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업(業)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04

업(業)
미래지향 성격, 자유의지 강조하는 술어

S: karman, P:kamma, T: las, E: karma or kamma, Cs: 羯磨


‘업’이나 ‘업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말해봤음직한 말들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본래 의미를 떠나 부정적·비관적 뉘앙스를 풍긴 채 이해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이러한 푸념하는 말들로 치부하는 것은 약자의 특징이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의 모습이다. 석가모니붓다는 그렇게 이해되는 것을 업(業)이라 한 적도 없거니와, 불교에서의 업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업(業)은 윤회(輪廻)와 더불어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두 술어는 불교에서 생성된 말이 아니다. 인도사상가들도 업을 말하고 윤회를 말하고 나아가 해탈을 말한다. 하지만 인도의 기존사상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석가모니는 보았다. 거기에는 과거지향의 숙명론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 있었고 죽은 후에 천상의 낙원에 태어나는 것을 해탈로 여기고 거기서 그쳐버리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석가모니가 가르친 것은 앞으로 다가올 때를 향하면서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고 개척할 수 있다는 무한한 능력과 자유의지였다.

여기서는 범위를 축소해 그 근본 의미에 중심을 맞춰 살펴보자.

‘행위’에서 ‘의지’로

사실 ‘업(業)’이란 말은 불교만의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 출현 이전부터 이미 인도인들의 생활사에서 인간의 행위(action)를 의미하는 말로, 제사를 의미하는 말로 있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이 두 의미는 불교에 차용됨으로써 전자는 여기서 살펴볼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의 의미로 구체화되고, 후자는 수계·참회·결계 등 계율과 관계있는 의식에서 선(善)을 발생시키고 불선(不善)을 소멸시키는 작법(作法)의 의미로 정착된다.

업(業)은 산스끄리뜨 ‘karman’에 해당하는 한역어로서, ‘짓다’ ‘조작하다’ 따위의 의미를 갖는 √kr.을 어근으로 한다. 그래서 업을 ‘행위(action)’로 이해하는 것이 틀리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곧 일상의 단순한 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투영된 몸과 마음의 모든 활동(Intentional action)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이행된 것이다.

업의 의미에 대해 불교대백과사전격인《대비바사론》113권(T27-587b)에서는 3가지 관점에서 정의한다. 첫째 이 세상 모든 것의 작용과 활동, 둘째 7중(七衆)의 법식을 유지하는 것, 셋째 일반적 의미인 바라는 결과나 바라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이다. 아 가운데 첫 번째는 업에 대한 가장 포괄적 의미로서의 설명이고, 두 번째는 지금 한국불교에서도 통용되는 갈마(羯磨)의식에 관계된 의미이다. 세 번째가 지금 설명하는 내용과 연관된 가장 일반적 측면의 업으로서, 업인(業因)과 업과(業果)의 관계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관점에 따라 수많은 업의 분류가 있어도 결국은 선업(善業)의 증대와 불선업(不善業)의 지멸에 귀결된다.
이 논에서는 한편으로 업의 의미를 작용, 행동, 조작이라 하고 어업(語業), 신업(身業), 의업(意業)에 배대시키기도 한다.

업은 본질은 자유의지(思, cetanā)

석가모니붓다가 이른바 ‘불교적 업’을 제창한 이래 불교논사들은 수많은 의문과 논증을 거치면서 그것을 체계화시켰다. 업의 본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업의 본질에 대한 불교 학파들간의 이해는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설일체유부는 3업 가운데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은 색법(色法)을, 의업은 사(思)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의업은 심법에 속하기에, 그리고 신업은 물질[色]을, 어업은 소리[聲]를 본질로 하기에 3업의 본질이 서로 구분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경량부와 대승 학파에서는 3업이 모두 사(思)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성유식론》1권(T31-4c29)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사(思)를 신업이라 하고, 말을 발생하는 사(思)를 어업이라 하며, 고찰하는 사[審慮思]와 결단하는 사[決定思]가 의와 상응하고 의를 작동하기 때문에 의업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사유하는 사[思惟思] 곧 고찰하는 사와 결단하는 사를 사업(思業)이라 하고, 일을 짓는 사 곧 움직임을 일으키는 월등한 사[動發勝思]를 사이업(思已業)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

여기서의 사(思)는 10대지법 또는 5변행심소에 속한 것으로서, ‘의지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의지는 타자(他者)의 의지가 아닌 바로 자신의 자유의지이다. 이것으로 업이 적극적·능동적·주체적 실천행을 요구하는 개념임이 증명된다. 또한 불교가 결과론(結果論)보다는 동기론(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창조와 변혁도, 자신의 굴복과 퇴보도 모두 ‘바로 지금’ 나의 행위에 기인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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