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서원(誓願)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09

서원(誓願)
‘바람’보다 ‘강한 결의’ 의미 담아

S: pran.idhāna, pran.idhi P: pan.idhāna T: smon lam. E: vow Cs: 鉢羅尼陀那

불교에는 서원(誓願)이 있고 기독교에는 소원(所願)이 있다. 근대 이후 우리를 세뇌시켰던 고린도전서 13장의 영향으로 내가 하는 게 서원인지, 소원인지, 또 이럴 때 서원을 내야 하는지, 소원을 내야 하는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서원과 소원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그 중심에 ‘내’가 있느냐 ‘남’이 있느냐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서원(誓願)은 초기불교에서도, 대승불교에서도, 지금의 한국불교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말이자, 대승불교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이타(利他)활동의 근거로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자들이 서원과 소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격의불교(格義佛敎)의 맹점에 빠져있는 꼴일 것이다.

의타(依他)적인 ‘바람’보다 의자(依自)적인 ‘결의’

서원(誓願)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는 쁘라니다나(pran.idhāna) 또는 쁘라니디(pran.idhi)로, 줄여서 ‘원(願)’으로도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pra-n.i-√dhā라는 동사로부터 나온 파생어로서, 여기서 pra는 ‘앞에’라는 의미이고, n.i는 ‘아래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앞에 두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으로부터 ‘앞(시간적으로 미래)에 마음을 두다’는 의미로 되고, 다시 ‘미래에서의 무언가를 바라다’로 확장되고, 여기서 파생된 명사로서 ‘미래에 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의미는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것 혹은 윤회적 생존 상에 나타난 의미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닌 그 바람을 실현시키려는 의지로서의 바람이다. 곧 행복한 내세나 깨달음을 얻은 불과(佛果)의 증득에 대해 마음속으로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또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를 넘어 수행의 완성을 반드시 실현시키려는 ‘강한 결의나 굳은 맹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한역어에 나타난 의미를 음미해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원(願)은 원망, 희망, 기대, 의향 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향이 강한 반면, 서(誓)는 결의, 약속, 보증, 선서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둘 사이에는 의지의 견고함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전자는 약하고 후자는 강하다는 다른 점이 있다. 이렇게 의미가 다른 2개의 말을 결합해 쁘라니다나(pran.idhāna)을 ‘서원’이라 번역한 것은 그 본래적 의미를 잘 반영한 말이라 하겠다.
법장(法藏, 643~712)이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2권에서 “마음에 따라 바라는 것을 원(願)이라 하고, 원하는 것에 맞아떨어지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을 서(誓)라 한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는 2차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곧 단순히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는 그 중심에 ‘나’가 아닌 ‘타자’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원인과 결과를 자신의 행위가 아닌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의지하는 것은 불교에서 철저히 배격되는 부분이다. 서원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 그 기저에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철저한 노력을 수반하는 것이지, 그 밖의 누군가에게 의탁하는 성질의 것은 전혀 없다. 여기서 서원과 소원이 구분된다.

서원사상과 보살사상

사실 쁘라니다나(pran.idhāna)가 초기불교에서부터 교학적 의미를 품은 술어로 정립된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에 나타난 본원(本願)이나 서원에서 볼 때 초기불교에 나타난 그것은 이타(利他)의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 들어 보살사상의 성립과 더불어 보살이 추구해야 할 서원사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가장 잘 어울리는 말로서 이 쁘라니다나(pran.idhāna)가 선택됨으로서 보다 깊은 의미를 함유하는 술어로 된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쁘라니다나(pran.idhāna)가 초기불교의 그것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 해도 오히려 대승불교에 나타난 보살사상에 힘입어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는 보살의 바람을 의미하는 것에 적합하다 하겠다. 또한 대승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타의 정신을 결여해도 미래에 있어서 성취하려는 바람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굳은 의지, 결의를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 의미는 계승되어졌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보살의 중생제도 이타행이 보다 중시된 대품계《반야경》에 있어서 서원은 방편으로서 중요시되어 발전한다. 《반야경》의 공사상 원형에 있는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3삼매의 입장에서 보면 서원은 인정될 수 없는데도, 거기서 서원을 말하는 것은 방편으로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이 중생에게 권장하는 6바라밀과 결부된 서원설이 나타나고, 또한 10지설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보살의 서원이 ‘무변의 서원(無邊誓願, anantapran.idhāna)’으로 술어화된 것이며, 이 단계에서 《반야경》에 나타난 보살행으로서의 서원사상이 확립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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