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고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00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고


2010년 가을호 불교평론에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글이 한편 실려 있다. 제목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짧은 소논문임에도 감상문을 쓰게 된 것은 그 글이 주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은 2600년 불교역사에 나타났던 불교를 간단하게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2가지로 나눈다. 스님이 파악한 '기본불교'는 ‘불교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라면 '대승불교'는 ‘불교인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2600년 불교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안목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교를 2가지로 정리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란 무엇인가(깨달음)’라는 것을 넘어서 ‘불교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보살행)’라는 고민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는 선불교가 대세를 이루어 왔기에 깨달음 이외에 다른 문제를 돌아보지 않았다. 출가하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普異 下化衆生)’에서 “상구보리를 하고나서 하화중생 하겠노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들은 세속과 단절된 생활하다보니 불교가 사회적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보다 선어록을 의지해서 공부하다보니 바른 세계관(正見)도 갖추지 못하고 자비와 원력의 바라밀을 실천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님의 주장은 “이 세계가 허망하다고 보는 사실판단위에서도 자비와 원력이라고 하는 가치판단을 내세워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이 시대에 다시 진정한 대승불교를 꽃피워 내자는 것이다.


이 논문은 금강경이 대승경전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금강경이 대승경전인 이유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구절이 ‘應無所住’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生其心’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상(相)에 머물지 않되,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존재의 무아,연기를 조견(照見)하는 반야심경이나 선불교와는 다르게 금강경은 법을 조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보살행을 강조하기에 대승불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엄경을 법계연기나 육상원융의 관점으로 해석해온 중국의 화엄가들은 화엄경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며 10바라밀을 강조하는 화엄경의 십지품이야 말로 화엄경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스님은 “6바라밀이 개인적인 덕목이며 세계관이라면 나머지 4바라밀은 그러한 세계관을 갖춘 불자가 사회적으로 활동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4바라밀이란, 구체적인 현실을 잘 파악하는 지(智)바라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원(願)바라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적합한 방법인 방편(方便)바라밀, 방편을 추진시키는 힘인 력(力)바라밀이다. 이러한 10바라밀을 강조하는 화엄경이야 말로 대승불교의 꽃이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이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쓴 소리도 보인다.

“요즘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몸과 느낌과 마음에 대한 관찰은 하는데 법(5위 100법에 있어 불상응법과 색법)에 대한 관찰을 하지 않음으로써 제대로 된 연기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왜 우리 삶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정치,사회,경제,법,화학,생물,천문학등의 영역(불상응법과 색법)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는가? 불상응법(개념)과 색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좌하고 앉아 명상적 살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독서와 실험, 관찰, 대화, 토론, 강의등을 통해서 가능 할 것이다.”


이렇게 4념처의 법념처 수행의 대상을 경제학, 과학, 정치학 등으로 확대하여 독서, 토론,실험등도 불교수행의 방법으로 보는 것은 불교를 사회와 접목시키고, 생활과 수행이 분리 되지 않는 신선한 접근이라 생각한다. 이 관점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생활속의 불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뒷 받침하는 탁월한 안목이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교육원장 스님이기에, 스님들에게 초기불교부터 대승 선불교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하도록 강원 커리큘럼을 개편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글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2600년 불교역사에 나타났던 불교들을 2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보는 동시에 하나로 회통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회통의 방법은 무아,연기와 불성,여래장이 같은 의미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째로 그는 대승불교의 진아,불성,법신의 용어들처럼 무엇인가 상주한다는 표현들이 이미 초기경전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연기법은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안 하든 법계로서 상주하는 것이다.”

“12인연을 보면 무상도를 보게 되고 법신을 구족하게 된다.”


두 번 째는 淸淨하다는 표현이 연기의 표현이라고 본다.

“경전이나 어록에서 나오는 청정이라는 표현은 ‘깨끗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연기적 세계의 모습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을 잘 살펴 맑음을 본다(住心看淨) 할 때도 그러하고, 그리하여 열반경의 ‘상락아정(常樂我淨)’도 깨끗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반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불성,여래장은 연기상(緣起相)을 가설(假設)하려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본다. “불성,진여,여래장은 바로 이러한 법유(法有),가(假),중(中)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종교적으로 윤색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2가지는 경전상의 출처가 아니라 경전을 보는 안목이므로 객관적인 논증자료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목으로 경전을 해석해야 모순이 없다면 충분히 귀 귀울일 수 있는 설명이다. 스님의 결론은 “불교의 존재관은 무상,무아,연기 →공(空),→가(假),→중(中)→불성,진여,여래장→마음이 부처→만물이 부처라는 단계로 약간씩 뉘앙스가 달라지는 용어들로 다양하게 변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약간씩 뉘앙스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약간 달라진 뉘앙스’때문에 한국불교에는 “진아,불성과 아트만이 무엇이 다르냐?” 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약간 달라진 뉘앙스’ 때문에 이미 “중국에서는 무상,무아를 강조하는 불교보다 진여,여래장,영원한 부처를 표방하는 불교를 대승불교라하여 상위의 자리에 매김하는 전통” 즉, 아함경을 소승경전이라고 폄하하는 ‘우열론’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간’은 엄청난 문제를 잉태시킨 ‘약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왜 뉘앙스가 달라졌는가 하는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언어표현의 입장에 따라 생긴 차이다. 연기,무아라는 객관적인 표현이 여래장,불성과 같은 주관적인 표현이 됨으로써 생겨난 차이라고 보는 것이다.

