 성안으로 들어가 행걸(行乞)을 했다. 탁발을 끝낸 부처님은 마하바나(大林)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해가 기울 무렵 일어나 아자파라니구로다 동산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비구들은 한 사람 또 한 사람 부처님 앞으로 모여들어 예배하고 곁에 앉았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처님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수행자들이여, 이것(탁발)은 이 세상 모든 생활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이다. 수행자는 모두 걸식을 하며 지낸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가끔 ‘너희들 비구들은 손에 발우를 들고 유행한다’고 험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행자들이여, 양가의 자식들이 굳이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어 여기에 온 것은 바른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에게 강요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빚이 있어서 도망쳤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공포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생·노·병·사·수·비·고·우·뇌에 둘러싸여 있다. 고민 속에 빠져 있다. 그것은 한 치의 빈틈도 없다. 우리는 그같은 고의 집적을 없애는 방법을 깨닫고자 여기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수행자들의 출가이유와 걸식이라는 최하단의 생활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렇게 해서 출가한 양가집 자식들이 어이없게도 엄청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을 일으키고, 마음에 분노를 품고, 나쁜 생각을 하고, 부주의하고 마음이 산란하고, 제근(諸根;감각기관)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겠는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화장터에서 타나 남은 나무를 꺼내 똥칠을 한 것처럼 마을에 두어도 땔감으로도 쓸모없고, 숲에 두어도 목재로도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출가해서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재가자로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아울러 출가자로 출가의 의의(意義)마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설법하는 어조는 언제나 고요했다.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게’ 차근차근 간절하게 말씀했다. 질타하는 듯한 감정의 솟구침 같은 것은 이분의 설법 속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부처님의 설법은 어딘가 질타하는 느낌이 강하게 배어 있다. 생각건대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비구들에게 탁발의 생활이란 결코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걸식생활을 하는 어려움은 자칫하면 모처럼의 출가의지를 좌절시킬 우려가 있다. 부처님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걸식생활은 모두 생활방법 가운데 가장 밑바닥이다’라는 부처님의 말뜻 속에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쏟는 만 가지 배려랄까 염려 같은 것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어째서 이러한 생활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한다. 이쯤에서부터 부처님의 말씀은 점차 질타의 기색을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은 ‘왕에게 강요받은 것도 아니다. 빚 때문에 도피한 것도 아니고 공포 때문도 아니다. 또 생활이 궁핍했기 때문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양가의 자제들이 자진해서 ‘이러한 생활에 임하는 것은 바른 진리*(바른 진리:reasonableness, atthavasa. 義趣라고 한역)를 깨닫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느냐’하는 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인간으로서의 최고선을 향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부처님이 이 설법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며 ‘성스러운 수행’이다. 인간의 하찮은 욕망과 싸워서 최고선을 실현하고자 정진하는 것이다. 그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탁발이었던 것이다.


달의 비유

그러면 그 탁발의 본모습은 어떠했는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가르쳤는가. 이 문제는 아함부의 여러 경전을 보면 그 대요를 알 수 있다.

비구들은 새벽 일찍 일어난다. 해가 뜬 다음에 일어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부처님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악마들은 그들에게 접근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가르친 적도 있었다. 새벽에 일어난 비구들은 이내 옷을 단정히 고쳐 입고 발우(밥그릇)를 들고 마을이나 인가(人家)로 향한다. 이를테면 기원정사에서 사밧티까지의 거리는 2~3km쯤 되는데 그 길을 질서있게 걷는 것이다. 마을이나 촌락에 들어오면 묵묵히 집집의 문 앞에 선다. 무엇이라고 경을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 오직 침묵 속에서 조용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애조띤 목소리를 내며 구걸을 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밥그릇이 채워지면 마을에서 물러나 해가 중천에 머물 때까지 적당한 장소에서 음식을 먹었다. 오후에 식사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 탁발의 마음가짐을 부처님은 가끔 비구들을 위해 설명하곤 했다. 그 한 가지가 ‘월유(月喩)’라는 제목이 붙은 경*(남전 상응부경전(16·3)月喩. 한역 잡아함경 (41·18) 月喩)인데 월유란 달에 비유했다는 뜻이다.


이 역시 기원정사에서의 일이었다. 어느 때인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설법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재가(在家)에 가고자 할 때는 달처럼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가라. 그리고 재가에 도착해서는 항상 새로 들어온 비구처럼 겸손하여라. 비구들이여, 혹이 옛 우물을 들여다보고 또는 산의 절벽이나 냇물 속을 들여다보고자 할 때는 그 몸과 마음을 단정히 가다듬고 다가가라.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재가에 가려고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접근하도록 하여라. 재가에 이르러서는 겸손해 지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저 카사파(迦葉)는 달처럼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재가에 가고, 또 재가에 이르러서는 신참의 비구처럼 겸손하였다.“

여기까지는 부처님의 말씀이 대충 비유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부처님은 손을 들어 허공에다 흔들며 탁발의 구체적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손은 허공에 주저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고 속박되는 일이 없다. 비구들은 이와 같이 어떤 재가에 가서도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구속받는 일 없이 다만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과 공덕을 원하는 자는 공덕을 베풀기를’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라. 그리고 자기가 얻었을 때는 그것을 기꺼이 여겨 환희할 것이며 또 타인이 얻게 되었을 때도 역시 그것을 기꺼이 여겨 환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비구여야 비구로서의 이름에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탁발의 자세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비구들이여, 저 카사파는 어떠한 재가에 가서도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마음을 뺏기는 일이 없으며 구속받는 일이 없었다. 그는 다만 얻고자 하는 것을 얻도록 바라고 공덕을 원하는 자는 공덕을 베풀도록 바랐다. 그리고 자기가 얻베 괴었을 때에는 그것을 기꺼이 여기고 또 다른 사람이 얻게 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기꺼이 기뻐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비구가 재가에 걸식하러 가는 데 적당한 마음가짐이다.


