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의(意)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03

의(意)
의업(意業), 의근(意根), 마나식[末那識]으로 의미확대

S·P: manas T: yid E: the mind Cs: 末那

산스끄리뜨 ‘manas’는 의(意)로 한역되는데, 경우에 따라 마나[末那]로 음사되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말 어느 한 단어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마나스(manas)는 ‘마음’뿐만 아니라 ‘사고’, ‘지성’, ‘고려’ 따위의 의미도 갖기 때문이다.
한역어 의(意)는 본디 ‘말씀을 살펴 뜻을 아는 것’이라고 《설문해자》에서 풀이하고 있다. 곧 인식(認識)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불교교학에서는 이것과 무관한 다의적 요소를 갖고 있다. 조작(造作)이나 등무간(等無間)이나 헤아림[思量] 따위이다.

업(業) 측면에서 의업(意業)...마음 본체에 부속되어 작용하는 마음작용

의(意)는 신(身)·구(口)·의(意) 3업의 한 축인 의업(意業, manas-karman)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의업이란 ‘마음[心王]에 의지한 활동이 일으킨 형태가 없는 일체 행위’로서, 여기서 의(意)는 마음 본체에 부속되어 작용하는 마음작용을 포괄한 말이다.

따라서 의업은 간략히 ‘마음이 발생한 업’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사(思)라는 마음작용이 자리 잡고 있다.
《구사론》13권(T29-55a25)에서는 “사(思, cetanā)는 의업(意業)이다”고 했는데, 보통 마음[心王]이 유익하거나 유익하지 않거나 그도 저도 아닌 것을 조작하도록 하는 것이 사(思)이기 때문에 의업과 사(思)가 같은 의미라고 한 것이다. 또 《성유식론》1권(T31-5a1)에서는 고찰하는 사[審慮思], 결단하는 사[決定思], 표면행위로 드러내는 사[動發思] 3가지 가운데, 앞의 2가지가 의(意)에 상응하고 의(意)를 작동하기 때문에 의업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곧 아비달마불교나 대승불교에 관계없이 모두 의업(意業)이 사(思)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根) 측면에서 의근(意根)...직전 소멸한 앞 찰나의 6식

의(意)는 6근의 하나인 의근(意根, mana-indriya)의 의미도 갖는다. 의근은 앞 찰나의 6식이 소멸하고 뒤 찰나의 6식이 발생하는 데 근거가 되는 요청되어진 근이다.

전5식에는 각각 승의근과 부진근으로 구성된 안근이나 이근 따위의 의지처가 있지만 제6의식에는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간단없이 소멸한 앞 찰나의 6식을 의근으로 건립하고 이것을 의지처로 삼아 법경(法境)을 상대해 의식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구사론》1권(T29-4b3)에서 “6식신이 간단없이 소멸하는 것에 의지해 의(意)라 하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식의 끊임없는 상속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앞 찰나의 식과 뒤 찰나의 식의 연결고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직전 소멸한 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직전에 과거세로 흘러가버린 앞 찰나의 6식이 의근이기 때문에, 의근이 바로 다음 찰나의 6식을 이끌어 발생하는 데에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6식의 존재와 작용은 의지처인 의근을 떠나 말할 수 없다.

식(識) 측면에서 제7 마나식(末那識).....헤아려 집착함

유가행파는 이전의 6식설을 넘어 8가지로 세분했는데, 그 가운데 제7식이 마나식(manas-vijñāna, 末那識)이다. 여기서 manas는 ‘헤아림’·‘고찰’ 따위의 1차적 의미에 ‘집착’의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헤아림이란 알라야식을 ‘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며, 집착이란 그것이 맞다고 굳게 확신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7식은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4번뇌와 항상 상응한다고 하며, 염오식(染汚識)·사량식(思量識) 따위의 별명을 갖는다.

《성유식론》4권(T31-19b8)에 따르면, 제7식을 의(意)가 아닌 마나[末那]라 한 것은 항상 살피고 사량하는 것이 다른 식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이 제7식이 제6의식에 대해 가까운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마나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은 제6식과 제7식 둘 다 원어 상 manas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것을 반증한다. manas가 ‘意’로 의역되기 때문에 마나식을 ‘의식(意識)’이라 하더라도 의미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6식인 의식(意識, mano-vijñāna)은 ‘의(意)에 의지한 식’, 제7식인 마나식은 ‘의(意)가 바로 식(識)’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를 곤고히 함과 동시에 둘 사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역경가들은 제7식은 음사해서 마나식[末那識]으로, 제6식은 의역해서 의식(意識)으로 표기한 것이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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