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선(善)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02

선(善)
善 = 유익한, ≠ 착한
해탈 열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S:kuśala, P:kusala, T:dge pa; mkhas pa, E:wholesome

초등학교시절 ‘선행상’이란 상장이 있었다. 필자 기억으로 선생님은 선행상을 ‘착한 행동을 많이 한 어린이에게 주는 상’으로 설명하셨다. 그렇게 선(善)은 ‘착하다’와 일대일 대응하는 한자가 돼버렸다. 또한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유학의 여세 때문에 지금도 우리에게 ‘선(善)’은 ‘착하다’는 의미와 직결된다. 그러나 한역불교경전과 관련지어 볼 때 이것은 상당한 장애를 불러일으킨다. 거기에 나타나는 善(선, kuśala)은 ‘착하다’는 의미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꾸살라[善]은 ‘꾸사풀을 꺾는다’가
확대되어 ‘유익한’의 의미로 정립


善의 불교적 의미를 원어에 근거해 살펴보기로 하자. 善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kusala’며, 이것은 곧 ‘kusa + la’로 분석된다. 여기서 ‘kusa’는 억세고 날카로운 ‘꾸사’라는 풀이름이며, ‘la’는 ‘자르다’ㆍ‘베다(to cut)’의 의미다. 그래서 꾸살라는 ‘꾸사풀을 꺾는다’란 1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의미에서 확대된 것이 꾸살라의 불교적 의미이다. 곧 꾸사풀을 함부로 꺾다 손을 벨 수 있어서 지혜로운 주의(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를 필요로 하는데, 그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유익한’·‘익숙한’·‘이로운’ 등의 의미로 정립된 것이다.

꾸살라의 상대어는 아꾸살라(akusala)며, 불선(不善)으로 한역한다. 이것은 악(惡)으로도 한역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다루겠다. 아꾸살라의 의미는 꾸살라와 반대로 이해하면 된다. 곧 해탈 열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결부되어 발생한 모든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nwholesome’·‘unskillfull’ 등으로 번역한다.(이 둘에 무기(無記, avyākr.ta)를 더해 3성(三性)이라 하는데, 무기(無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꾸살라와 아꾸살라 구분 기준은 해탈 열반

그렇다면 어떤 것이 유익한 것[善]이고 어떤 것이 해로운 것[不善]인가? 그 구분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 열반에 의거해 이해해야 한다. 곧 꾸살라는 4념처ㆍ4정근ㆍ4여의족처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약화시켜 불제자가 해탈 열반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며, 반대로 이것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꾸살라가 되는 것이다.

유익한 행위에는 보시, 지계, 명상수행, 공경, 봉사, 공덕의 회향, 공덕을 같이 기뻐함, 법을 배움, 법을 가르침, 바른 견해가 있다. 반대로 10가지 해로운 행위에는 살생, 도둑질, 부적절한 성행위, 거짓말, 잡담, 이간질, 욕설, 탐욕, 성냄, 삿된 견해가 있다.

초기경전에서 붓다는 이러한 선법들은 증가시키고 이러한 불선법들은 없애도록 노력하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데, 4정근(四正勤) 수행이 그것이다.(①이미 발생한 불선은 없애도록 노력하고, ②아직 발생하지 않은 불선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③아직 발생하지 않은 선은 발생하도록 노력하고, ④이미 발생한 선은 더욱 증가하도록 노력하는 것)

불선(不善)과 악(惡)은 같지 않다

이제 불선(不善)과 악(惡)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자 상으론 불선과 악은 크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구분이 필요하다.

불선(不善)은 앞서 보았듯이 ‘해로운’·‘유익하지 않은’ 등을 의미하는 ‘akusala’의 한역어다. 그러나 악(惡)에 해당하는 원어는 ‘pāpa’며, 이것은 ‘복(福)’·‘공덕(功德)’의 의미인 ‘puñña’의 상대어이다. 곧 빠빠는 ‘해로운’ 의미보다 ‘화(禍)’·‘악행’ 등을 의미한 말인 것이다. 예컨대 범문 ‘pāpakā akuśalā dharmāh’를 ‘惡不善法’으로 한역한 것을 보더라도 둘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뿐냐와 빠빠는 각각 선행의 과보와 악행의 과보, 곧 결과의 측면에서 말한 것인 반면, 꾸살라와 아꾸살라는 해탈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원인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불선(不善)과 악(惡)을 동일시 여기는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한문의 특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문은 작문할 때 글자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현장(玄奘)처럼 중국출신의 역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아꾸살라인 불선(不善)을 사용해야 하지만 글자 수의 제한 때문에 한 글자인 악(惡)으로 표기한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마치 경전을 의미하는 수뜨라(sūtra)에 대해 문장의 조어 상황에 따라 3자인 소달람(素怛覽), 2자인 계경(契經), 1자인 경(經)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우리의 잠재적인 사고유형의 영향 때문이다. 유학사상이나 기독교의 이분법적 단순논리 내지는 수행개념이 뒤떨어진 서양철학의 영향으로 수행적 측면의 선과 불선을 윤리적 측면의 선과 악으로 이해해버리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의미는 해탈 열반의 관점에서 유익한 것이고 해로운 것임을 확인했다. 한자 자체의 의미로만 이해하면 불교 본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도 확인했다. 따라서 뛰어난 논사들은 자신의 얄팍한 상식으로 예단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누차 강조한 것이다. 이제는 이분법적 논리틀에 가둬서 선과 불선을, 꾸살라와 아꾸살라를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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