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衆生) |
인간 말고도 또… |
공생의 외연확장 및 열반 개념 내포 ‘중생’은 불교 안팎을 막론하고 폭넓게 사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자 또한 신구역어 혼용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한자가 갖은 의미를 굳이 풀어 ‘뭇 삶’ ‘여러 태어남’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포괄적 의미를 무시한 단순한 의미 이해에 불과하다. 중생에 상응하는 산스끄리뜨는 사뜨바(sattva)이다. √as에서 나온 사뜨(sat)는 ‘있는’ ‘현존하는’ 등의 의미를 갖으며, 뜨바(-tva)는 중성명사화 시키는 전형적 어미이다. 곧 사뜨바는 문자 그대로는 ‘있음’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가리키는 술어로, 또한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유한 생물체로 사용한다. 여기서 생물체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6취안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이 사뜨바를 현장(玄奘)은 유정(有情)으로 한역했다. 유정은 마음[心識]을 갖고 있는 살아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함식(含識)이라 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산·천·초·목·대지 등은 유정이 아닌 비유정(非有情)이라 한다. 그보다 앞서 진제(眞諦) 등의 역경가들은 중생(衆生)으로 한역했다. 이를 구역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편화된 술어는 바로 이 구역어인 ‘중생’이다. 그런데 《현응음의》를 보면, ‘중생’이란 말은 사뜨바 외에도 바후자나(bahu-jana), 잔뚜(jantu), 자가뜨(jagat) 등에도 상응한다. 후자의 세 단어는 모두 ‘함께 생존하는 것’의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와 구별하기 위해 현장은 ‘유정’이라 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해석학적 입장은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유정은 6취에 있는 유정식의 생물이며, 이것에 의지해 산천초목 등은 비정(非情)·무정(無情)이라 하지만, 중생은 유정과 비정 둘 다를 포함하는 말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유정이 바로 중생의 다른 이름이며, 둘 다 유정의 생물과 비정의 초목 등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본디 번역이란 역자의 의지가 투영되는 것이기에 두 역어의 우열은 차치하겠지만, 유정은 직역에 충실한 결과물이고 중생은 폭넓은 의미를 담는 의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론에서는 중생의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내리고 있다. 예컨대 《장아함》22권에서는 “남자, 여자, 존귀, 비천, 위, 아래가 없고 다른 이름이 없이 대중과 함께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한다”, 《대지도론》31권 및《대승동성경》1권에서는 “5온의 많은 연(緣)들의 일시적 결합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한다. 이른바 지·수·화·풍·공·식·명색·6입의 인연으로부터 태어난다”,《부증불감경》에는 “법신이 갠지스강 모래보다 많은 끝이 없는 번뇌에 얽혀 무시로부터 오고, 세간의 파랑에 수순해 표류하고 생사를 왕래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중생’이라 말하지 ‘중사(衆死)’라 하지는 않는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기에 생(生)이란 말은 사(死)를 포함하지만, 열반에 들어가는 경우처럼 죽는다고 해서 반드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적 작용을 갖는 존재자가 중생 중생의 범위에 대해 일반적으로 ‘9류중생(九類衆生)’을 말하지만 이는 그 부류일 뿐 본질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본질은 구제대상이라는 점과 업을 생성하는 자라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은 결국 의지(意志)로 귀결된다. 훌륭한 가르침을 만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타인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그에 따른 수많은 실천수행이 수반돼야 가능하다. 또 성도 이전의 유정들은 자신의 의지로 출현한 혹·업·고(惑業苦) 3도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중생의 범위는 의지적 작용을 갖는 존재자로 구체화 된다. 여기에 포함되는 부류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박테리아, 지옥에 있는 자, 귀신, 아귀, 성문, 연각, 보살도 아우른다. 따라서 그 의미를 좁혀 사람에 한정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경우처럼 인간만을 최고로 인정하는 매우 편협한 사고이며 제한된 애타주의이다. 또 종교적 의미에서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존재-붓다·보살-와 구별해 아직 미혹에 빠진 사람 및 동물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붓다·보살도 중생에 포함된다. 특히 《열반경》에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붓다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신뢰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산천초목이나 돌, 쇠 등처럼 중생의 범주에 들 수 없는 것들은 비중생(非衆生; 非有情; 無情)이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저 삼각산 인수봉바위는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구제할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적 자연관, 초목성불론 불교에서 사뜨바는 이 5탁악세(五濁惡世)를 건너 저 언덕으로 건너게 할 대상을 말한다. 또 그것은 무정물이 아닌 유정물에 한정돼 있다. 사실 붓다가 무정물인 돌을 향해 연기(緣起)나 8정도(八正道)를 설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한 마디로 무정물은 제도대상이 아님을 말한 것이며, 나아가 무정물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중국의 삼론논사 길장(吉藏, 549~623)은 초목(草木)도 성불할 수 있다고 《대승현의》3권(T45-40c15)에서 밝히고 있고,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에서도 초목성불을 강력히 주장한다. 초목에 불성이 없다는 교조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그 반대되는 입장을 피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불교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유·무정물을 망라한 모든 것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 공성(空性) 자체를 붓다라 보는 입장이다. 둘째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상의상관(相依相關)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유정 무정에 관계없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 연기이고 공성이고 중도임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목성불의 대두는 자연물에 대한 불교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이 ‘nature’가 아닌 ‘suchness’이며, 정복 대상이 아니라 자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도반임을 말하는 것이다. 보디(boddhi, 菩提)를 향해 가는 자로써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 고마운 존재로서 인식해 조화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동떨어진 독자적인 존재자가 아니고 그 일부로서 자연을 보존해야 함은 자명해진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