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一乘)과 삼승(三乘)
《법화경》은 '진실한 가르침은 모든 중생이 끝내 부처님이 되는 길 하나 뿐'이고 그 외의 제2·제3의 길은 없다고 주장한다(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여기서 제2·제3이라는 것은 불제자를 위한 길이라고 하는 성문승과 독각승(또는 연각)을 말한다.
또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비유[장자가 아이들에게 양·사슴·소 삼차(三車)의 완구를 주어 놀게 했는데 집에 불이 나자 아이들은 그 완구에 집착하여 나오질 않으려 했다. 장자는 더 좋은 대백우차(大白牛車)를 보여 아이들이 불난 집에서 나오게 했다]에서 보듯이 과거의 가르침인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삼승을 대신하는 일불승의 교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승의 '승(乘)'은 대승의 승과 마찬가지로탈 것(乘物)을 지칭하는 것으로 원래는 부처님의 교법에 비유한 것이다. 대승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버스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피안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라 하고 과거의 가르침은 한 사람씩 태워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자전거나 택시 같은 것이라 하여 소승이라고 낮춰 불렀다.
대승에서 소승이라 부르는 것 중에는 앞서 말한 성문승과 독각승이 포함된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阿羅漢)을 지칭하고 독각은 연기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독각이란 초전법륜을 하기 이전 무사독오(無師獨悟)한 부처님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대승에서 이들을 소승이라 하는 것은 자신들만 해탈하고 중생구제(在家者의 救濟)를 외면하는, 다시 말해 자리(自利)만 추구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승은 일괄해서 성문·연각을 이승(二乘)이라고도 부른다.
이 2승과는 달리 또 하나의 길로서 보살→성불의 코스가 있다. 이것은 석가보살이 걸었던 길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같은 길을 걸어서 성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승원불교(僧院佛敎)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리고 이 삼자는 각자 목표도 다르며 동시에 거기에 올라타는(수행하는)자도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즉 성문의 길을 걷는 자는 아라한이 될 뿐이고 부처님은 절대 되지 못한다. 독각도 마찬가지로 그것 밖에 될 수 없다. 이같은 사고방식을 삼승설이라고 한다. 대승불교는 보살→성불의 길을 넓혀서 중생들도 그곳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경전에 의해서는 전통적인 소승의 무리는 별개라 해서 함께 넣지 않는 일이 많았다. 즉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의 광대한 자비 아래서는 성문도 연각도 그리고 보살은 물론 모두가 동등하게 부처님이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강조한 것이 《법화경》이었다. 부처님 눈으로 본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자손, 즉 '불자(佛子)'라는 것이다. 사리푸타(舍利佛)와 마하카사파(大迦葉)와 같은 불제자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 비로소 자기들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는 장면이 이 경전에 묘사되고 있다. 이것을 '일승(一乘)'이라고 하는데 대승의 최고 이상이다. 다만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는 이런 사실을 설법하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되는 일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부처님은 방편에 따라서 이승의 길 또는 삼승의 길을 구별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일승의 주장에는 이같은 부처님의 자비심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 가르침은 부처님에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이다. 이런 일승사상의 발전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성불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여래장사상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중생이 갖는 가능성, 능력이라는 점에서 중생은 '부처님의 종성(種姓)'을 가진 존재, 또는 부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라 볼 수 있다. 삼승설은 이와는 달리 각자의 길에 속하는 나름대로의 다른 능력이 선천적으로 있다고 보고 삼승의 종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인도사회에서 네 개의 카스트(種姓)가 선천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뜻에서 일승의 가르침,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을 가졌다고 하는 여래장의 가르침은 '상가에 들어가면 바라문·그사트리야 등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불자(佛子)이며 사문석자(沙門釋子)라고 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교훈(四姓平等)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 대승불교의 역사를 보면 삼승설의 뿌리도 의외로 완강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선천적인 종성이라기보다는 행의 어려움을 주장하고 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직시할 때 집착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중생과 부처님과의 간격이 얼마나 먼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삼승설에서 오직 진실한 교훈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식설(唯識說)에 의한 유가행파다. 이 파에서는 삼승의 코스가 확정되기 전(즉 各乘의 종성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종성(種姓)은 미결정이라 한다. 이를 '부정종성(不定種姓)'이라고도 하는데 일군(一群)의 중생은 수행의 결과 어떤 코스가 정해진다고 보고 있다. 이를테면 후천적으로 종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밑에 다시 어느 쪽으로 굴러도 영원히 열반도, 깨달음도 불가능한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무성(無性)의 중생'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첫째로 향락주의자, 욕망추구자로 불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을 '일천제(一闡提)'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각이 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 자보다는 유달리 불교를 비방하는 자들이다. 《법화경》도 일승을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법화경》을 비방하는 무리에 대해 극단적인 비난을 하며 파사(破邪)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일천제계통의 생각이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경전은 이같은 악도의 도당이라도 부처님의 자비로 언젠가는 불교로 개심할 때가 있다고 보고 최종적으로 그들도 성불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보살이야말로 대혜(大慧)의 원력에 의해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으므로 일천제는 다름 아니라 보살이라는 생각도 나타났다(大慧闡提). 앞서 말한 지장보살은 보살의 이같은 이상상을 구상화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옛부터 유식설을 바탕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은 삼승설을 주장, 어떤 중생에 대해서는 불성불(不成佛)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대승은 아니고 '권대승(權大乘)'이라고 낮춰 불렀다. 이에 대해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일승설의 천태종은 진실한 대승이라 하여 '실대승(實大乘)'이라고 불러오고 있다.