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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는 물건이더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들면 좋게 보인다는 말이다. 곧 사람들이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각각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과 이어지는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정견(正見)을 강조한다. 우리말 ‘보다’가 폭넓은 의미를 갖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단순히 눈의 작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알다’ ‘이해하다’ 또는 입장을 나타내는 ‘견해’ ‘사상’ ‘주의’ ‘주장’ 등의 의미도 아우른다. dr.s.t.i 그리고 darśana, paśyati 견(見)에 상응하는 산스끄리뜨는 대표적으로 드르쉬띠(dr.s.t.i)이다. ‘보다’ ‘주목하다’ ‘발견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dr.ś로부터 나온 여성형 명사로, 곧 ‘~을 보는 것’ ‘~을 주시하는 것’ 등의 의미가 된다. 곧 눈에 의해 보거나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내는 것이 된다. 이와 유사한 말로 다르샤나(darśana)와 빠쉬야띠(paśyati)가 있다. 주로 ‘관찰’로 한역되는 다르샤나는 정신적 통찰이나 분별의 의미를 갖으며, 3인칭 단수동사 빠쉬야띠는 ‘보다’ ‘응시하다’ ‘지각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에 반해 드르쉬띠는 부분적이거나 편파적·제한적 관점의 의미를 갖는다. 악견(惡見), 애견(愛見) 등이 이에 해당한다. 견(見)에 대해 《대비바사론》95권(T27-489c21)에서는 네 가지와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세분한다. 취해야 할 대상을 보기 때문에 응시[觀視], 취해야 할 대상에 대해 결정하기 때문에 판단[決度], 자신의 대상에 대해 견고하게 치우쳐 고집하고 성도(聖道)의 칼날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완고한 집착[堅執], 바늘이 진흙에 들어가는 것처럼 연(緣)해야 할 것에 대해 날카롭게 들어가기 때문에 깊은 침투[深入]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자세히 보기 때문에 조촉(照囑), 궁구하기 때문에 추구(推求)의 의미도 말한다. 견의 종류 불교 교학상 견은 법수에 따라 2견, 5견, 7견, 8견, 10견 등이 있으며, 외도의 견해로 4견과 62견을 말한다. 이것들은 추탁(推度)의 의미와 관계한다. ①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고 주장하는 무견(無見),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주를 집착하는 상견(常見)과 그 단멸을 집착하는 단견(斷見)이 2견이다. ②5견은 곧 5리사(五利使)로 근본번뇌 가운데 5가지 악견이다. 아뜨만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견(有身見), 극단의 한쪽에 치우쳐 주장하는 변집견(邊執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사견(邪見), 잘못된 착오로 발생한 견해가 진실하다고 주장하는 견취견(見取見), 부정확한 계율과 금제 등을 보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계행이라고 주장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염오한 견해[染汚見]이자 바르지 않은 견해[不正見]로, 《대비바사론》에서 말한 두 가지 또는 네 가지 의미에 상응하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③7견은 사견(邪見), 아견(我見), 단견(斷見), 상견(常見), 계금취견(戒禁取見, 戒盜見), 바르지 못한 행위에 의해 얻은 결과를 바른 것이라 여기고 집착하는 과도견(果盜見), 진리를 의심하는 의견(疑見)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5견과 중첩되기도 한다. ④《구사론》2권(T29-10c08)에서는 여덟 가지로 견을 구분한다. 곧 앞의 5견에다 세간의 정견[世間正見]·유학위의 정견[有學正見]·무학위의 정견[無學正見]을 더한 것이다. 세간의 정견이란 생득혜·문혜·사혜·수혜 등의 유루(有漏)의 혜(慧), 유학위의 정견은 유학위에 있는 자의 각종 무루(無漏)의 견해, 무학위의 정견은 무학위에 있는 자의 각종 무루의 견해이다. 이것들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한다고 하는데, 자세히 생각한 뒤에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⑤10견은 10수면(十隨眠)을 말한다. 6가지 근본번뇌 가운데 견수면(見隨眠)을 5가지로 세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성질이 날랜 5리사(五利使) 곧 5견은 앞서 말한 바와 같고, 상대적으로 성질이 무딘 5둔사(五鈍使)는 탐견(貪見)·진견(瞋見)·치견(癡見)·만견(慢見)·의견(疑見)으로서, 이것들 모두를 10견이라 한다. 이외에 외도의 주장을 총망라한 비불교적 견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4견과 62견이 있다. 세계는 상주한다, 세계는 무상하다, 세계는 상주하면서 무상하다, 세계는 상주하지도 무상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4구분별로 분류한 것이 4견이다. 또한 사인사과(邪因邪果), 무인유과(無因有果), 유인무과(有因無果), 무인무과(無因無果)를 4견이라고도 한다. 62견은 붓다 생존 당시 상주론, 단멸론, 회의론, 무인론 등 다양한 주장을 펼친 외도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 10견 또는 35견으로 축약하기도 한다. 무엇이 보는가? 그렇다면 그 기능인 ‘보다’는 것의 행위주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주장자의 관점에 따라 분분하지만, 그 주장이 중점을 보면 상충을 벗어날 수 있다. 첫째는 근견가(根見家)이다. 바수미뜨라(Vasumitra, 世友)를 필두로 유부에서는 눈이 대상을 취해 관조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눈[眼根]이 본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응시의 관점에서이다. 둘째는 다르마뜨라따(Dharmatrāta, 法救)와 대중부, 《성실론》에서 주장하는 식견가(識見家)이다. 그들은 안근이 아닌 안식(眼識)이 대상을 본다고 말한다. 이것은 판단의 관점에서이다. 셋째는 고샤(Ghoṣa, 妙音)가 제기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慧)가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도 판단의 관점에서이다. 넷째는 대승에서 주장한 근(根)과 식(識)이 화합해 본다는 것이다. 특히 비유자(譬喩者)는 안식과 동시의 심과 심소법들이 화합해 보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은 응시와 판단의 관점을 다 포함한다. 다섯째는 유식에서 제시한 견분(見分)이다. 8식의 심왕과 심소법이 대상을 연[能緣]하는 행상이 그것으로, 여기서는 응시의 관점에 해당한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