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欲] |
선불선(善不善) 이전의 능동적 지향성 |
S·P : chanda T : ’dun pa E : desire Cs : 闡那 |
불교에서는 존재자의 존재터전을 3계 9지로 설명한다. 잘 알듯이 욕계·색계·무색계가 3계이고, 사마디의 깊고 엷음에 따라 색계와 무색계를 각각 4가지로 구분해 총 9대지(大地)가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사마디가 있는 곳과 그것이 없는 곳의 구분이 ‘욕망[欲]’의 유무로 설명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상위 2계의 유정에게는 욕망이 없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곳에도 욕망이 있다. 다만 전자의 원어는 까마(kāma), 후자의 것은 찬다(chanda)로서, 그 의미들의 잘못 이해로 혼동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다.
바람 … 행동발생의 근거
‘谷 +欠’으로 구성된 ‘欲’은 각각 물이 솟아 나와 내로 통하는 곳[谷]과 다른 것을 부러워함[欠]을 의미한다. 따라서 욕(欲)은 ‘입을 크게 벌리고 텅 빈 계곡처럼 끝없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글자이며, 이로부터 ‘하고자 하다’는 근원적 의미가 파생됐다.
이 의미는 그대로 산스끄리뜨 찬다(chanda)와도 상통한다. 곧 지어야 할 일을 바라는 정신적 작용이다. 그래서 역경가들은 이것을 ‘욕(欲)’ 또는 ‘낙욕(樂欲)’으로 의역했다. 《구사론》4권(T29-19a19)에서는 “욕망이란 어떤 일을 꾀하려 바라는 것”이라 하고, 《잡집론》1권(T31-697b5)에서는 “욕망이란 좋아하는 일들에 대해 그것 그것을 발생해 (중생의 환경을) 향상시키기를 바라는 것이 본질, 열심히 노력하는 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 작용”이라 설명한다. 이와 같이 찬다[욕망]는 어떤 대상을 향해 무언가 하거나 가지려고 하는 바람이 그 기본 의미가 되며, 이것은 다시 2차적으로 어떤 행동을 발생시키는 근거가 된다.
존재론적 범주 규정에 있어 욕망은 해석에 차이가 있다. 유부에 따르면 욕망은 일체 모든 마음종류에 상응해 발생하는 것으로 10대지법(大地法)에 포함된다. 하지만 유식학파에서는 마음이 대상을 포착하는 것은 주의집중[作意]에 의한 것이지 욕망[欲]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욕망은 일체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는 대상을 연할 때에만 발생한다는 제한적 발생을 주장하며 5별경(別境)의 하나로 규정한다.
떠난 욕망, 띤 욕망
불교에서 욕망이라 말할 수 있는 술어는 대표적으로 찬다(chanda)와 까마(kāma)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찬다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을 연상시키며 대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작용이다. 이러한 마음작용은 결과적 가치가 선·불선·무기(善不善無記) 중 어느 것이든지에 관계없이 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찬다는 긍정적·부정적 성질을 갖지 않는다.
반면 부정적 성질을 갖는 욕망이 까마이다. 까마는 잠이나 성행위처럼 감관을 통해 이뤄지는 욕망이다. 3계 가운데 욕계(欲界)의 명명도 식욕·수면욕·음욕같은 이러한 까마가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예컨대 욕계에는 성욕이 있지만 색계와 무색계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욕계에는 22근(根)이 모두 있지만 색계에는 남근과 여근이 없고 음욕도 제거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의미를 담지하면서 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술어가 탐(貪) 또 탐욕(貪欲)으로 의역되는 라가(rāga)이다. ‘붉음[赤]’ ‘연소(燃燒)’라는 라가의 기본의미처럼 불꽃처럼 타오르는 맹렬한 탐욕이 그것이다. 유정(有情)으로서 가장 끊기 힘든 세 가지 번뇌인 탐(貪)·진(瞋)·치(癡) 가운데 하나로 규정된 라가는 이미 지닌 것을 거머쥐는 집착적 성질을 갖고 있다. 특히 그 집착대상이 물질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수행 과위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다는 특징이 있다.
삶의 활력으로 발현시켜야
다시 상기시키면 여기서 논의하는 바는 까마가 아닌 찬다이다. 곧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자 가치중립적인 욕망이다. 가치중립이란 선성(善性)이나 불선성(不善性)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면서 또한 선성이나 불선성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곧 욕망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유익한 것으로 또는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집착하는 불선과 결합한 욕망은 괴로움의 뿌리가 될 것이고, 선과 결합한 긍정적인 욕망은 수행의 기반이자 삶의 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후자를 지향한다. 불교는 수행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최고의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것은 욕심이다’는 말이 있듯이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욕망은 주어진 삶의 조건이자 삶의 근원이 되는 힘이다. 이것을 발현시키는 것이 우리의 평생 숙제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건강한 동력이 될 수도 있고 괴로움의 뿌리가 될 수도 있는 욕망이 삶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끔 노력하는 게 수행자의 본분이리라.
김영석/불교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