주관적인 표현은 사람(수행자)에게 한정해서 사용되지만 객관적인 표현은 유정,비유정 모두를 포함하여 사용 된다. 예를들어 ‘불성’이라는 표현은 주관적인 표현이되고 ‘법성’이라는 표현은 객관적인 표현이 된다. 진아,여래장,본래부처라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연기,무아,공은 객관적인 표현이다. 객관적인 이치가 불변하고 상주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표현한 것이 되지만 사람(수행자)이 어떤 불변성을 가지고 그것이 상주 한다고 표현하면 곧 아트만이 된다. 그래서 불성,여래장,본래부처와 같은 주관적인 표현은 항상 상주론의 혐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불변성과 진여성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아래와 같이 객관적인 연기의 법칙을 설명할 때이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이 출현하거나 여래들이 출현하지 않거나 ①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②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③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④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


이와 같이 연기의 법칙은 ①객관성 ②필연성과 ③불변성 ④조건성을 지닌 진리이다. 여기서 ①번 그 도리가 정해져 있는 것을 眞如(tathat?) 혹은 法如法爾라고 변역했다. 연기의 이치가 곧 眞如인 것이다
.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연기의 이치(眞理)는 불변하고 상주한다는 객관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반하여 대승경전에서는 주관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열반경에서 ‘일체중생 개유불성’의 표현과, 법화경에서 ‘본래성불’이라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왜 대승경전들은 주관적인 표현으로 진리를 표현하게 되었는가? 현응스님은 그 이유를 “후대에 경전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변형되었거나 그 당시 인도사회의 실재론(수론,승론등)사상들과 대론하는 과정에서 방어적 차원에서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추측에 동의하면서 인간은 ‘자기 보존’의 욕망이 있고, 이 욕망을 대승불교에서 이용한 것이라는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테고 싶다. 왈풀라 라훌라 스님은 다음과 같이 자기보호와 자기보존 관념을 설명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념이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다. 사람은 자기보호를 위하여 신을 창조하였다. 자기자신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신에게 의존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 아빠에게 의존하듯이.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영원히 사는 不死의 '영혼' 또는 아트만의 관념을 품어 왔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이 두 가지를 갈구한다.”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래는 인간의 욕망이 ‘신’을 만들고 ‘아트만’을 만든다고 보면 대승경전은 일정수준에서 그 욕망을 긍정하고 충족시켜주는 방편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법화경의 화성(華城)의 비유처럼. 그 방편이란 객관적인 언어 표현을 주관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으로, 이것은 욕망을 부정하는 불교에서 단계적으로 나마 욕망의 긍정하는 불교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방편은 단지 ‘약간 달라진 뉘앙스’가 달라졌을 뿐인데도 놀라울 만한 효과를 나타내었는데 이 단계적인 욕망의 긍정은 대승불교가 중생에게 내놓은 가장 성공적인 처방전이라고 본다. 

정리 하자면 객관적인 표현이 주관적인 표현으로 변했을 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의도는 중생의 욕망을 긍정하여 중생에게 삶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방편적인 용어들은 ‘약간 달라진 뉘앙스’를 갖게 되고, 다른 뉘앙스 때문에 상주론을 주장하는 힌두교와 비슷하게 되었다. 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한 동안 번성하였지만 끝내는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주관적인 표현인 부처라는 용어는 진리를 본 사람, 수행의 완성자라는 말이다. 이 부처라는 주관적인 표현이 ‘본래’ ‘만물’이라는 객관적인 표현과 합쳐지면서 ‘본래부처’ ‘만물이 부처’라는 표현이 되고나면 각각의 단어들이 갖는 다른 입장 때문에 모순적인 문장이 만들어 진다. 그래서 “본래 부처라면 언제 어떻게 번뇌가 일어났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본래부처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자주 설명한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주관적인 표현과 객관적인 표현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모순이다. 모순을 모순이라고 바로 보는 것이 정견이다. ‘부처’라는 주관적인 표현을 ‘연기법’이라는 객관적인 표현으로 대체하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된다.

“우리는 본래 연기무아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다.”

‘본래부처’라는 말은 바로 ‘본래 연기 즉, 연기의 불변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초기경전에서 무수히 나타나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표현에서는 “본래 연기,무아인데 언제 어떻게 번뇌가 일어났는가?”라는 의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연기무아의 존재이다.” 라는 표현은 어떤 단어나 객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부처’란 우리 각자가 ‘본래 연기무아의 존재’인 것을 잘 알면 괴로움에서 해탈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응스님의 논문에 대한 감상을 적으면서 이렇게 나의 생각도 보테 보았다. 현응스님의 글은 짧은 논문이지만 불교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관심 범위가 매우 넓으며 각각의 불교에 대해 해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색깔의 불교(예를 들면 중관학이나 유식학)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2600년 동안 일어났던 불교를 이렇게 간단하고 선명하게 정리 했다는 것은 현응스님의 깊은 내공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끝-
현응스님의 논문을 읽을 수 있는 곳;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99
-후박나무님의"속도가아니라 뱡향이다" 에서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