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分別)
버려야 할 분별, 가져야 할 분별 |
S : vikalpa T : rnam par rtog pa E : discrimination |
‘분별심을 버려라’, 한두 번 들어본 말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분별해라’는 표현은 접하기가 극히 드물 것이다. 같은 ‘분별’인데도 무언가 극명한 대조적 느낌이 온다. 이것은 불교술어의 한역상의 결과물이다. 원어상 별개임에도 같은 한자를 역어로 채택함으로써 또다른 면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가곤 한다.
상상의 날개로 차별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 우리들이 버려야하는 ‘분별(分別)’은 산스끄리뜨 위깔빠(vikalpa)의 역어이다. vi + √kīṛp로 분석되는 위깔빠 자체에는 ‘차별하는 것’ ‘상상하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정확하게는 ‘허망분별’이라 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앞글자를 빼고 그냥 ‘분별’로 사용한다. 사유(思惟)나 계탁(計度)으로도 한역되는 위깔빠는 사유양탁한다는 의미로, 곧 마음과 마음작용이 대상에 대해 작용을 일으킬 때 그 상을 취해 생각해 헤아리는 것이다. 《성유식론》7권(T31-38c19))에서 “전변된 견분(見分)을 분별이라 한다.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8권(T31-46b8)에서 “모든 잡염하거나 청정한 마음과 그 마음작용을 모두 분별이라 한다. 대상을 연해 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따라서 이 ‘분별’에는 세속적 관점에서 대상을 취해 그것에 상상의 날개를 펴 호·불호(好不好), 가·부(可否) 등으로 차별한다는 의미가 있다.
관점 따라 구분 달라
이러한 분별에 대해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그 행상 등에 의지해 자성분별(自性分別), 수념분별(隨念分別), 계탁분별(計度分別) 3가지로 분석한다. 전5식에서 일어나는 자성분별은 심(尋)이나 사(伺)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해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지각작용이다. 수념분별은 의식에 상응하는 염(念)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해 과거의 사태를 기억하는 되생각, 기억의 작용이다. 계탁분별은 의식에 상응하는 산란한 혜(慧)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해 판단하고 추리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잡집론》2권에서는 이 3가지 분별을 의식의 작용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자성분별은 현재, 수념분별은 과거, 계탁분별은 3세에 속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임운(任運)·유상(有相)·무상(無相)·심구(尋求)·사찰(伺察)·염오(染汚)·불염오(不染汚)의 7가지 분별을 건립한다. 임운분별은 5식신이 자신의 대상에 대해 저절로 전전하는 것이며, 유상분별은 자성분별과 수념분별로서 과거와 현재 대상의 여러 가지 상을 취하는 것이며, 무상분별은 미래 대상을 바래서 행하는 것이다. 심구, 사찰, 염오, 불염오 4가지 분별은 모두 계탁분별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다.
대승 들어 무분별지 강조
한편, 대승에 들어서는 이것들을 범부의 분별로서 인정한다. 특히 《섭대승론》에서는 범부가 일으킨 분별로 인정해 미망(迷妄)으로 발생한 것이고 진여의 이치와 계합하지 않으며, 분별에 의지해 진여의 이치를 여실하게 깨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곧 망념을 수반한 분별[虛妄分別]로 이해한다. 만약 진여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범부의 분별지를 버리고 무분별지에 의지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또 보살은 초지에서 견도에 들어갈 때 일체법의 진여를 연해 능지(能知)와 소지(所知)의 대립을 초월한 참 지혜, 무분별지를 성취할 수 있다. 이 무분별지는 준비단계인 가행(加行)과 근본, 후득의 세 단계가 있으며, 그 순서에 따라 가행지, 근본지, 후득지라 한다.
다른 의미의 분별: ‘부분차별’ ‘분리분석’ ‘분별연설’
불교에서 ‘분별’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와 상반된 의미로도 분별이 있다.
구분, 분별, 분석의 의미를 갖는 비바쟈(vibhajya)이다. 앞의 위깔빠에 비해 긍정적 의미를 갖는 비바쟈는 다 갖추면 ‘부분차별’이지만 이것도 분별(分別)로 한역된다. 곧 교법을 분류하고 분석하고자 여러 가지 입장에서 연구하고 고찰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아비달마 20부파 가운데 하나인 분별설부(分別說部)를 ‘비바쟈바딘(Vibhajya-vādin)’이라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선견율비바사》2권에서 “불법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분별설이다”와 《구사론기》20권에서 “비바(毘婆)를 분별이라 한다”에서는 비바쟈(vibhajya, rnam par phye nas)를 분별로 한역한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에는 ‘가려냄’이 있다. 이것과 저것을 가려내는데, 특히 혜(慧)의 힘으로 법을 가려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을 ‘간택(簡擇)’이라 하고, 그 힘을 ‘택력(擇力)’이라 한다. 여기서의 ‘택(擇)’도 긍정적 의미에서의 ‘분별’이다. 열반은 이 택력에 의해 얻어진 소멸[擇力之滅]이기 때문에 택멸(擇滅, pratisaṃkhyā-nirodha)이라고도 한다. 무위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외에 정확한 식별, 건전한 분석 등의 의미인 빠리체다(pariccheda, yongs su bcad pa)가 있다. 《잡집론》1권에서 “촉(觸)은 셋의 화합에 의해 근들의 변화를 분별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에서의 ‘분별’이 빠리체다(pariccheda)의 용례이다. 또 상술, 설법 등의 의미인 니르데샤나(nirdeśana, bshad pa)도 ‘분별’로 한역되는데, 다 갖추면 ‘분별연설’의 의미가 된다. 《법화경》〈방편품〉에서 “모든 붓다는 방편력으로 일불승에서 분별해 셋을 말한다”라 할 때의 분별이 그 예이다.
분별을 대할 때 반드시 버려야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일종의 극단에 치우침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분별’에 있어서도 부정의 의미와 더불어 긍정의 의미도 있고 여타의 의미도 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란 말이 있듯이 해당 술어가 갖는 한문상의 의미에 안주하지 말고 그것에 상응하는 원어까지도 살펴 각 술어의 용처에 맞게 바르게 사용해야 불교의 맛이 살아날 것이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