이 경의 서술은 계속해서 카사파의 탁발하는 행위를 칭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카사파란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마하카사파(摩訶迦葉)를 가리킨다. 그는 ‘두타제일(頭陀第一)'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두타란 지금에는 별로 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근본을 따지자면 범어 ’dhūta'를 소리대로 dhgarls 말이다. 두타란 ‘털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부처님의 제자들이 의·식·주에 탐착되는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한 실천을 자칭하는 것이다.

두타에는 열 가지 실천항목이 있는데 그 요지는 일상생활에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덕을 닦고 실천하는 것이다. 탁발은 그 가운데 하나로, 요컨대 불제자들은 그것을 실천해야 하고, 탁발은 두타행의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경에서 탁발행의 모법을 보이는 카사파를 극구 칭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다음 대목은 특히 기억할 만한 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저 카사파는 달처럼 그의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재가로 간다. 재가에 가서는 신참의 비구처럼 겸손하다.


부처님이 여기서 달의 비유를 든 것은 까닭이 있다. 달은 맑고 아름다운 빛으로써 소리없이 집집의 문전을 찾아간다. 비구들이 탁발하기 위해 재가를 찾아가는 데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달의 비유’를 든 부처님의 마음이며 바람이었다. 그리고 모범을 보인 것이 카사파였던 것이다. 뒤날 카사파가 ‘두타제일’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고 보아진다.


설사 못 얻는다 해도

탁발이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의 보시에 의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얻고자 원하는 사람은 얻는 일을 공덕을 원하는 사람은 공덕을 베풀 것을’ 담담하게 생각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즉 밥그릇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깨끗이 씻은 발우를 그냥 들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때 부처님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4·18) 團食. 한역 잡아함경(39·15) 乞食)은 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마가다국 판차사라(五葦)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마침 젊은 남녀가 선물을 교환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부처님은 그날 아침도 언제나처럼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려고 마을로 들어섰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축제로 들떠 있었던 탓으로 아무도 공양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의 표현대로 하면 부처님은 ‘깨끗이 씻을 발우를 그냥 들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빈 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악마를 만났다. 마라(악마)는 부처님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네가 음식을 얻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빈 발우다.”

“그럼 사문이여, 다시 한 번 판차사라 마을로 들어가도록 하여라.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음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설령 내가 음식을 얻지 못했어도 보라, 우리는 즐겁게 살아간다. 저 광음천(光音天)과 같이 우리는 기쁨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간다.”

이 말을 들은 악마는 풀이 죽어 모습을 감추었다.

경전의 서술은 악마를 등장시켜 부처님의 내면적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 묘사가 의미하는 바는 식욕의 유혹이다. 아무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매일 탁발에서 언제나 흡족한 음식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경전은 때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은근히 비치고 있다. 그런 때는 부처님도 공복인 채로 하루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면 누구라도 문득 식욕에 마음이 동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경이 암시하는 것도 이러한 탁발의 불운과 그로 인해 부처님에게서 문득 일어났던 마음의 동요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공양을 얻지 못한 것은 그날이 축제의 날이어서 모두가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문의 공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덕분에 부처님은 빈 발우를 들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서 문득 생각했던 것은 지금쯤 모두 선물교환이 끝났을테니 다시 가면 공양을 얻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탁발에는 여러 가지 법식(法式)이 있고 금제(禁制)가 있다. 이를테면 ‘차제걸식(次第乞食)’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차제란 순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걸식을 하되 건너뛰거나 하지 말고 순서대로 하라는 것이다. 걸식을 하다보면 공양을 잘 주는 집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집도 있을 것이다. 이때 수행자가 공양을 잘 주는 집만 찾아간다든가 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또 같은 거리를 여러 번 찾아가는 일도 금지되어 있다. 이것이 ‘차제걸식’이다. 차제걸식은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먹는 문제만을 해결키 위해서라면 걸식하기 편한 곳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은 비록 음식을 얻어먹는 처지였지만 누구보다 고고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읽은 경문에는 이런 긍지가 잘 나타나 있다. 광음천(光音天)이란 아바사라데바(Ābhassarādevā)를 번역한 말이다. 그것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신의 하나로 위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말이다. 광음천은 또 기쁨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며, 말을 하면 입에서 깨끗한 광채가 난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광음천에 비유해 ‘우리도 기쁨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탁발의 방법인 차제걸식을 하다가 공양을 받지 못해 하루낮 하루밤을 공복으로 보냈는데도 그 마음은 이렇듯 평온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탁발이란 출가한 비구들에게는 매일같이 하는 진지한 승부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굶주림이라는 가장 본능적인 욕망 앞에서 어떻게 자기를 제어하고 극복해야 할 것인가. 탐욕에 의한 소유만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승부에서 승자가 될 수 없다. 출가비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승자이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원한 승자가 되고자 매일 아침 진지한 승부를 겨루어 나감으로써 완성과 해탈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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